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사천당문 ― 나이는 중요치 않아요 (1)
독에 대한 의뢰를 위해 백아린은 곧바로 총군사인 위지겸에게 연락을 넣었고, 그를 통해 사천당문에 급히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연락을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들로부터 승낙을 받아 냈다.
사천당문이 이토록 빠르게 백아린이 내민 손을 잡은 건, 그녀가 적화신루의 총관이었기 때문이다.
사천당문과 적화신루.
사실 오대세가의 하나인 사천당문이 적화신루에 비해 훨씬 큰 힘을 지닌 게 현실이다.
허나 오히려 상대방과 가까워지려 애썼던 건 사천당문이었다.
그들이 그런 행동을 취한 건 다름 아닌 개방 때문이었다.
정파의 모든 정보는 개방에서 나온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사천당문 또한 많은 부분 개방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개방과 사천당문은 몇 년 전, 모종의 이유로 사이가 틀어졌고, 그 이후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서로 정보를 주고받지 않았다.
당연히 정파인 사천당문 입장에서는 하오문이나 귀문곡에 의뢰를 할 수 없으니, 자연스레 적화신루 쪽과 연을 이으려 애썼다.
적화신루 또한 피할 이유가 없으니 적절한 선에서만 사천당문을 도우며 여태까지 적당한 관계를 이어 오던 차.
적화신루의 총관이 직접 부탁이 있다며 찾아오려 하니 사천당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어 환영해야 할 입장이었다.
이 기회를 빌려 적화신루와 보다 긴밀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개방에게서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한시라도 바삐 만나기 위해 밤에 약속을 잡은 상황에서 백아린은 무림맹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언제나와 다름없었어야 할 하루.
그런 하루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눈앞에 나타난 사공량이라는 사내 때문에.
"소저 오랜만입니다."
며칠 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가 웃는 얼굴로 포권을 취해 보였다. 분명 며칠 전에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며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던 상대, 한동안 안 보이나 싶더니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론 약 반 시진 정도 전부터 따라붙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리 다가와 직접 인사를 건넬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거기다 이번에 모습을 나타낸 사공량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그와 가장 친하게 지내는 유상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 또한 사공량의 뒤를 이어 포권을 했고, 백아린은 둘에게서 몇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애써 귀찮은 감정을 감추며 말을 이었다.
"분명 제가 그때 거절의 의사를 전달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기억나지 않으시면 다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때문에 찾아뵌 게 아닙니다."
사공량이 말을 잘랐다.
이미 거절당했다는 사실을 유상기에게 언급해 두긴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그 일에 대한 이야기가 제대로 나오는 건 원치 않았다.
우습게 보이는 건 질색이었으니까.
백아린이 물었다.
"그럼요?"
"사실은……."
말을 하려던 사공량이 고개를 돌려 유상기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둘의 행동에 백아린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되물으려 할 때였다.
사공량이 말을 이었다.
"소개시켜 드릴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절요?"
"예, 그렇습니다."
웃는 얼굴로 말을 하는 사공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요?"
"……예?"
"아니 소협이 왜 절 다른 사람한테 소개를 시키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저희가 그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소개시켜 주려는 게 누구냐고 물을 줄 알았던 사공량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일순 날카로운 그녀의 말에 말문이 막혔지만, 그는 재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하하! 그도 맞는 말씀이십니다만 소저에게도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일이 생겨서요. 사실 잠룡대에 자리가 났는데 어쩌면……."
무림맹에 몸담고 있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잠룡대다.
후기지수들의 집합소인 잠룡대, 훗날 무림맹을 이끌 재목들이 모이는 곳이니 그곳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맥을 지니게 된다.
그걸 괜히 끄집어내며 백아린의 차가운 행동을 되돌리려 했지만, 아쉽게도 상대가 좋지 못했다.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바빠서 그럼 이만."
말을 마친 백아린은 더는 이야기를 끌고 나가지 못하게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사공량은 놀란 듯 옆으로 따라붙으며 이야기를 끌어가려 했지만 그녀는 곧바로 근처에 있던 자신의 근무처로 모습을 감췄다.
뒤늦게 뒤편에서 손을 내뻗어 허공을 움켜잡은 사공량이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나지막이 짜증 섞인 소리를 토해 냈다.
"에이씨."
백아린에게 거절을 당하고 며칠을 준비해서 점수를 딸 만한 자리를 준비했다. 그런데 이처럼 매몰차게 거절을 당하니 자신이 준비한 뭔가를 보여 줄 기회조차 없었다.
거절을 당한 것도 문제였지만 사공량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하는 건 오늘 자신을 위해 움직여 준 다른 누군가 때문이었다.
결국 그렇게 힘든 발걸음으로 사공량이 도착한 곳은 조그마한 다관이었다.
그녀가 차를 좋아한다고 생각한 그가 일부러 이 조그만 곳을 통째로 빌려 오늘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입구에 선 사공량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공량이 들어선 다관 내부에는 이미 두 명의 사내가 먼저 자리하고 있었다. 한 명은 방금 전 헤어졌던 유상기였고 나머지 한 명은…… 사천당문의 사내 당자윤이었다.
일전에 천무진, 방건과 문제가 있었던 바로 그였다.
싸늘한 눈동자로 당자윤이 입을 열었다.
"뭐야? 왜 혼자야?"
"아, 그게……."
사공량이 말을 채 잇지 못할 때였다. 질문에 답하지 않자 짜증이 났는지 당자윤의 눈초리가 슬쩍 올라갔고, 그걸 옆에서 눈치챈 유상기가 서둘러 말했다.
"백 소저는 어쩌고?"
"오늘은 정말 바쁜 일이 있다더라고."
유상기가 나서는 걸 보며 사공량 또한 서둘러 정신을 추슬렀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서도 백아린에게 거절 당한 것이 못내 부끄러웠는지 슬쩍 말을 바꿔 전달했다.
같은 잠룡대 소속이기는 했지만 당자윤은 다른 둘과는 엄연히 다른 위치에 있었다. 오대세가의 핏줄에, 능력 또한 월등하다.
사실 사공량은 당자윤과 거의 친분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유상기가 조금 연이 닿아 있어 이 같은 만남에 함께해 달라 부탁했고, 이렇게 당자윤이 직접 나서 준 것이다.
사공량의 대답을 들은 당자윤이 표정을 구기며 되물었다.
"갔다고? 그럼 난 지금 헛걸음한 셈이네?"
"미안하다 자윤아. 바쁜데 괜히 고생만 하게 해서."
옆에 있던 유상기가 서둘러 그에게 사과했다.
앞에 있는 찻잔을 움켜쥐었던 당자윤은 유상기의 행동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 뛰어난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상기의 가문은 사천당문과 긴 인연이 있는 사이.
혹시 모를 뒷소리가 나오는 건 원치 않았기에 당자윤은 애써 화를 누그러트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말했다.
"야, 사공량."
자신을 부르는 당자윤의 목소리에 사공량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을 때다. 당자윤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지만 앞으로 이런 일 없도록 해라."
그 말을 끝으로 당자윤은 자리를 박차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 이곳에 발걸음을 한 건 유상기의 부탁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 큰 이유는 당자윤 또한 백아린이 궁금했었기 때문이다.
그가 무림맹을 비웠을 때 들어온 그녀에 대한 소문은 이미 곳곳에 퍼져 있었다. 이번을 기회 삼아 얼굴이나 한번 보려 했거늘 멍청한 놈이 다관으로 데리고 오는 것 하나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하여튼 모자란 새끼. 여자 하나 어떻게 못해 가지고 전전긍긍해 대긴.’
짜증 가득한 발걸음으로 당자윤이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이내 가만히 서 있던 사공량이 유상기가 앉은 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그가 당자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뭣도 아닌 놈이 가문의 위세 하나로 뭐 저리 어깨에 힘을 처주고 다녀."
"인마!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되긴 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유상기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사공량은 짜증이 가라앉질 않았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을 지경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상기도 봤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 새끼도 날 우습게 보겠지?’
자신을 위해 약속을 만들어 주고, 또 대신해서 사과를 했던 그 모든 것이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이로 인해 그도 자신을 우습게 여길 게 분명하다는 확신에 오히려 화를 내고 있는 그였다.
사실 당자윤을 이곳에 부른 건 그에게 백아린이 잠룡대에 들어올 수 있도록 힘 좀 써 달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당자윤에게 잠룡대에 누군가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간섭할 만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추천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추천을 한 이후에 정말 잠룡대에 들어올 수 있는지는 그에게 상관없는 일이었고, 사공량 또한 그것까지 바라진 않았다.
중요한 건 그녀에게 자신이 어떤 사내인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혹여나 추천이 먹힌다면 당연히 그 모든 것을 자신의 공로인 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룡대라는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든 점수를 따 보려 했거늘……
"어떻게 할까? 좀 힘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자윤이랑 다시 한 번 자리를 만들어 볼까?"
"……됐어."
자리에서 일어난 사공량이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이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두 번이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도 그걸 밀어냈으니…… 이젠 채찍을 쥐어야 할 차례다.
* * *
죽립을 눌러쓴 백아린은 밤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지금 그녀가 향하는 곳은 사천당문이 있는 쪽이었다.
사천당문으로부터 대략 일각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객잔.
장사를 하지 않는지 불은 꺼져 있었고, 시간이 늦어서인지 주변은 조용했다.
죽립을 쓴 그녀가 슬쩍 객잔의 이름을 확인했다.
태명객잔.
이름을 확인한 백아린이 슬쩍 닫혀 있는 문에 손을 가져다 댈 때였다.
파바박!
누군가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이내 그자의 손에 들린 비수가 빠르게 백아린의 심장 앞에 이르러 멈춰 섰다. 짧은 수염을 가진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사내였다.
지척까지 다가와 있는 비수.
하지만 중년 사내는 알고 있었다.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멈출 걸 알았다는 건가?’
애초에 막으려 들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공격을 받아 낼 수 있는 상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죽립을 눌러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그녀에게 물었다.
"누구시오?"
"여기서 약속이 있는데요."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중년 사내는 다시금 놀랐다.
오늘 이곳 태명객잔은 사천당문에서 빌려 놓은 상황이었다. 그들이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건 적화신루의 총관 중 한 명. 그것도 제법 유능하다고 알려진 사총관이라 들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여인인 걸로도 모자라, 이처럼 젊은 목소리라니…….
사내가 물었다.
"패는 있소?"
백아린은 사전에 위지겸에게 받아 두었던 패를 꺼내어 들었다. 손가락에 들린 패를 받아 든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소."
말과 함께 그가 옆으로 비켜섰고, 백아린은 곧장 닫혀 있는 태명객잔의 문을 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은 밖에서 보았을 때처럼 온통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중앙 부분에 있는 탁자 한 곳을 제외하고는.
촛불 하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그곳에는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 한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허나 그 여인은 실제론 겉보기보다 대략 열 살가량은 많았다.
그녀가 걸어 들어오는 백아린을 향해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드디어 오셨네요."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적화신루의 사총관입니다."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 이미 눈치채긴 했는데…… 젊은 분이시군요."
백아린이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맞은편에 턱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뒤에 차고 있던 대검을 탁자 한편에 기대듯 세워 놨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백아린의 대검을 보며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쉽사리 보기 힘든 물건이었으니까.
백아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이는 중요치 않죠. 중요한 건 능력이니까."
"……그러게요.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분이신 것 같네요."
여인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