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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40화 (40/293)

40화. 잔꾀 ― 드시지요 (1)

비밀리에 사천당문 방문을 마친 천무진과 백아린은 거처로 돌아왔다.

시각은 얼추 인시(寅時:새벽 3~5시) 정도로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정도로 지나 있었다. 밤을 꼬박 샜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잠자리에 들지 않고 곧장 집무실에 같이 자리했다.

백아린은 확인해야 할 일이 있다며 금호의 비밀 거점에서 찾아 온 서책을 재차 훑어봤고, 천무진은 반대편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약 이 각 가까운 시간이 지났을 무렵.

천무진은 서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백아린을 향해 새 찻잔을 내밀며 입을 열었다.

"차 한잔해."

"아, 고마워요."

힐끔 시선을 돌린 그녀가 찻잔을 들고는 이내 그걸 호로록 마셨다. 소매 안에서 자고 있던 치치는 연신 움직이는 팔이 불편했는지, 안에서 뛰어나와 책상 한구석에 자리하고는 다시 잠에 빠졌다.

천무진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이번 일. 사천당문이 개입되어 있을 것 같은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나저나 일이 점점 커지네요. 무림맹에 온 걸로도 모자라 무림맹의 부관주를 사천당문의 누군가가 죽였고, 그걸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

"그런데 안 물어봐?"

"뭘요?"

"내가 누굴 찾는지, 왜 그들을 찾는지 궁금할 것도 같은데."

천무진의 솔직한 말에 백아린은 잠시 움찔했다.

그녀는 천무진이 건넨 찻잔을 어루만지다 이내 속내를 털어놨다.

"궁금해요. 처음에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미치도록 궁금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자들이 누구인지도 궁금하고, 그들의 목적도 알고 싶어요. 그리고 대체 어떻게 이들을 알아차리고 천룡성이 움직이고 있는지도요."

기다렸다는 듯 내뱉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피식 웃었다.

의자에 기댄 채로 그가 말했다.

"엄청 궁금한 모양인데 용케도 참고 있었네."

"그럼요. 자다가도 생각나면 몇 번이고 벌떡벌떡 깰 정도로 궁금한걸요. 마음 같아서는 당신을 잡아다가 어르고 달래서 뭐라도 더 알아내고 싶지만…… 참으려고요."

"왜?"

"이런 상황에도 밝히지 않는다는 건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소리니까요. 제가 그걸 알려고 하면 당신이 불편해지겠죠."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잠시 그녀를 지그시 바라만 봤다.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잠시 말이 없던 천무진이 이내 그런 그녀의 말에 답했다.

"반은 정답이라고 해야겠군."

"나머지 반은요?"

"글쎄."

천무진이 애매하게 말을 돌리자, 백아린이 그를 향해 투덜거렸다.

"가르쳐 줄 것도 아니면서 괜히 궁금한 부분 들쑤시지 말아요. 힘들게 참고 있는데."

"그렇게 하지."

"차 잘 마셨어요."

백아린은 남은 차를 모두 마시고는 다시금 보고 있던 서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후에도 한참을 뚫어져라 서책을 바라보며 그 안에 적힌 숫자들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던 그녀가 이내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런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말했다.

"피곤한 것 같은데 방에 가서 눈 좀 붙이지?"

"아뇨, 전 멀쩡해요. 조금 더 보고 싶은 게 있거든요."

감기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치켜뜨며 백아린은 다시금 서책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일이 벌어졌고, 그걸 해결하느라 잠깐 눈을 붙일 시간도 없던 그녀다. 무려 닷새를 침상에 눕지도 못했으니 제아무리 무인이라 해도 피곤한 건 당연했다.

어떻게든 버티겠다며 힘겹게 눈에 힘을 주며 서책을 바라보곤 있었지만…….

꾸벅 꾸벅.

결국 책상 앞에서 백아린은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쌔근거리며 책상 앞에서 잠든 그녀를 천무진은 턱을 괸 채로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괜찮다고 호언장담을 하다 갑자기 기절하듯 잠이 든 백아린의 모습에 기가 막히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간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가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불편하게 잠들어 있는 백아린을 보며 천무진은 왠지 모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게 가서 편안하게 자라니까.’

방에 가서 자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려던 천무진은 이내 생각을 바꿨다.

분명 잠에서 깬다면 하던 일을 마무리 짓겠다며 다시금 서책에 몰두하려 애쓸 여인이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됐으니까.

이렇게라도 놔두는 것이 그나마 백아린이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결국 천무진은 그녀를 깨우는 걸 포기했다.

‘하여튼 고집하고는.’

그녀가 조금 더 편안하게 침상에 누워서 잤으면 했지만…….

천무진은 백아린을 깨우는 대신, 자신이 그녀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나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천무진은 까치발까지 든 채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완전히 감춘 채로 움직인 덕분인지, 바깥으로 나갈 때까지 백아린은 깨지 않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였지만 그렇게 어렵사리 걸음을 옮겨 바깥으로 걸어 나온 천무진은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덧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고, 이제 곧 다시 아침이 찾아올 모양새였다.

아침이 오면 다시금 무림맹에 들어가야 할 터이니, 지금의 이 휴식이 그리 길지는 않을 터.

천무진은 곧바로 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천룡성의 하나뿐인 가솔, 남윤의 방이었다.

천무진이 바깥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영감, 일어났어?"

그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며 안에서 남윤이 걸어 나왔다.

"예, 일어나 있었습니다만 이 이른 시간에 작은 주인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다른 게 아니라 한 시진 정도 후쯤 일어날 거 같은데 영양식 좀 부탁할게."

영양식이라는 말에 의외라는 듯 남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천무진이 몸에 좋은 음식 같은 걸 따로 챙겨 달라 부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하지요. 그나저나 어디 편찮으시기라도 하신 겁니까? 생전 이런 말씀 안 하시던 분이 갑자기 영양식을 챙겨 달라 하시니……."

"아아. 나 말고 저기 집무실에서 자고 있는 녀석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천무진의 그 말에 남윤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영양식을 챙겨 달라는 말도 분명 처음이었지만, 이런 식의 배려 또한 익숙한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낯선 모습이긴 했지만, 남윤은 내색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하지요."

"부탁할게, 영감."

말을 마친 천무진이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다 뭔가를 생각해 내고는 급히 말을 이었다.

"아, 혹시 음식이 미리 준비돼도 정확하게 한 시진 후에 부탁해. 조금이라도 더 자게 놔두고 싶어서."

"……알겠습니다."

묘한 표정으로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남윤을 뒤로한 채로 천무진은 자신의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던 천무진이 피곤한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남윤이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거참, 모를 일이로군그래."

한 시진가량을 깜빡 졸던 백아린은 고소한 음식 냄새에 정신을 차렸다.

언제 잤는지 모를 정도로 숙면에 빠져 있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 눈을 뜬 그때, 문이 열리며 남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쟁반 위에는 커다란 그릇들이 몇 개나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백아린이 정신을 추스르는 사이 근처까지 다가온 남윤이 책상 위에 가져온 음식들을 하나씩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보는 순간 백아린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백숙을 비롯해서, 갖은 약재와 해물들이 뒤섞인 찜까지. 밑반찬이라고 나온 음식조차 하나같이 몸에 좋은 것들로만 가득했다.

상을 가득 채운 음식들을 바라보며 당황한 그녀가 물었다.

"이게 아침이에요?"

"그럼요. 드시지요."

말과 함께 남윤은 가지고 온 식기를 내밀었다. 얼결에 그걸 받아 든 백아린은 멍하니 음식들을 내려다봤다.

평소에도 음식을 잘 챙겨 주는 남윤이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식단.

머뭇거리던 그녀가 옆에 서 있는 남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 혹시 어디에서 잔치해요?"

* * *

점심을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거늘 백아린은 허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날아온 엄청난 영양식들 덕분이었다.

처음엔 그토록 많은 영양식이 왜 아침부터 날아들었을까 의아했지만, 이내 남윤에게 들어서 알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천무진의 부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걸.

음식은 맛있었다.

고작 한 시진이었지만 뛰어난 음식 솜씨를 지닌 남윤은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했고, 덕분에 백아린은 살아생전 최고로 많은 양의 아침을 먹었다.

좋은 재료들로 만들어진 영양식 덕분인지 백아린은 아침부터 기운이 넘쳤다.

그리고 힘이 나는 이유는 비단 좋은 음식을 먹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해 준 천무진의 마음 씀씀이, 그 또한 백아린은 나쁘지 않았다.

홀로 걷고 있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자기만 아는 작자인 줄 알았는데 은근 주변 사람을 챙길 줄도 아네.’

생각지도 못한 천무진의 선물은 백아린의 아침을 기분 좋게 만들어 줬다.

그렇게 실없이 웃으며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멈추어 선 곳은 바로 무림맹 바깥에 있는 객잔이었다. 같은 성도 지역이긴 했지만 무림맹 반대편에 위치해 있었기에, 거리상으론 제법 멀었다.

이 객잔에 백아린이 온 이유는, 무림맹에서 내려온 명령 때문이었다. 바로 이곳에 찾아올 누군가에게 물건을 하나 받아오는 임무였다.

그녀는 곧바로 객잔 안으로 들어섰고, 내부는 휑했다.

"어서 옵쇼!"

염소수염을 한 객잔 주인이 백아린을 향해 서둘러 다가왔다. 그가 곧바로 물었다.

"방을 내 드릴까요?"

"아, 아뇨. 여기서 만나기로 한 분이 있어서 온 거라서요."

"그럼 식사를……."

"배가 불러서 그건 좀 힘들 것 같고, 그냥 엽차 한 잔만 내주세요."

일 층에는 손님을 맞는 탁자가 열대여섯 개 정도 있었지만, 개중에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사내 셋이 있는 그 자리를 제외하고는 온통 파리를 날리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주인장은 무척이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만 이내 그자는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예, 알겠습니다요. 그럼 자리에 계시지요."

말을 마치고 객잔의 주인장은 곧바로 사라졌고, 백아린은 비어 있는 자리 중 하나에 가서 착석했다.

들어오는 순간 먼저 있던 사내들에게서부터 자신을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내 그 또한 잠잠해졌다.

그때 그 셋 중 한 사내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사내가 목청을 높이며 말했다.

"이보시오 주인장! 아까 시킨 술이 왜 아직도 안 나오는 거야?"

말과 함께 주방 쪽으로 몸을 들이밀었던 사내는, 이내 술병 하나를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투덜거렸다.

"이러니까 손님이 없지, 쯧."

사내의 투덜거림이 잦아들 무렵.

주방에서 이곳의 주인장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엽차가 담긴 잔을 가지고 백아린에게 다가왔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엽차를 탁자 위에 올린 주인장이 짧게 말했다.

"주문하신 엽차 나왔습니다."

"감사합……."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주인 사내가 휙 몸을 돌려 주방으로 다시금 몸을 감췄다.

주인장이 순식간에 사라진 주방 쪽을 바라보던 백아린은 이내 그가 놓고 간 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따뜻한 엽차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막 한 모금을 머금어 삼키는 바로 그 순간 백아린의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뭐지?’

엽차와 함께 목구멍을 타고 몸 안으로 천천히 퍼져 나가는 이 이질감.

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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