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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8화 (28/293)

28화. 이간질 ― 충분해요 (2)

여청이 찾아오기 반 시진 정도 전.

관주인 금호의 거처에 먼저 모습을 드러낸 건 천무진이었다. 그가 금호를 찾아간 이유는 하나, 창고에서 밤에 몰래 물건들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백아린이 짠, 정확하게 시간을 계산해 벌어진 일련의 계획들이었다.

그 때문에 소식을 전해 듣고 움직이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고, 결국 금호는 눈 뜨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빼앗긴 꼴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중 아주 일부나마 물건을 되찾았다는 거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천무진이었다.

그는 짐을 옮기던 도중에 떨어진 물건이라며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금호를 찾아왔는데, 그 안에는 쇳덩이와 어른의 손바닥만 한 돌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미리 빼놓은 이것들을 천무진은 마치 운 좋게 그들이 흘린 걸 주워 왔다는 식으로 상황을 꾸몄다.

돌을 무림맹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기 위해 쇳덩이를 위장용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천무진은 오히려 모르는 척 연기를 했다.

천무진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대체 왜 부관주께서 쇠를 훔쳐 나간 걸까요?"

"……예전부터 물건의 일부가 비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도 부관주가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몰래 물건들을 빼돌렸던 모양이네."

쇳덩이와 돌을 가지고 나가는 상황이면 쇳덩이를 욕심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했다. 그런 천무진의 모습은 너무도 당연했기에 금호는 별다른 의구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물었다.

"혹 물건을 실은 마차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는가?"

"예, 제 실력에 뒤를 쫓다가 들통이 날 수도 있어서 창고에 숨어 이동하는 모습만 몰래 훔쳐 본 것이 다입니다."

"그렇군. 좋은 판단이었네. 혹 쫓았다가 자네가 다쳤다면…… 관주로서 어찌 그 미안함을 갚을 수 있겠는가."

말은 그리 내뱉고 있었지만 금호의 말투에는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좋은 사람인 척 연기를 하는 것에 무척이나 익숙했지만, 지금만큼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청에 대한 화가 치솟았다.

‘감히 아무것도 모르는 네깟 놈이 날 건드려?’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하는 게 어려워 부관주인 그와 함께 거사를 도모했지만, 사실 둘의 입장은 완전히 달랐다.

동료가 아닌 그저 이용하는 관계.

사실 여청은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벌이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저 떨어지는 떡고물에 눈이 멀어 스스로가 하는 일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잔챙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평소 그렇게 하찮게 여기던 여청의 갑작스러운 반발은 금호로 하여금 분노와 함께 가소로움이 치밀게 만들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기에 금호가 말했다.

"당연히 알겠지만 우선 이 일에 대해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게. 꼬리를 감추면 일이 번거로워질 수도 있으니 말이야. 내 말 이해하겠는가?"

"물론입니다."

"고생했네. 그만 가 보게."

"예, 관주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천무진은 순순히 물러섰다.

물러나는 그를 금호는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고 보냈다.

금호가 천무진을 죽일 생각을 일절 하지 않은 건 그가 알게 된 것들이 자신에게 전혀 위험하지 않다 여겨서다.

쇠를 훔쳤다고만 여기는 천무진을 죽여서 가뜩이나 소란스러워질지도 모를 홍천관에 괜한 불씨를 만들 필요가 없다 판단한 것이다.

거기다 혹시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생각하면 증인으로 사용할 가치가 있다 여겼다.

오히려 지금 당장 죽여야 하나 고민되는 건 천무진이 아닌 여청이었다.

‘확 죽여 버리고 싶은데…….’

죽여 버려야 이 치솟는 화도 조금 누그러지고, 또 위험한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긴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지금 당장 그를 죽인다면 결국 강소성에 가야 하는 건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그랬기에 금호는 억지로 화를 가라앉혔다.

우선은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 여청의 일보다 서둘러 매듭지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여청의 제거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다.

천무진이 가지고 온 상자의 안을 힐끔 바라보던 금호가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스윽.

그가 돌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돌을 바라보는 금호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후후, 이놈마저 없었다면 정말 꼼짝없이 당할 뻔했군."

이 돌조차 없었다면 지금 금호는 여청에게 쩔쩔 맬 수밖에 없었다.

허나 그의 부탁대로 다른 이를 강소성에 보내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총군사가 직접 명령한 일, 그걸 뒤집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최대한 여청의 비위를 맞추는 선에서 어떻게든 일을 풀어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 생각 또한 접었다.

기분은 더러웠지만 한 번이라면 굽혀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이 그렇다.

한 번 약점을 쥐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면 그 이후부터는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꺼내려 들 것이 자명한 사실.

분명 여청은 이 돌을 이용해 자신의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서려 할 게다.

비밀스럽게 진행해야 할 일에 그런 위험 부담이 있는 자와 함께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사용 가치가 떨어진 그를 쳐 내는 것이 옳은 상황이 된 것이다.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낸 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으니까.

돌을 집어넣은 금호가 상자의 뚜껑을 덮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찮은 개라면 먹이를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지."

* * *

금호의 거처에서 나온 천무진은 그 시간부로 계속해서 그를 감시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지만 금호는 자신에게 사람을 붙이지 않았고,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뒤를 캐는 것이 가능했다.

천무진이 금호에게 붙은 상황에서, 단엽과 한천이 여청을 교대로 살폈다. 그리고 백아린은 천무진을 돕거나, 아니면 정보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상대의 움직임을 기다리기 시작한 지 어언 삼 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아직까지 금호의 움직임에서 크게 미심쩍은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 무림맹에 들어가고, 거처로 돌아온 이후로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 듯했다.

혹시나 비밀 통로가 있는 건 아닐지 비밀리에 염탐한 적도 있지만 그는 여전히 집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종종 홍천관의 무인들이 온 적은 있었으나, 그들 모두 멀쩡하게 나오는 것까지 확인했다.

관주인 그의 거처에 업무적인 이유로 찾아오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오늘도 마차가지였다.

늦은 밤, 익숙한 얼굴을 한 자가 근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청이 등을 돌린 그날 이후 매일 밤 이곳을 찾아오고 있어 나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오자헌(吳刺憲)이라는 자였다.

백아린을 통해 뒤를 살짝 캐 보긴 했지만 수상한 부분을 찾기 어려웠던 자, 그랬기에 천무진은 여청을 쫓아내고 오자헌을 부관주에 앉히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는 중이었다.

홍천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인물이기도 하고, 평소 금호와 제법 가까이 지내는 자였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여겼다.

오자헌이 서류 더미를 든 채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지켜본 천무진은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후우.’

시간은 흐르고 있고, 슬슬 뭔가 걸릴 때가 되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아직 관주나 부관주 양쪽 모두가 잠잠하다.

나무에 기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천무진의 고개가 갑자기 움직였다. 금호의 거처로 향하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껴서다.

사내 한 명이 그의 거처 입구로 다가서고 있었다.

딱히 의심스러운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고,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는 건 더더욱 아니었지만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천무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방건?’

모습을 드러낸 것이 다름 아닌 홍천관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는 방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 여동생 사건 이후로 천무진에게 더욱 친근하게 굴어 대고 있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방건과는 제법 어울린 탓에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천무진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이곳 관주의 거처에 온단 말인가?

가득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적어도 이곳 관주의 거처가 익숙한 건 분명 아닌 듯싶었다.

‘뭐지? 왜 방건이 여기에 나타난 거지?’

자신이 아는 방건은 홍천관 내에서 그리 큰 비중이 있는 자가 아니었다.

나름 오래 있긴 했지만 가진 능력이 뛰어난 것도, 그렇다고 인맥이 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 늦은 밤 관주의 거처에 찾아올 이유라는 게 대체 뭘까?

한참을 입구에서 서성이던 방건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고, 이내 누군가가 나와 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장원 바깥에 숨어 그 일련의 과정을 모두 보고만 있던 천무진은 고민에 빠졌다.

이상했다.

분명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하지만 매번 금호를 찾아온 홍천관의 무인들이 멀쩡하게 나가는 걸 봐 온 천무진이다. 그랬기에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의심이 과연 맞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에 별일 아니었는데 섣부르게 행동했다가 일을 그르치게 되면 되돌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오라버니는 훌륭한 무인이시죠?

물어 오던 방건의 여동생 방소청의 얼굴과, 그 대답에 맞다고 대답했던 자신을 향해 고맙다며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

앞으로 자기가 다 돕겠다며 자신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뻥뻥 쳐 대던 방건의 모습이 기억나는 순간 천무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왠지 모를 불안감,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천무진의 몸이 나무 아래로 고양이처럼 떨어져 내렸다. 꽤나 높은 나무였지만 자그마한 소리 하나 나지 않게 가볍게 착지한 그가 투덜거렸다.

‘방건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자칫 자신의 계획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무진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몸이 빠르게 담장을 넘어, 방건이 갔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스스슥.

바람처럼 파고든 천무진의 몸이 곧장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번에 정식으로 찾아온 덕분에 내부의 지리는 어느 정도 머리에 담아 둔 상태였다.

예상대로 방건이 간 방향은 관주 금호의 집무실 쪽이었다.

순식간에 집무실의 근처에 도착한 천무진은 창을 통해 안의 모습을 살피려 했다. 허나 갑자기 입구의 문이 열리며 목소리가 들려와 서둘러 몸을 낮추고 기척을 감췄다.

집무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관주인 금호와 방금 찾아온 두 사람, 오자헌과 방건이었다.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채로 걸음을 옮기는 셋을 본 천무진은 쓴 입맛만 다셨다.

괜한 오해를 했다는 생각에서였다.

‘기우였나?’

물론 방건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지금 분위기로 보건대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았다.

풀리지 않는 의심이 남아 있었기에 어디로 가는지만 확인하기로 마음먹은 천무진이 슬쩍 셋의 뒤를 쫓았다.

다행히도 그들은 집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그곳은 그리 크지 않은 창고였다.

도착한 장소를 확인하니 다시금 미심쩍은 느낌이 밀려들었다. 이 늦은 밤 세 사람이 모여 이곳 창고로 갈 이유가 딱히 떠오르지 않아서다.

뭘까?

대체 왜 방건을 데리고 이곳에 온 것일까?

천무진의 고민이 길어지는 그때 쇠로 된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르르릉.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 문을 통해 세 사람이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그 철문은 다시금 닫히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열림,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천무진의 코로 미약하긴 했지만 익숙한 냄새가 조심스레 스며들었다.

움찔.

몸을 낮춘 채로 숨어 있던 천무진의 손끝이 꿈틀했다.

분명했다.

이건…….

‘피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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