43화. 혈전 ― 기다리고 있었어 (1)
덜컹 덜컹.
수상한 소리와 함께 찾아든 인기척에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아린일 거라 예상한 그가 문을 열며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할 일도 있는데 왜 이렇게 늦……."
말을 내뱉던 천무진의 입이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는 순간 서서히 닫혔다.
그곳엔 예상대로 백아린이 있었다.
다만…….
"어? 아직 안 잤어요?"
웃으며 대꾸하는 그녀였지만 천무진의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바로 백아린이 손으로 밀고 들어오는 커다란 수레였다. 그리고 그 크고 무거운 짐을 옮길 때나 사용하는 수레 위에는 물건이 아닌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도 넷씩이나.
천무진이 혈도를 점혈 당해 아예 정신을 잃고 있는 그 네 명의 사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 실려 있는 그놈들은 뭐야?"
"아, 좀 문제가 생겼거든요. 어디 놔둘 데가 없어서 우선 끌고 왔는데, 빈 창고 하나 써도 되죠?"
"여기가 무슨 사람 가둬 두는 곳인 줄 알아?"
단엽이 잡아 온 양휴에 이어 또 다른 이들까지 생겨나자 천무진은 절로 골치가 아픈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양휴처럼 오래 놔두지는 않을 거예요. 며칠이면 되니 그때까지만 가둬 둘게요."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인데?"
"중요한 놈들은 아니에요. 자세한 이야기는 우선 가둬 놓고 나서 드리도록 할게요. 그럼 이놈들은 어디다가 가둬 둘까요? 혈도를 풀어 줄 생각이 없어서 여기 있는 내내 아예 일어나지도 못할 거예요."
"저쪽에 있는 창고 중 아무거나 쓰도록 해."
천무진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물었지만 중요한 이들이 아니라는 말에 천무진의 관심은 급속도로 식어 버렸다.
가둬 두는 걸 허락받은 백아린은 곧바로 수레를 밀며 그쪽으로 움직였고, 이내 창고 안에 네 명의 사내들을 대충 처박아 두고는 곧바로 천무진에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어깨를 풀며 중얼거렸다.
"어휴, 뻐근해 죽겠네."
근처 기둥에 기대선 채로 백아린을 기다리고 있던 천무진이 그들이 갇힌 창고 쪽을 향해 고갯짓을 하며 물었다.
"상태가 안 좋던데?"
수레에 실려 있던 네 명의 사내 모두 얼굴이 퉁퉁 부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숨들은 확실하게 붙어 있었지만 얼마나 얻어맞았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덤덤하게 답했다.
"제 대검이 없어서 망정이었지, 있었으면 저 정도로 안 끝났을걸요."
"역시 직접 한 짓이군. 주먹으로 패기라도 한 거야?"
한눈에 봤을 때도 무기에 찔리거나 베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퉁퉁 부어 버린 걸 보아하니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주먹질은 단엽이 좋아하는 거고 전 박투술은 그리 애용을 안 하거든요. 옆에 있던 노로 좀 두드려 패 줬죠."
"……노?"
"어휴, 좀 더 패 줬어야 했는데 있는 것들이 몇 개 없어서 다 부러질 때까지만 손봐 준 게 못내 아쉽네."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녀를 향해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갑자기 저한테 독을 먹이고 납치를 하더라고요."
"납치를 했다고? 왜?"
천무진이 놀란 듯 되물었다.
"처음엔 혹시나 저희가 조사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더라고요. 그냥 절 노린 거더군요."
"그런데 왜 굳이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거기서 처리했으면 되잖아."
혈도를 점혈 당해 혼절한 상태로 끌려왔으니 이 비밀 거점에 대해 알 리는 없다.
천무진 또한 그러한 부분을 문제 삼기보다는 왜 그 자리에서 끝내지 않고 이곳까지 저자들을 데리고 왔는지를 묻는 거다.
백아린이 말했다.
"저 중 한 놈이 무림맹에 있는 작자거든요. 그 자리에서 죽이기도, 그렇다고 그냥 풀어 주기도 애매해서요."
"무림맹의 인물이 그쪽을 납치했다는 거야?"
"기가 막힌 일이죠. 평소에 옆에서 알짱거리기에 확실하게 거리를 뒀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더군요."
그제야 천무진은 왜 저들이 백아린을 납치했었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내라면 누구라도 혹할 정도로 빼어난 이 여인의 외모에 넘어가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물었다.
"한 놈은 그렇다 치고 나머지 세 놈은 왜 데리고 온 거야?"
"왜긴요. 증인이 있어야죠. 그래도 나름 이름 있는 가문의 자제라 제 말만으로는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치밀한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절로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 나갔다.
"날이 밝는 대로 총군사에게 저자가 벌인 일을 알릴 생각이에요. 그냥 단순히 무림맹에서 쫓아내는 정도로 끝내기엔…… 그 죄질이 가볍지 않은 듯싶어서요."
자신을 건드린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를 납치하고, 또 그 사실이 들통나기 무섭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상대방을 죽이려고까지 한 자다.
추후에 다시금 이 같은 일을 벌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런 자는 지은 죄에 맞는 엄벌로 다스려야 한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을 벌일 생각조차 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번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 이야기한 직후, 백아린은 돌아온 자신과 마주친 그때 천무진이 내뱉었던 첫 말을 기억해 냈다.
뭔가 할 일이 있는데 왜 이렇게 늦었냐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그녀가 물었다.
"아 참, 그런데 할 일이라뇨?"
* * *
사천당문의 금지 금장전.
허락된 다섯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리 높은 신분을 지녔다 해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그곳은 사천당문의 수많은 독들이 보관된 곳이기도 했다.
대부분이 금지된 독물들로, 특별히 관리되는 것들이었다.
그 금장전의 입구로 한 여인이 다가서고 있었다.
백아린과 손을 잡고 움직이고 있는 당소련이었다. 금장전으로 향하는 길목 곳곳을 지나쳐 마침내 도착한 이곳.
아무나 드나들 수 없는 곳이니 만큼 입구의 감시 또한 철저했다.
금장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장소로 다가서는 그녀를 발견한 무인들이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분명 당소련은 이곳 금장전에 출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허락되었다고 해도 얼굴만으로 이곳을 드나들 순 없었다.
당소련이 챙겨 온 패를 꺼내어 들었다.
이 패는 혹시나 다른 누군가가 역용술을 이용해 금장전에 출입하는 걸 막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이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패는 외부에 전혀 공개된 적이 없었고, 또한 안다고 해도 만들기 어렵도록 특별한 재질의 나무가 사용됐다.
출입패까지 확인이 되고서야 입구를 지키는 무인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금장전은 단순한 하나의 창고가 아니었다.
워낙 위험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장소였기에 커다란 돌로 사방을 막았고, 곳곳에 공간을 나누기 위한 벽이 존재했다.
그 크기도 꽤나 커서, 내부에 쌓여 있는 많은 물건들을 전부 확인하기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듯싶었다.
어두운 내부 곳곳에는 야명주가 자리했고, 당소련은 그 불빛을 따라 걸었다. 그녀가 향하고 있는 곳은 금장전에서도 독들을 모아 둔 장소였다.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기에 당소련은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부에는 수많은 독들이 혹시 벌어질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 안전하게 보관되어져 있었다.
당소련은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인 혈린만혼산을 찾기 시작했다.
혈린만혼산은 금장전에서도 특별히 분류되는 위험한 물건이었기에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품 안에서 뭔가 서책 한권을 꺼내어 들었다.
사실 이건 가주에게만 내려오는 물건으로 이곳 금장전 내부에 있는 독들의 양을 정리해 둔 서책이었다.
독들의 유입과 반출이 상세히 적혀 있고, 그것들이 어떠한 식으로 보관되는지도 남겨져 있었다.
제아무리 당소련이라고 해도 함부로 손대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결국 아버지이자 가주인 당세종 몰래 이 서책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녀는 서책을 펼쳐 어느 한 곳을 찾아 응시했다.
혈린만혼산(血燐萬魂散) 네 동이 반.
숫자를 확인한 당소련은 앞에 있는 항아리를 바라봤다. 혈린만혼산이라는 이름이 적힌 개수를 헤아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숫자는 동일했다.
그렇지만…….
먼지가 쌓여 있는 다른 항아리들과는 달리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듯 유독 깔끔해 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당소련이 조심스레 그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보았고, 내부에는 혈린만혼산으로 보이는 가루들이 가득했다.
허나 그걸 확인한 당소련은 곧바로 옆에 있는 항아리를 확인했고,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 손을 댔어.’
두 항아리 내에 있는 혈린만혼산의 양은 적어도 한 주먹 가까이 차이가 났고, 이토록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장소에서 이 같은 오차가 있었을 리 없었다.
당소련은 얼굴을 감싸 안았다.
우려했던 최악의 일이 그대로 벌어져서다.
당백의 죽음, 그 일에 관련된 누군가가 사천당문의 사람이 아니었으면 했다.
간절히 바라면서도 이 혈린만혼산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기에 직접 와서 확인했고, 결국 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의 뒤에는 이곳 금장전에서 혈린만혼산을 빼돌린 누군가가 있을 확률이 매우 컸다.
깊은 좌절감은 이내 분노로 변해 돌아왔다.
"감히 당문의 독을 사사로이 사용하다니……!"
이 일로 벌어질 수많은 일들은 결국 사천당문의 책임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나가 있는 혈린만혼산이 또 무엇인가 일을 벌이기 전에 그 모든 걸 막아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이곳 금장전을 드나들었던 이들을 확인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언제 드나들었고, 또 무슨 목적이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급히 걸음을 옮기던 당소련이 갑자기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을 잡아 끈 또 하나의 항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항아리도 주변의 것들과는 달리 위에 쌓여 있어야 할 먼지가 보이지 않았다.
항아리를 향해 놀란 듯 걸음을 옮긴 당소련은 이내 떨리는 손으로 내부에 든 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도록, 그것을 옆으로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항아리 뒤편으로 가 있던 이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
당소련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맙소사."
망혼초(忘魂草)다.
혈린만혼산도 분명 위험한 물건이었지만, 이건 그보다 더욱 살상력이 뛰어난 독이었다. 엄청난 고수라고 해도 망혼초에 중독당하면 한 시진을 넘기기 어렵다.
어지간한 절정 고수조차도 죽일 수 있는 독, 그것이 바로 이 망혼초다.
그런 위험한 물건이 바깥으로 새어 나갔다.
‘막아야 해.’
혈린만혼산에 이어 망혼초까지.
대체 이 독들을 가지고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보다는 우선 그 누군가의 계획을 막아 내는 것이 먼저다.
당소련이 서둘러 금장전을 뛰어나와 입구를 지키고 있는 무인을 향해 소리쳤다.
"당율 사숙은 어디 계시지!"
당율은 이곳 금장전의 관리자로, 사천당문 내에서도 꽤나 배분이 높은 인물이었다. 지금 당소련은 이곳에 드나들었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를 찾는 것이었다.
그녀의 물음에 무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당황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 방금 전까지 근처에 계셨는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그를 보며 당소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시가 급했기에 그녀는 막연하게 기다리기보다는 직접 움직이기를 택했다.
"혹시나 사숙이 오시면 내가 찾는다고 전해 드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당소련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평소 그가 즐겨 다니는 곳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그곳부터 먼저 가 보려고 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당소련이 찾아간 곳은 금장전 가까이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그는 없었고, 결국 그녀는 다른 장소로 움직여야만 했다.
곧바로 당율의 거처를 향해 방향을 튼 당소련은 급히 움직였다.
그렇게 도착한 당율의 거처.
거처 내부로 들어선 당소련이 막 당율이 기거하는 방 입구에 도달했을 때였다.
"으으으."
방 안에서 들려오는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듣는 순간 그녀가 다급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그토록 찾고 있던 당율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바닥에 쓰러진 채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안색을 보니 단번에 독에 중독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놀란 당소련이 소리쳤다.
"사숙!"
그녀는 서둘러 쓰러져 있는 당율에게 다가가 상체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맥과 함께 숨소리를 확인했다.
‘……얼마 버티지 못해.’
눈으로 보이는 것처럼 당율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이대로 두다가는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모습에 당소련은 그를 침상에 기대 둔 채로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다.
"기다리세요 사숙! 제가 사람을 불러……."
외침과 함께 몸을 돌리던 당소련이 움찔했다.
대체 언제부터였던 걸까?
이렇게 완벽하게 뒤를 잡힌 것은.
열린 문의 입구로 걸어 들어오는 흑의인들을 확인하는 순간 당소련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선두에 선 흑의인의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입가가 완전히 가려져 있었지만, 그 눈을 보면 웃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흑의인이 입을 열었다.
"어딜 가려고."
"……당신들이 이 일을 벌인 작자들인가?"
"그렇다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곳은 사천당문이다! 감히 네깟 살수들이 함부로 드나들 곳이 아니라는 소리다!"
말과 함께 당소련의 몸에서 살기가 풀풀 풍겨져 나왔다. 그녀 또한 사천당문의 무공을 익혔고, 꽤나 빼어난 무인이기도 했다.
문제는 상대가 그런 당소련조차도 뒤를 잡혔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의 실력자라는 것이지만.
분에 찬 듯한 당소련의 외침.
그러자 흑의인이 참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흘렸다.
"킥!"
웃음소리에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를 향해 흑의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아, 그냥 좀 웃겨서 말이야. 듣던 대로 이런 상황에서도 쉽게 굽히지 않는군그래. 물론 그런 성격이 죽음을 앞당겼지만."
"날 아는 모양이로군."
"그럼."
흑의인이 소매를 가볍게 흔들었다.
차앙!
순간 소매 안에서 두 자루의 비수가 떨어져 내리더니 그자의 손바닥 안에 빨려 들어갔다.
두 자루의 비수를 든 흑의인이 여전히 웃음기 담긴 눈으로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