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추론 ― 멀쩡해 (1)
"으리얍!"
시원한 고함 소리와 함께 단엽의 신형이 미친 듯 흔들렸다. 그의 주먹이 연신 허공을 갈랐고, 움직이는 곳을 기점으로 하여 주변으로 기(氣)들이 요동쳤다.
그저 단순한 주먹질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힘이 있었고, 또한 변화가 존재했다.
여청이 죽은 이후 미친 듯 훈련에만 매진하는 단엽의 눈동자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지금 단엽이 있는 장소는 천룡성의 비밀 거점이 아니었다. 답답하다는 이유로 그는 훈련에 열중할 만한 장소를 찾아, 비밀 거점 인근까지 나와 있는 상태였다.
작은 계곡과 커다란 바위들이 가득했고, 인적은 찾기 힘든 장소였다. 비밀 거점에서 경공을 펼치고 이 각 이상을 달려야만 올 수 있는 장소.
주변에 가득했던 바위들은 이미 대다수가 산산조각이 나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단엽의 주먹이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쾅쾅!
그의 맨주먹이 연신 바위를 후려쳤다.
성인만 한 크기의 바위가 놀랍게도 두부처럼 으깨졌다.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는지 단엽은 계속해서 그 바위를 후려쳤다.
이윽고 그 바위가 거의 먼지가 되다시피 해서 사라지자, 단엽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음 표적을 찾았다. 그러고는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다음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그가 성큼 주먹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지금 내기라도 하는 겁니까? 바위랑 주먹 중에 뭐가 먼저 박살 날지요."
"……뭐야?"
미간을 찡그리며 옆으로 고개를 돌린 단엽의 시야에는 돌 위에 걸터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천이 있었다.
한천의 모습을 확인한 단엽이 퉁명스레 말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지금 눈앞에 계신 분이 이틀째 통 연락이 안 돼서 말입니다."
"내가 그쪽한테 보고라도 해야 해?"
"그건 아닌데 당신 주인이 슬슬 복귀해 두라는 말을 전해 달래서요. 그럼 찾아온 이유가 되려나 모르겠네."
유들유들한 한천의 말투에 단엽은 불만스레 표정을 구겼다.
함께한 지 삼십여 일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두 사람 사이는 가깝지 않았다.
단엽은 거의 유일하게 천무진과만 대화를 나눴고, 치치 때문에 종종 백아린에게 슬쩍 부탁을 하는 정도였다.
굳이 대화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기에 한천과 대화를 나눈 건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나마 여청을 교대로 감시할 때 잠깐씩 보던 것이 전부일 정도로 친분이 없는 사이.
바위 위에 앉아 있던 한천이 껑충 뛰어 바닥에 착지했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듯 바람 소리를 냈다.
"휘유, 이 근방에 있는 돌들을 박살 낸 건 전부 단 소협의 짓인가 봅니다."
"맞아."
"설마 다 맨주먹으로 한 겁니까?"
"뭘 그리 당연한 걸 물어봐."
옆에 팽개쳐 뒀던 짐을 챙기며 단엽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그 순간 단엽을 향해 성큼 다가온 한천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채 단엽이 뭘 하기도 전에 그의 손목을 잡아서 자신 쪽으로 당겼다.
한천의 눈이 단엽의 주먹을 살폈다.
팍!
"무슨 짓이야?"
손목을 쥐고 있는 손을 뿌리친 단엽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갑자기 다가오더니 손목을 잡아챘다. 기분이 불쾌한 건 당연했다.
그를 향해 한천이 말했다.
"거 보십쇼. 주먹이 엉망이군요."
한천의 시선이 향해 있는 단엽의 주먹은 붉게 변해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바위를 맨주먹으로 깨부순 것치고는 너무도 멀쩡한 주먹.
살짝 붓고, 껍질이 까져 피딱지가 굳어 있긴 했지만 겨우 그 정도였다.
하지만 한천은 알고 있었다.
단엽 정도 되는 무인의 주먹이 이렇게 변할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횟수를 휘둘러 댔을지를.
그랬기에 한천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무인이라고 해도 이틀 밤낮을 꼬박 바위에 주먹질을 해 대면 성할 리가 없지요."
"성할 리가 없다고 하기엔 내 주먹은 아직 멀쩡해."
단엽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의 주먹과 신체에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단엽이었으니까.
그런 그를 향해 한천이 대답했다.
"몸은 건강할 때 관리하는 겁니다. 특히나 무인에게 손은 생명이지요. 저도 다친 오른손 때문에 얼마나 고생인데요."
자신의 손을 들어 올리며 보여 주는 한천을 보며 단엽은 처음 만났을 무렵 마차에서 떠들어 대던 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기에 아직까지도 기억하는 그 말.
"엄청난 고수들과 백 대 일로 싸우다가 다쳤다 뭐다 떠들어 대던 그 손 말이야?"
"어라? 제가 그 이야기를 했던가요? 이거 엄청 비밀인데……."
"비밀은 무슨. 지나가던 개도 알 정도로 떠들어 놓고는."
툭하면 꺼내는 말이면서 일급비밀이라는 듯 구는 한천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
그러고는 이내 더는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겠다는 듯 한천을 지나쳐 가며 말을 덧붙였다.
"난 아저씨처럼 약골이 아니거든. 그러니 충고는 됐어."
말을 마친 단엽은 쌩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단엽은 문득 뭔가 의문스러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그런데 대체 언제부터 내 옆에 와 있던 거지?’
화가 잔뜩 난 상태로 무공에 열중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한천이 입을 열기 전까지 자신은 그가 지척에 다가와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분명 그건 이상한 일이었지만…….
슬쩍 바라보는 순간 씩 웃어 보이는 한천의 얼굴을 보며 단엽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혼자서 먼저 훅 가 버리는 단엽을, 한천은 그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여전히 싱글벙글 웃는 얼굴의 한천이 그 상태 그대로 입을 열었다.
"저걸 그냥 확……."
* * *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었을 법한 새벽녘.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죽립을 쓴 두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둘의 정체는 천무진과 백아린이었다. 둘의 발걸음이 향하고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사천당문이었다.
당소련이 백아린의 부탁대로 사천당문 내부로 두 사람이 들어올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다.
다른 것도 아닌 죽은 당백의 거처를 살피고자 한 일, 시간이 흐를수록 뭔가를 찾아낼 확률은 줄어들 상황인지라 급히 일정이 잡힌 것이다.
천무진과 나란히 걷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따라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그만큼 중요한 일이잖아."
사천당문에 의뢰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다. 증거품까지 사라진 상황에서 천무진 또한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백아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실력을 옆에서 봐 왔기에 이제는 안다.
그 비상하게 굴리는 머리를 보며 몇 번이고 감탄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같이 사천당문을 찾아가는 건 백아린은 모르는 비밀들이 있기 때문이다.
천무진이 그녀에게 말해 주지 않은 이야기들.
저번 생과 관련된 것들 말이다.
조종되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것과, 그때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어찌 그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정보들이 있었기에 천무진은 백아린과 동행한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을 모르는 그녀가 혹시나 아무렇지 않게 넘길 그 무엇인가가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여겼으니까.
이윽고 두 사람이 도착한 사천당문.
그리고 그곳에서는 시간에 맞춰 미리 나와 있던 당소련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천당문에 들어가는 입구는 총 세 개다.
그리고 그 외에 하나가 더 있었으니, 당문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하는 잡다한 일을 할 때 사용하는 쪽문이었다.
쪽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고, 또 시간이 늦으면 누구도 이용할 수 없도록 굳게 잠겨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비밀리에 두 사람이 들어올 수 있도록 당소련이 미리 손을 써 둔 것이다.
당소련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짧게 인사했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아뇨.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는데 곧바로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저희가 감사하죠."
"저희 쪽에서 필요한 증거품을 잃어버렸는데 이 정도는 어떻게든 해 드려야죠."
물론 그 과정에서 사천당문 또한 당백이라는 인물을 잃었지만, 그 어떠한 핑계를 대더라도 증거품을 잃어버린 건 자신들의 잘못이었다.
당소련의 시선이 이내 백아린의 옆에 있는 천무진에게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죽립의 앞부분을 눌러 쓴 탓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젊은 사내로군.’
큰 키와 슬쩍 드러난 턱 선.
그것만으로도 상대에 대한 간략한 파악은 할 수 있었다.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장소가 아니었다.
당소련이 말했다.
"서두르죠. 시간이 얼마 없어요."
기껏해야 두 시진.
그 이상의 시간은 당소련 또한 만들기 쉽지 않았다. 얼굴도 감추고 있는 이들이 대놓고 손님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상황, 가능하면 오늘 이 은밀한 만남에서 모든 걸 끝마쳐야만 했다.
당소련은 곧바로 두 사람과 함께 쪽문을 열고 사천당문 내부로 들어섰다.
이미 최측근들을 이용해 당백의 거처로 향하는 길목 곳곳의 통행을 은밀히 조절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당소련의 뒤를 쫓아 천무진과 백아린 또한 서둘러 움직였다.
약 반 각 가까운 시간을 움직인 그들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앞장섰던 당소련이 장원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여기가 그분의 거처예요."
"돌아가신 곳이 어딥니까?"
"이쪽으로 오시죠."
천무진의 질문에 그녀가 장원 안쪽으로 둘을 안내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곧바로 당백이 죽었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신이 사라지고, 불이 가득 피어올랐던 아궁이가 차갑게 식어 있는 것만 제외하고 내부는 그 당시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수많은 실험 도구들, 그리고 어지럽게 놓여 있는 여러 종류의 독들까지.
백아린이 그걸 살피는 동안 천무진은 천천히 바닥을 훑어봤다. 사방으로 튄 핏자국,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고 죽은 듯싶었다.
바닥의 혈흔을 보며 천무진이 물었다.
"피가 여러 곳으로 튄 걸 보아하니 일격에 사망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아요. 옆쪽으로 한 번 들어왔고, 가슴에 세 개의 흉상이 있었죠. 그리고 상처는 깨끗했어요. 네 개의 상처 모두 곤(丨)자로 뚫고 들어갔고 그렇게 길지 않은 무기에 당한 것 같아요."
말과 함께 당소련이 부상을 당했던 부위를 손으로 얼추 짚어 줬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주변을 살피던 백아린이 짧게 말했다.
"범인은 왼손잡이거나 아니면 뒤에서 찔렀을 확률이 크겠네요."
"……네?"
백아린의 말에 당소련이 그걸 어찌 아냐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정면으로 다가와 설명을 시작했다.
"상처가 오른쪽 옆구리에 났잖아요.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검을 들 때는 날이 이런 방향으로 서게 드는 것이 일반적이니까……."
백아린이 옆에 있는 긴 막대기를 단숨에 반으로 잘라 버리더니 찌르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들고 찌르는 흉내를 내자 자연스레 편안하게 파고들 수 있는 각도로 인해 팔목이 옆으로 뉘어졌다.
그제야 당소련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렇게 되면 상처는 일(一)자가 돼야 옳았다. 하지만 상처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나 있었다. 말대로 정면에서 찔렀다면 오른손이 아닌 왼손이었어야 정확하게 파고들 수 있는 상황.
모습을 보여 줬던 백아린은 이내 그녀의 뒤편으로 향했다.
"이쪽이었다면 뭐 설명할 것도 없이 이렇게 뒤에서 다가와 찔렀겠죠. 물론 이건 전부 가정이에요. 불편하긴 하지만 그렇게 찌르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독특한 무기가 있을 수도 있고요."
백아린의 설명을 당소련은 넋을 잃고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만약 뒤에서 찔린 거라면 범인은 일면식이 있는 자일 확률이 높아요."
"그건 어째서죠?"
"피가 뿌려진 방향을 보면 알 수 있잖아요."
뒤쪽에서 당했다는 가정이 맞다면 무기에 찔렸을 때 당백은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살수가 입구의 반대편에 있었다는 건데, 이곳을 드나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입구의 문 하나밖에 없었다.
창문 또한 문 옆에 있었기에 비밀리에 뒤편으로 잠입할 공간은 없다고 봐야 했다.
이런 사실을 짧게 설명한 백아린이 말을 이었다.
"이 모든 정황을 보건대 말대로 뒤에서 찌른 거라면 잠시나마 여기에 같이 있었을 확률이 크다는 결론이 나오죠."
"……좋은 정보네요. 엄청난 도움이 됐어요."
진심으로 감탄한 듯 당소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백아린이 주변의 것들을 조금 더 확인하다 이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직접 봐도 뭔가 의심스러운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옆에서 움직이고 있는 천무진을 확인했지만 그 또한 뭔가를 찾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이야기를 나누려는 듯 백아린이 천무진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때였다.
천무진이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서다.
백아린 또한 그의 수신호를 보는 순간 이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의 걸음 소리를 알아차렸다.
죽립을 쓴 두 사람은 서로를 확인하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진이 서둘러 벽에 몸을 기댔고, 백아린은 옆에 있던 당소련의 손목을 잡아채서 반대편 벽에 몸을 숨겼다.
인근에서 들려왔던 발걸음 소리.
그 소리가 이곳의 입구에 멈추어 섰다.
벽에 기대어 선 당소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천무진과 백아린의 손이 천천히 자신들의 무기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