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소개 - 누굽니까 (1)
한천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과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세월의 무거움이 느껴졌다.
적화신루의 일개 부총관 중 하나일 뿐인 한천.
분명 적화신루의 부총관이라는 직책 또한 그리 우습게 여길 건 아니었다. 허나 그것이 대장군이라는 지위 앞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대장군은 황궁의 수십만이 넘는 병력을 움직이는 최고의 무장만이 지닐 수 있는 직책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겨우 적화신루의 부총관으로 이름도 없이 살아오던 무명소졸이 대장군이라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절로 코웃음이 나올 말이었다.
그 순간 한천의 입이 열렸다.
"……언제부터 아셨습니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랍게도 부정이 아니었다. 지금 이 같은 대답은 무림맹주인 추자후가 내뱉은 조휘라는 이름과, 대장군이라는 직위가 사실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것과 같았다.
한천을 향해 추자후가 말했다.
"아니라고 잡아떼면 어떻게 말을 이어야 하나 고민했거늘 이리 쉽게 대답을 들을 줄은 몰랐군그래."
"상대가 상대니까요."
눈앞에 있는 평범해 보이는 노인.
허나 이 사내가 누군지 알기에 한천은 굳이 잡아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정파 무림을 이끄는 무림맹주, 그런 그가 아무런 확신 없이 이 같은 이야기를 입에 올렸을 리가 없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한천을 바라보던 추자후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알았냐고 했던가?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어딘가 낯이 익다 생각은 했네. 내가 사람 얼굴은 무척이나 잘 기억하는 편이거든. 그런데도 이상하게 기억이 나질 않더군."
잠시 숨을 고른 추자후는 곧 말을 이었다.
"노인네의 흔한 착각인가 싶어 그냥 잊을까도 생각해 봤는데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네. 그래서 뜬눈으로 날을 지새우다 막 포기하려는 찰나…… 생각이 나더군. 오래전 스치듯이 본, 가면 속 자네의 얼굴이."
대장군 조휘.
황실 최고의 고수이자 그 영향력이 중원에까지 미쳤던 무인이다. 언제나 흑색 가면을 쓰고 다녀 심한 추남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인물.
대장군이라는 높은 직책에까지 있었던 그가 이토록 무림을 돌아다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소문이 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면을 쓰고 살아왔으니까.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이는 황궁에서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고, 추자후가 한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정말 우연이었다.
아주 오래전 비밀리에 황궁에 초대받아 황제의 앞에 나아갔던 그때 한천 또한 그곳에 있었으니까.
먼저 황제를 알현하고 있었던 그는 단둘만 자리한 상황 때문인지 항상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있던 상태였고, 그 덕분에 아주 잠시나마 추자후는 한천의 얼굴을 봤던 것이다.
물론 추자후가 나타나기 무섭게 황급히 가면을 쓴 탓에 얼굴을 본 건 눈 두어 번 깜빡거릴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강렬했던 만남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었다.
과거의 이야기가 나오자 한천 또한 그날의 만남을 기억해 냈다.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그때 제 얼굴을 보셨군요."
"아주 잠깐이었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주 강렬했지. 얼굴에 화상을 입었다느니, 괴물 같은 외향을 지녔다느니 등의 괴소문이 무성했던 대장군이 그토록 미남일 거라고는 나 또한 상상도 못 했거든."
과거의 만남을 기억하며 옅은 웃음을 보인 추자후가 이내 물었다.
"그런데 왜 자네가 여기에 있는가?"
"무슨 의도로 물으시는 겁니까?"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황궁의 대장군이었던 자네가 정보 단체의 중간직 정도로 살고 있다는 것이."
"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신가 봅니다."
"물론. 하지만 역시 제일 궁금한 건 이것이겠지."
사실 그날 한천의 정체를 기억해 낸 그 순간부터 가장 궁금했던 부분.
추자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떻게 죽었다고 알려진 자네가 내 앞에 있을 수 있는지."
한천이 말없이 질문을 던지는 그를 응시했다.
추자후의 말대로였다.
대장군 조휘는 아주 오래전 죽은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한천의 정체를 기억해 내기 전까지만 해도 추자후 또한 그리 생각하며 살았다.
무림에서 살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누구도 한천이 대장군이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죽었다고 알려졌으니까.
죽은 그를 굳이 황궁에서도 찾으려 하지 않았다.
가면과 죽었다는 소문, 그 두 가지 덕분에 한천은 이렇게 평범한 무인으로 무림에서 살아가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추자후의 궁금증에 대해서는 일절 대답해 줄 생각이 없었던 한천이었기에, 그는 답을 하는 대신 오히려 추자후에게 물었다.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실 생각입니까?"
"내가 어찌할 거라 생각하는가?"
"여전하시군요. 그 사람의 속을 떠보는 듯한 말투는."
대답을 하는 한천의 목소리에는 다소 짜증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무림맹에서 제 정체를 아는 자가 맹주님을 제외하고 또 있습니까?"
"왜? 죽이려고?"
"……농담이 과하시군요."
"허허, 과거의 자네였다면 이 말을 농담으로 듣지는 않았을 터인데 많이 변했군그래."
"맹주님."
나지막이 자신을 부르는 한천의 목소리에 결국 추자후가 진지하게 답했다.
"나뿐일세."
"그럼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라…… 해 보게나."
"눈을 감으실 때까지 저에 대한 일을 비밀로 해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진지한 말투.
한천을 잠시 바라보던 추자후가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받았다.
"그건…… 확신하지 못하겠군."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건 무슨 의미십니까?"
"자네도 이미 어림짐작하고 있었겠지만 난 대장군 조휘에 대해 떠들고 다닐 생각이 일절 없네. 도움을 받았던 적도 있고, 그 은혜를 원수로 갚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다만."
지금 한천에게 말하는 대로 추자후는 그에 대한 정보를 주변인들에게조차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한천의 정체에 대해 소문을 낼 생각이 있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직접 그를 만나러 오지도 않았을 게다.
주변에 수하 한 명조차 대동하지 않았던 것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우연을 가장하고는 있지만 지금의 만남은 한천을 보기 위해 그의 동태를 확인하고서 비밀리에 움직인 것.
허나 그렇다고 해서 확실하게 약속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추자후에겐 책임져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그가 말을 이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난 무림맹주일세. 만약 자네가 우리 맹에 해가 된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때는…… 미안하지만 결국 난 맹을 위한 결정을 해야 한다네. 이건 이해해 주겠지?"
추자후의 솔직한 말에 한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의 대장군으로 수많은 이들의 삶을 책임져야만 했던 한천이다.
그랬기에 알고 있다.
때론 그들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을.
끄덕이는 한천을 보며 한결 마음이 편해진 추자후가 이내 그를 향해 물었다.
"전부터 신경 쓰였는데 그 오른팔 다친 겐가?"
겉보기엔 멀쩡했지만 추자후 정도 되는 무인이 그 작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다.
서 있는 자세 하나만으로도 많은 걸 알 수 있는 그였다.
그의 질문에 한천이 대답했다.
"그렇게 됐습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으니 그걸로 만족합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추자후의 얼굴에는 안타까운 감정이 가득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자였는지를 잘 알았으니까.
"무인에게 팔을 생명과 같거늘 어쩌다가."
상대인 추자후가 오히려 안쓰러워했지만 막상 당사자인 한천은 무덤덤하게 자신의 오른팔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그 가면을 벗는 대가가 고작 이 오른팔 하나라면 충분히 이득이니까요."
타인으로서는 의미를 정확하게 가늠하기 힘든 이야기. 하지만 괜찮다는 그 한 마디면 됐다. 추자후 또한 더는 그것에 대해 물을 생각이 없었다.
그를 위해 이곳에 왔고, 대화를 나눴다.
무림맹주로서 어떻게든 비밀리에 움직이긴 했지만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된 듯싶었다.
무림맹의 수장이지만, 우습게도 가장 많은 적이 있는 곳 또한 이곳이었으니까.
잠시 주변에 아무도 다니지 못하게 길을 막아 뒀지만 그 또한 길면 꼬리가 잡힐 게다.
추자후가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만 가야겠군. 자네도 가던 길 가게."
"알겠습니다. 그럼."
포권을 취해 보인 한천이 곧바로 추자후의 옆을 지나쳐 몇 걸음 정도 더 나아갔을 때였다.
추자후가 뒤편으로 나아가는 한천을 향해 말했다.
"언젠가 다시 보세. 조휘."
자신을 조휘라 부르는 추자후를 향해 한천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아까까지 진지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웃음기 가득한 눈을 하고 있는 한 사내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천이 웃는 얼굴로 말을 받았다.
"제 이름은 한천입니다, 맹주님."
피식.
그 한 마디에 추자후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벌써 노망이 들었는지 상대방 이름을 깜빡깜빡하는군그래. 조심히 가게…… 한천."
말을 마치고 추자후 또한 자신이 가야 할 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서로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는 두 사내의 등 뒤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맴돌았다.
* * *
양휴를 심문하며 얻게 된 새로운 정보들.
어쩌면 그건 그리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이미 적화신루를 통해 홍천관에서 나간 이들 중 일부가 죽기도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으니까.
무인이다 보면 죽음은 언제나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뭔가 정황이 이상했다.
홍천관의 관주인 금호에게 연달아 뺨을 맞으면서 전혀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얼마 되지 않은 죽은 이들 중 바로 그자가 있다는 사실까지.
다른 이라면 죽었다는 사실에 더욱 큰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천무진은 달랐다.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더 이상했다.
왜냐하면 자신 또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육체를 지배당했던 과거의 삶, 그랬기에 뭔가 그 부분이 조금 더 미심쩍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몇 가지 의문들이 더 따라붙었다.
우선은 금호에 대한 의심.
그리고 만약 정말로 금호가 천무진이 찾는 그들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자라면 대체 왜 양휴를 죽이지 않고 쫓아냈는지도 의아했다.
그렇게 살려서 보내 놓고 왜 먼 미래에는 자신을 통해 양휴를 죽이게 만들었던 걸까?
대충 정보를 다 얻은 것 같기는 했지만 천무진은 양휴를 풀어 주지 않고 창고에 가둬 놨다.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가 새어 나가는 것도 방지하고, 혹시 모를 또 뭔가를 기억해 낼 수도 있다 여겨서다.
다행히 양휴도 크게 반항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불만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가는 험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 여긴 모양이다.
적화신루를 통해 금호에 대한 세밀한 뒷조사가 시작됐고, 덩달아 천무진 또한 일거리가 늘어난 셈이 되어 버렸다.
창고의 감시를 전담했지만 이제는 금호의 뒤도 쫓아야 했다.
그렇게 약 삼 일 정도 금호의 뒤를 은밀히 쫓고 있을 때였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천무진은 자신이 홍천관에서 해야 할 창고 정리를 오전 중에 끝마치고 움직일 계획이었다.
창고의 정리가 마무리되어 갈 그 무렵 귀찮은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 무진!"
버럭 소리치는 상대를 슬쩍 바라본 천무진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홍천관에서 계속 선배인 척하며 자신에게 들러붙는 방건이 나타난 것이다.
‘하아, 귀찮게.’
속내와는 달리 겉으로 천무진은 활짝 웃으며 그를 반겼다.
"여긴 웬일이십니까?"
"웬일은. 며칠째 코빼기도 안 비치고 말이야. 섭섭하다, 인마."
사실 방건은 매일 이곳에 천무진을 보러 찾아왔다.
하지만 그가 매번 빠르게 일을 끝내고 다른 곳을 쏘다닌 탓에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방건은 아예 일찍 천무진을 찾아왔고, 덕분에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달라붙으면 반나절은 그냥 날아갈 걸 알기에 천무진은 빠르게 방건을 떼어 내려 했다.
"죄송합니다. 요새 일이 좀 많아서요. 그런데 어쩌죠? 제가 지금 어디를 가야……."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따라와 자식아. 소개시켜 줄 사람 있으니까."
"소개시켜 줄 사람이요?"
"그래,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
자신 있게 말하는 방건의 모습에 천무진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대상을 소개시켜 주기엔 방건이 지닌 능력은 많이 모자랐다.
백아린을 보면서도 저런 여인들은 자신들과는 아예 다른 세상 사람이라 치부하던 그가 아니던가.
그러던 그가 갑자기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니…….
천무진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방건이 이미 그의 소매를 쥔 채 잡아당기고 있었다.
"가자니까, 시간 그리 안 뺏을게, 밥이나 같이 먹자고."
"……알겠습니다."
여기서 실랑이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천무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반강제로 천무진은 어딘가로 끌려가야만 했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가뜩이나 시간을 빼앗기는 것도 좋지 않았거늘, 무림맹 바깥으로까지 나가자 천무진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물었다.
"어디까지 가시는 겁니까?"
"하여튼 급하기는. 다 왔어. 저기 객잔이라고."
방건이 막 말을 하며 눈앞에 있는 객잔을 가리켰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천무진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그때였다.
익숙한 마차를 발견한 방건이 손을 들어 소리쳤다.
"소청아!"
소리를 막 내지르자 마차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성큼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상대가 방건을 향해 활짝 웃으며 양손을 휘휘 흔들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천무진은 놀란 듯 상대와 방건을 번갈아 바라봤다.
방건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건 분명 귀여운 여인이었다. 하지만 여인이라는 말을 쓰기가 무색할 정도로 어린, 정확하게는 소녀라고 불러야 할 상대였다.
나이는 겨우 열 살이 조금 넘었을 정도.
천무진이 물었다.
"누굽니까?"
그의 질문에 방건이 소청이라고 부른 어린 소녀를 응시한 채로 대답했다.
"내 동생. 어떠냐? 예쁘지?"
여동생을 바라보는 방건의 입가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