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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32화 (32/293)

32화. 의문사 ― 바로 움직이죠 (1)

천무진은 우선 방건을 데리고 이동했다.

그냥 그의 거처에 데려다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몸 상태를 비롯해 여러 상황이 애매했다. 가장 문제는 방건이 봐서는 안 될 것을 목격했다는 점이다.

천무진의 본래 실력, 그리고 금호의 거처에서 벌어진 그 사건까지.

혼절한 그를 업은 채로 천무진은 자신의 장원으로 움직였다. 그냥 놔둘 몸 상태도 아니었고, 방건이 본 일들에 대한 것들도 매듭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천무진은 거점에 돌아오기 무섭게 남윤을 찾았다.

그의 방문 앞에 선 채로 천무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영감!"

"작은 주인님 어쩐 일로……."

가벼운 옷차림으로 문을 열고 나오던 남윤은 놀란 눈으로 천무진과 그의 등에 업혀 있는 방건을 번갈아 살폈다.

그가 물었다.

"그분은 누구십니까?"

"일이 좀 있어서. 다쳤는데 치료 좀 부탁할게."

천룡성의 모든 집안일을 도맡고 있는 남윤은 다재다능한 노인이었다. 음식 실력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지식들이 많았고, 의술에도 제법 식견이 있었다.

천무진이 파악하기로 남윤은 어중간한 의원들보다 훨씬 나은 실력이었다.

남윤은 곧바로 인근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고, 천무진은 그곳에 있는 빈 침상에 방건을 눕혔다.

슬쩍 몸 상태를 확인한 남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 안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이 정도라면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아, 혹시 깨더라도 바깥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곳으로 데리고 오긴 했지만, 이 장원은 아무나 드나들게 할 장소가 아니었다.

물론 여기가 천룡성의 본거지는 아니었기에 언제든 버리고 이동할 수 있긴 했지만,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외부에 노출되지 않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다행히 혼절한 탓에 오는 길을 보지 못했기에, 안에서도 돌아다니지 못하게 해서 이곳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려는 생각인 것이다.

천무진의 말에 남윤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그리하지요."

"그럼 부탁할게, 영감. 난 잠시 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작은 주인님. 이곳은 제게 맡기시죠."

푸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하는 남윤의 모습에 천무진은 알겠다는 듯 끄덕거리고는 곧바로 방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바깥에는 백아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등장에 그녀 또한 천무진이 돌아온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백아린은 다급해 보이는 천무진의 모습에 의아한 듯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거기다 당신 몸에서 피 냄새가 나는데…… 설마 금호와 붙은 거예요?"

"맞아."

"그자는 죽었고요?"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야기를 하려면 할 말은 많았지만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지금 장원에 한천하고 단엽 중에 누가 남아 있지?"

"부총관이 방금 전 돌아왔다고 떠들어 대긴 했는데 갑자기 그건 왜요?"

"지금 당장 움직여야 돼. 서둘러서 뒤져야 할 곳이 생겼거든."

천무진의 얼굴을 바라보던 백아린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뭔가를 찾아냈음을.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움직이죠."

* * *

백아린과 한천을 대동한 채 천무진은 곧바로 금호의 거처로 돌아갔다. 그의 비밀 통로로 들어가, 내부를 조사했고 그곳에 있는 물건들을 확인했다.

지하에 있는 공간은 무척이나 넓었지만, 그에 비해 건질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의자나 탁자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이었고, 그걸 제외한다면 챙길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수십여 권의 정체 모를 서책들.

그리고 재료로 쓰였을 정체불명인 돌의 일부와 연기를 피울 때 쓰인 향로 정도가 있었다. 거기에 뭔가를 만들 때 쓰였을 것 같은 간단한 도구들까지.

그 모든 걸 모조리 챙겼거늘 서책들을 제외하고는 봇짐 하나면 충분할 정도로 그 양이 적었다.

짐을 챙긴 천무진이 곧바로 한 건 금호의 시신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지금 당장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보다는 실종으로 처리되어 한동안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두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건물까지 부숴 댄 탓에 싸움의 흔적까지 지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시체를 발견하고 못 하고는 꽤나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충 상황을 매듭지은 그들은 바깥에 대기시켜 놨던 마차에 서책을 비롯한 모든 짐들을 싣고 거처로 돌아갔다.

백아린과 한천은 금호의 거처로 가는 와중에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모두 전해 들은 탓에 이미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거점에 도착한 그들은 빈방에 그 모든 물건들을 넣고는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서책은 꽤나 많았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가장 먼저 그것들을 살폈던 백아린이 서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얼추 파악한 듯 말했다.

"날짜나 그 이상한 뭔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한 횟수 같은 것이 간단하게 적혀 있는 것 같아요. 종종 사람을 가지고 실험한 경우와 그 횟수도 뒤섞여 있긴 한데……."

천무진은 백아린이 내민 서책을 눈으로 가볍게 훑어봤다.

그녀의 말을 듣긴 했지만 천무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보고 어떻게 그런 답이 나오지?"

"간단하게 보여 줄게요."

숫자들이 제법 복잡하게 적혀 있는 것을 백아린은 보기 편하게 손가락으로 부분 부분을 가리며 보여 줬다.

그러자 복잡한 숫자들 속에 숨어 있는 규칙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제작을 위해 시도한 횟수로 보여요. 사람에게 실험한 횟수라고 보기엔 너무 많고, 초반이나 중반 부분에는 계속 숫자가 왔다 갔다 하는 반면 후반 부분으로 갈수록 점점 안정화되잖아요? 그만큼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소리겠죠. 그리고 오히려 후반으로 갈수록 사람에게 시도한 횟수가 늘어나죠. 그게 이런 식으로 표시 된 부분이에요."

설명을 들으며 천무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갑자기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설명을 이어 가던 백아린이 슬쩍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가 물었다.

"왜요? 뭐 더 설명해 드려요?"

"아니. 설명이 좋아서 그런지 단번에 이해했어."

"그런데 왜 그렇게……."

"그쪽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천무진의 솔직한 말에 백아린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한쪽에서 향로들을 살피던 한천이 둘을 바라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그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두 사람을 향해 농담을 던졌다.

"어휴, 이제 알아보셨네. 지성미 하면 또 우리 대장 아닙니까. 아주 그냥 대장 좋다는 사내들이 줄을……."

짓궂은 농담을 던지려는 걸 눈치챘는지 백아린이 빠르게 그를 노려봤고, 한천은 서둘러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백아린이 다시금 천무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서책을 몇 장 넘겼다.

그녀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숫자들이에요."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종종 정체 모를 암호처럼 적혀 있는 것이 있었는데, 백아린조차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가 없었다.

백아린이 가리키는 곳을 보며 천무진이 되물었다.

"제작을 위해 시도한 횟수 아니야?"

"아뇨, 그렇게 보기엔 조금 다른 특징을 지녔어요. 다들 팔(八)이라는 숫자와 연결이 되어 있고요. 그리고 종종 지역 이름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게 연관이 있을 것도 같고요."

백아린은 의문이 풀리지 않는 숫자들이 있는 서책만을 따로 모아 한곳에 두면서 말을 이었다.

"이거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봐야겠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천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저도 좀 살핀 게 있어서 보고드리죠."

그가 자신이 확인하던 향로를 둘이 앉아 있던 탁자 위에 올렸다. 향로들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방금 전 방건과 오자헌에게 사용되었던 향로에는 소량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향로 안에 남아 있는 가루를 손가락 끝에 살짝 묻힌 한천이 그것을 함께 가지고 온 종이 위에 슬쩍 털어 떨어트렸다.

"사실 이 가루가 사용된 이후의 상태인지, 아니면 멀쩡한 상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게 의심스러운 가루인 건 확실하니 혹시나 해서 돌을 갈아 봤죠."

이 가루의 주재료가 되는 물건이 뭔지는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토록 비밀스럽게 감춰 놨던 돌덩이.

그렇지만…….

오늘 챙겨 온 돌을 간 가루를 한천이 꺼내어 종이 위에 내려놓았다. 먼저 뿌려진 것 옆에 놓인 돌을 간 가루.

하지만 하얀 종이 위에 놓인 두 가루의 색은 너무도 쉽게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달랐다.

향로 안에 있었던 가루는 붉은빛이 조금 도는 데 반해, 돌멩이에서 나온 건 회색과 흰색 중간 정도의 색이었다.

한천이 두 개를 비교하게끔 둔 그 상태에서 말을 이었다.

"이 돌이 재료가 되는 것이 확실한 상황이니, 아무래도 그냥 이렇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뭔가 또 가공을 하는 걸로 보입니다."

"……쉬운 게 하나 없네."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 또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천무진이 물었다.

"다른 향로에서는 뭐 발견된 게 없었고?"

"아주 깨끗하더군요. 성격이 꽤나 꼼꼼한지 사용한 이후 흔적을 아예 없앤 것 같습니다."

"그건 저도 부총관 의견에 동감해요. 서책을 정리한 것만 봐도 성격이 어느 정도 보이거든요."

백아린도 그런 느낌을 받았었는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녀가 종이 위에 올려져 있는 가루를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체 금호는 무림맹 내부의 무인까지 실험 대상으로 쓰면서 무슨 짓을 하려던 걸까요? 연기로 사람의 의식을 조종해서 상대를 죽이게 하다니……."

"하지만 이걸로 과연 그리 큰 위협이 될까요? 이런 종류의 사특한 독은 찾기가 어려울 뿐이지 아예 없는 건 아니잖습니까."

섭혼술과 같은 효과를 내는 이런 종류의 독은 예전부터 있어 왔다. 다만 그것이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내공만 어느 정도 되면 충분히 저항할 수 있으니까.

분명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사실 한천 또한 왠지 모를 찝찝함을 감추긴 어려웠다.

백아린의 말대로 굳이 이런 일에 위험을 무릅썼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갔지만 무림맹의 관주 정도 되는 자가 개입되었다는 사실도 이상했고, 실험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아예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는 부분도 걸린다.

대부분의 섭혼술이나 이런 종류의 독은 큰 충격을 받게 되면 일정 부분 정신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독에 중독된 것도 아니고, 막 당한 상황이라 듣지 않았던가.

보통의 상식과는 다소 다른 이 모든 일들.

과연 이것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백아린이 천무진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우선은 계속 부관주를 감시하고, 거기에 이번에 얻은 것들로 조금 더 조사를 하는 쪽으로 가자고. 무림맹 내부에 아직 우린 알지 못하지만 금호와 연관된 놈이 분명 있을 거야. 결코 저 작자 하나만이 개입되었을 리는 없으니까. 금호는 꼬리에 불과할 거야. 그렇다면 그걸 잡고 올라가 머리를 찾아야지."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기 전 최대한 깊숙한 곳까지 다가가 있어야 한다.

천무진의 말에 그녀가 알겠다는 듯 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죠."

"다들 고생했으니까 좀 쉬고 내일 다시……."

막 천무진이 말을 이어 나가는 때였다.

갑자기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입구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입구의 문이 벌컥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부관주 여청을 감시하고 있어야 할 단엽이었다.

명령을 어기고 나타난 그를 확인한 천무진이 표정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그의 질문에 단엽이 이를 부득 갈며 입을 열었다.

"……죽었어."

"갑자기 죽긴 누가 죽어."

"죽었다고 그놈이!"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단엽의 모습에 방 안에 있던 세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지금 그가 이렇게 말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부관주 여청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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