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팔(八) ― 찾았어요 (1)
무림맹에서 돌아온 천무진이 자신의 거처 어딘가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단출했다.
침상 하나와 책상, 그리고 간단한 수납장 정도만이 들어서 있는 그곳엔 한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층 수척해진 얼굴로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는 건 다름 아닌 방건이었다. 이틀이 넘는 시간을 혼절해 있던 그가 두 시진 정도 전에 정신을 차린 것이다.
천무진이 문을 툭툭 치며 자신이 온 걸 알렸다.
멍하니 앉아 있던 방건은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천무진이 가볍게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일어났냐?"
"어? 아, 어어."
대답을 하는 방건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해 보였다. 항상 자신의 아래라 여기며 막 대하던 천무진에게서 믿을 수 없는 실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쏟아 내는 그 검기들이 어떠한 걸 의미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그저 자신의 예상보다 조금 더 강한 수준이 아닌, 정말로 중원을 뒤흔드는 고수에게서나 볼 법한 실력이었다.
그런 사내가 무림맹 홍천관이라는 곳의 일개 말단 무인으로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뭔가 비밀스러운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비밀을 자신이 알아 버렸으니…….
방건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난 어떻게 되는 거냐?"
떨리는 목소리에서 그의 불안을 느꼈는지, 천무진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퉁명스레 말했다.
"죽일 놈을 다시 살려 놨겠냐?"
"아……."
짧은 탄성을 내뱉은 방건을 둔 채로 천무진은 잠시 창 바깥을 응시했다. 느지막이 해가 지고 있는 주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둘 사이에 침묵이 오가던 그때 방건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무진아."
"왜?"
"……고맙다."
막 자신을 구해 줬을 때도 했던 고맙다는 말.
하지만 살아서 다시금 지는 해를 보고 있자니 절로 이런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됐어. 내 뒤통수 쳐 대고 한 걸 생각하면 몇 번을 그냥 죽게 놔둬도 시원치 않지만…… 그랬다간 꿈자리가 뒤숭숭할까 봐 구해 준 거야. 그러니 고마워 할 필요도 없어."
고맙다는 말에 괜스레 더 툴툴거리며 말하는 천무진의 모습을 보며 방건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무림맹 생활을 돕겠다고 그렇게 큰소리쳐 댔는데 오히려 매번 내가 신세를 지네."
"뭐 아예 도움을 안 받은 건 아냐. 몰랐겠지만 은근슬쩍 너한테서 정보도 캐내고 했거든."
"하하! 그래도 뭐라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
웃음을 터트리던 방건은 이내 가슴 부분을 움켜쥐었다.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내상이 너무 깊어 회복을 하려면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잠시 숨을 고르는 방건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이내 그에게 물었다.
"그 밤에 거긴 왜 간 거야?"
"관주가 연락을 했거든. 중요한 임무가 있는데 비밀리에 움직여 줬으면 한다고."
"금호가?"
천무진의 질문에 방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관주 금호의 연락.
방건의 입장에서는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원래 존경하던 상대였고, 이 일을 계기로 자신 또한 보다 나은 무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도 있었다.
당연히 시키는 대로 비밀리에 금호의 거처를 찾아갔고, 먼저 와 있던 오자헌과 함께 어딘가로 안내받았다.
방건이 말했다.
"그리고 지하에 있는 비밀 장소로 끌려가서 방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이상한 냄새가 나더니……."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그가 말을 이었다.
"그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멍해지더라. 그런데 이상하게 정신은 남아 있었어. 그래서 오히려 더 생생히 기억이 나고.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시키는 그걸 곧이곧대로 해야만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설명하기에 너무 어려운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지만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방건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루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감정들.
마치 자신이 반드시 그 일을 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다른 모든 사고들이 잠식되는 그러한 경험을 이미 십수 년 이상 겪어 온 자신이었으니까.
목소리만으로 조종을 당하던 자신과는 조금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때 가졌던 느낌과 방건이 말하는 것에는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그 이후는 천무진이 본 그대로였다.
시키는 대로 비수를 쥐었고, 앞에 있던 오자헌의 심장을 찔렀다. 피가 마구 쏟아져 나와 전신을 뒤덮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수를 쥔 손을 보다 강하게 틀어박았다.
설명을 하던 방건은 이내 그날의 기억이 세세하게 떠올랐는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를 감싸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실 혼절해 있는 이틀 동안 너무도 많은 꿈을 꾼 방건이다. 그 대부분의 꿈에 자신이 죽였던 오자헌이 나왔다.
그의 원망 가득한 눈빛, 그리고 심장을 비수로 거칠게 난도질하던 자신의 모습까지.
그건 광기(狂氣)였다.
새빨간 눈동자로 변한 자신은 오자헌을 몇 번이고 죽여 댔고, 그때마다 그는 다시금 살아서 자신의 앞에 있었다.
그 지독했던 악몽.
그렇지만 진정으로 두려운 건 그 모든 것이 완전한 꿈은 아니라는 거다. 정말로 자신의 이 두 손으로 반항조차 하지 않는 상대의 심장을 찢어 버렸으니까.
쉼 없이 떨고 있는 방건의 모습에 천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진정해."
천무진이 떨리는 그의 손목을 꽉 쥐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준 천무진을 향해 방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입을 열었다.
"어쩌냐, 무진아. 나 너무 무섭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서 감출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 모습에 천무진은 절로 자신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방건의 모습에서 저번 삶의 자신이 투영되었던 탓이다.
후회만 가득했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했던 지독했던 삶.
그리고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그 삶.
"……너만 그런 게 아냐."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나도 그랬다. 나도 너처럼 그랬어. 무서웠고, 괴로웠다. 그러니 누구보다 잘 안다. 지금 당한 이 일을 이겨 내는 게 쉽지 않은 거라는 걸. 하지만…… 그래도 이겨 내라. 잘못을 한 건 네가 아니다. 그놈들이지."
천무진이 방건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 같은 고통을 겪었다는 천무진의 말에 놀란 듯 그를 바라보고 있던 방건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천무진이 그를 내려다본 채로 말을 이었다.
"좀 쉬어. 깨긴 했지만 아직 거동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거야."
말을 마친 그가 방을 나서려 할 때였다.
방건이 황급히 천무진을 불러 세웠다.
"무진아, 하나 부탁이 있는데."
"뭔데?"
"동생을 만나기로 했었거든. 이틀이나 혼절해서 연락을 못 했으니 아마 걱정이 클 거야. 미안한데 녀석한테 난 멀쩡하고 며칠 있다가 찾아가겠다 연락을 좀……."
"이미 해 뒀어."
천무진의 시큰둥한 대답에 방건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그런 그를 향해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일이 있어서 며칠 자리를 비웠다고 해 뒀다. 그러니 네 몸이나 신경 써. 여기 공짜로 먹여 주고 재워 주는 데 아니니까 빨리 나아서 나가라고."
말을 마친 천무진은 다시금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서둘러 방을 나갔다.
멀어져 가는 천무진의 뒷모습을 보며 방건이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고맙다, 무진아."
* * *
천룡성의 성도 거점.
한동안 모두가 감시를 하느라 바빴지만 표적이었던 둘이 동시에 죽게 되자 한결 한산해진 상황이다.
몸은 편해졌지만 기분은 오히려 좋지 못했다.
특히나 단엽은 자신이 감시하던 여청이 죽은 일로 인해 무척이나 화가 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하루 종일 연무장에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무공 훈련에 열중이었다. 마치 언제라도 자신을 물 먹인 상대를 찾으면 물어뜯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그에 비해 백아린은 조용했다.
사천당문과의 만남도 성사시켰고, 적화신루에 따로 보고를 올릴 것들도 전달했다.
어찌 보면 지금 가장 바삐 외부 활동을 이어 가고 있는 그녀는 거처에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녀는 며칠 전 금호의 거처에서 가져온 서책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험에 관련해 적혀 있던 그 서책.
빠르게 서책에 적힌 것들을 파악해 냈던 그녀다.
그런 백아린이 파악하지 못한 채 남겨 둔 의문스러웠던 부분들. 꽤나 많은 숫자들과 연관이 있었는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아내지 못한 상태였다.
팔(八)이라는 글자가 가진 의미.
이걸 알아야 서책에 적힌 숫자들을 완벽히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고 모든 계산들을 이어 나갈 수 있다.
팔자와 얽힌 이 숫자들.
다른 것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건 과연 무엇일까?
계속해서 이 숫자와 관련되었을 법한 많은 것들을 대입도 해 보고, 빼 보기도 했지만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고민이 깊어졌고,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로 서책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그녀가 손가락으로 팔이라는 글자를 어루만졌다.
바로 그때.
머리를 괸 채로 팔(八)이라는 글자를 계속해서 그리던 백아린이 갑자기 손가락을 멈췄다.
그녀가 놀란 듯 눈을 치켜뜬 채로 서책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이내 서둘러 서책의 가장 앞쪽으로 돌아가더니 그곳부터 적힌 모든 것들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서책이 빠르게 넘어갔고, 그녀의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그 안에 적힌 내용들을 다급히 훑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서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직후였다.
백아린이 소리쳤다.
"부총관!"
자신을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백아린의 목소리에 의자에 기댄 채로 자고 있던 한천이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가 황급히 소매로 입에 묻은 침을 닦아 내며 소리쳤다.
"저 안 잤습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둘러대는 한천을 보며 백아린은 기가 막혔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서둘러 말했다.
"알아봐야 할 게 있어."
급해 보이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천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가 확신 어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장, 뭘 찾으셨군요."
한천의 질문에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찾은 것 같아."
방건과의 만남 이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천무진의 거처로 백아린이 다급히 모습을 드러냈다.
무슨 일이냐고 채 묻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찾았어요!"
"뭘 찾았다는 거야?"
"서책에 적혀 있던 그 팔(八)자의 정체요. 그거 팔자가 아니었어요."
"팔이 아니었다고?"
천무진이 있는 쪽으로 다가온 백아린이 가지고 온 서책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 글자 팔이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인(人)이었어요."
"확실해?"
"네, 부총관을 통해 평소 금호가 쓰던 글자를 확인해 봤는데 인 글자를 팔자처럼 쓰는 버릇이 있었어요. 특이한 필체 때문에 완전히 속고 있었어요."
"뭐야. 그럼 그때 팔이라고 생각했던 그 글자 뒤에 적힌 그 많은 숫자들이 모두 실험에 사용된 자들이라는 건가?"
"네, 그런 셈이 되죠."
"그렇다고 보기엔 그 숫자가 너무 많지 않아? 이토록 많은 무인이 사라졌다면 소문이 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십 년이 넘을 정도로 꽤나 긴 시간 동안 적힌 장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수천에 달하는 숫자를 실험에 사용했다는 건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만한 숫자의 무인이 사라졌다면 모를 리가 없으니까.
그런 천무진의 질문에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 숫자는 아마도 무인이 아닐 거예요."
"그럼?"
"이렇게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사라졌는데 소문이 나지 않았어요. 세상에 그럴 이들이 과연 누굴까요?"
표정을 찌푸리고 있던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고아?"
그의 대답에 백아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고아죠. 이 장부에 적힌 그 많은 숫자들 모두가 고아를 뜻하는 거였어요. 문제는 저희가 가 봤던 그 비밀 공간은 내부가 제법 크긴 했지만 이토록 많은 어린애들을 가둬 두기엔 용이하지 않았어요. 소란이 생길 수도 있고요. 아마도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겠죠."
실험이 벌어진 곳이 비단 금호의 비밀 장소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원 어딘가에서 고아들을 이용한 그 끔찍한 실험이 자행되었다는 것인데…….
백아린이 서책에 적힌 숫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부분은 정확히 따지자면 아이들을 거래한 장부인 셈이죠. 그리고 지금 그 아이들이 살아 있을지 죽었는지는 장담할 수 없고요."
말을 듣는 천무진뿐 아니라, 이야기를 이어 가는 백아린도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지금 자신들의 판단이 맞다면 죄 없는 많은 어린아이들이 죽었고, 또 지금도 그런 일을 당하고 있을 거라는 소리다.
백아린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상대하려는 자들이 누구인지 내심 궁금했는데 최소한 이건 알겠네요."
백아린이 이를 꽉 깨문 채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세상에 있어선 안 될 놈들이라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