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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왕-23화 (23/293)

23화. 실타래 ― 있거든요 (1)

천룡성 가솔인 남윤의 등장으로 성도거점은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모자랐던 물건들이 채워지며, 고작 하루 만에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변했다.

내실이 다져지고, 덩달아 역할까지 분담되며 바깥일 또한 보다 확실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돌이 나온 창고와 낮 시간 동안의 부관주 여청을 감시하는 것이 천무진의 몫, 그리고 그 외의 시간 동안 여청을 감시하는 일은 한천이 맡았다.

역할이 정해지기 무섭게 한천은 여청과 안면을 트는 것에 성공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변 사람들을 이용해 여청과의 자리를 만들어 냈고, 단 하루 만에 그와의 술자리까지 성사시켰다.

그들이 그리 각자의 일을 해 나가는 동안 백아린 또한 그냥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마찬가지로 무림맹에 들어간 그녀는 안팎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다.

같은 말단이라고는 하지만 천무진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부대로 들어간 그녀는 무림맹 내부의 전체적인 정보들을 얻어 내고 있었다.

양휴가 쫓겨났을 당시 무림맹에서 벌어졌던 자잘한 사건들을 정리하고 혹시 모를 파벌이 연관되어 있는 건 아닌지도 확인했다.

그리고 적화신루의 총관으로서 여러 가지 업무를 보며 천무진에게 필요한 정보들을 구해 오는 것 또한 그녀의 몫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그녀다 보니, 백아린은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허나 그토록 바쁜 일정에도 백아린은 죽는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착실하고 꼼꼼하게 일을 파악하며 뭐 하나 빼놓지 않으려 애썼다.

아주 자그마한 뭔가에서 큰 단서를 찾을 수도 있다 여겼으니까.

그런 그녀에게 최근 신경 쓰이는 한 가지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뒤편에 있는 저 사내였다.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백아린은 슬쩍 기척을 감추고 자신의 뒤를 쫓는 사내를 확인했다.

그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사공량이었다.

백아린의 미모에 혹해, 또 그녀를 이용해 다시금 사람들 앞에 특별한 존재로 나서고 싶은 마음에 그가 딴에는 비밀리에 뒤를 쫓고 있던 것이다.

허나 아쉽게도 사공량의 비밀스러운 미행은 들통이 난 지 한참은 된 상태였다.

나름 재능이 있는 무인이긴 했지만 백아린과의 차이는 너무도 심했고, 당연히 따라붙은 직후 거의 곧바로 들킬 수밖에 없었다.

백아린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모르는 것이 이상할 수밖에 없는 상대.

그랬기에 더욱 그녀는 상대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처음엔 누군가가 자신에게 감시자를 붙인 건가 생각했지만 그런 의심은 금방 사그라졌다.

감시자라고 보기에는 그 실력이 너무도 형편없었으니까.

본인은 들통 나지 않게 잘 쫓는다고 여기는 듯싶었지만 모르기가 어려울 정도로 미숙했다.

이틀째 계속해서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상대의 신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제 곧바로 적화신루의 정보를 이용해 확인한 덕분이다.

단 하루만으로 끝났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려 했는데…….

‘어떻게 해야 되나.’

걷는 와중에도 백아린의 고민은 길어졌다.

직접 다가가 왜 자꾸 쫓아다니냐며 면박을 줄까도 생각해 봤지만, 상대의 의도를 모르는 지금 이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르는 척 그가 자신의 꿍꿍이를 드러내길 바라는 것이 맞았다.

다만 문제는 그의 미행이 무림맹 내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차라리 그거뿐이었다면 계속 모르는 척할 수 있었겠지만 바깥으로 나간 이후에도 계속 뒤를 쫓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천룡성의 비밀 거점이든 적화신루에 관해서든 백아린은 감춰야 할 것이 많았으니까.

그 때문에 어제도 골목길로 들어서 일부러 사공량이 아슬아슬하게 자신을 놓쳤다 생각이 들게 연기까지 했었다.

허나 어제처럼 계속해서 상대를 떼어 놓는다면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뭔가 이상하다 여길 건 자명한 사실.

그렇다고 해서 힘으로 제압하기도 뭐한 상황이었기에 백아린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작스레 그녀가 무림맹 내에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다관에 들어섰다.

자꾸 옆에 붙어 다니던 일행들도 떨어트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척 연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차라리 상대가 접근하기 편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던 사공량이 이내 조심스레 다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움직임을 다 알면서도 백아린은 그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주문한 차를 홀짝였다.

백아린의 바로 뒤편으로 다가온 사공량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괜스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흠흠, 뭐가 괜찮을까."

마치 들으라는 듯한 목소리, 그리고 말과 함께 슬쩍 그녀 쪽으로 몸을 비트는 움직임 또한 느껴졌다. 그걸 알면서도 백아린은 모르는 척 자세를 유지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는 있었지만.

사공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향기가 좋습니다."

"……네?"

백아린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오는 사공량의 행동에 괜히 놀라는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좋아, 물었어.’

허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속으론 쾌재를 불렀다.

바로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둘은 꽤나 가까운 거리였다. 그리고 백아린과 지척에서 마주한 순간 사공량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멀리서 보았을 때에도 느꼈지만 가까이서 보게 되니 아름다움이 더욱 크게 와 닿았다.

커다란 눈동자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절로 말문이 막히게 만들 정도였다.

사공량이 잠시 멍하니 백아린을 바라보고 있는 그때 그녀가 물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인가요?"

"아, 예. 차향이 좋아서 말을 걸었습니다. 혹 실례가 아니라면 어떤 차인지 여쭈어 봐도 될는지요?"

화들짝 정신을 차린 사공량이 준비해 두었던 말을 내뱉었다. 그런 그의 질문에 백아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감로차(甘露茶)예요. 그런데 어디서나 있는 그냥 평범한 감로차 냄새 같은데……."

"흠흠, 여기 감로차 한 잔 주시오."

수작질을 부린다는 게 들통 날까 염려되었는지 그가 서둘러 감로차를 주문했다. 그리고 이내 감로차가 그의 앞에 놓였을 때였다.

따뜻한 찻물을 한 모금 마신 사공량이 다시금 말을 걸었다.

"백아린 소저시지요?"

"저를 아시나요?"

여태까지 뒤를 쫓아다녔으니 모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백아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며 사공량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럼요. 사실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백아린은 재차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사실 그에게 궁금한 건 왜 자신을 몰래 쫓아다녔는가 하는 것뿐이다. 괜한 말들로 이야기를 길게 끌어가기보다는 서둘러 본론을 꺼내길 바라는 상황.

그 후에도 몇 차례고 사공량은 비슷한 식으로 말을 걸었지만, 백아린은 대화를 이어 가기 힘들게 대답을 짧게 끊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말이 끊기자 더는 이야기를 이어 가기 어렵게 되었다 여겼는지 사공량은 결국 뜸을 들이며 기회를 엿보던 속내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사공량이 갑자기 부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백아린이 슬쩍 표정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이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슬쩍 몸을 한 뼘 정도 뒤로 물렸다.

"이런 말씀드려 정말 송구한데 처음 뵈었을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왜요?"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며 백아린이 막 찻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 순간 그가 말했다.

"제가 찾던 그런 분이시라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백아린은 입에 머금은 찻물을 뱉어낼 뻔했다.

그녀가 황급히 찻물을 삼키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때였다.

"괜찮으시다면 이제부터 서로를 알아 갔으면 하는데요. 아참,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잠룡대 소속의 사공……."

그나마 내세울 만한 잠룡대를 언급하는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백아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모를 뭔가를 기대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지만, 그 이유가 자신에 대한 관심이라면 더는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가 딱 잘라 말했다.

"죄송하지만 그쪽한테 그런 시간을 드리는 건 좀 힘들 것 같아요."

"……거절하시는 겁니까?"

"네, 호의는 감사하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네요."

말을 마친 백아린이 포권을 취하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막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앉아 있던 사공량이 황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냥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끈덕질 것만 같은 사공량의 모습에 백아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한껏 두들겨 패 주고 관심을 끊으라고 협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백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공량을 바라봤다.

비밀리에 해야 할 일이 많은 지금, 이런 이유로 쓸데없이 미행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치근덕거리는 사내를 끊기에 가장 좋은 방법을 떠올린 그녀가 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있거든요."

"뭐가 말입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요."

백아린의 말에 사공량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는 이내 아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시군요."

안타깝다는 듯한 말투. 하지만 사공량 또한 이번 만남이 그리 쉽게 되지 않을 확률이 크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치잇, 역시 쉽지 않네. 결국 다른 수를 쓰는 수밖에 없겠군.’

하지만 이 같은 일을 대비해 이미 다음 수를 생각해 둔 상황.

속으론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래도 겉으론 최대한 성인군자답게 행동해야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공량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아쉽지만 무례를 끼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그럼 다음에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인사를 마치고 백아린은 곧바로 다관을 빠져나갔다.

백아린이 사라지는 그 순간, 여전히 자리에 선 채로 혹시나 그녀가 자신을 돌아볼까 웃음 가득한 얼굴로 끝까지 서 있던 사공량의 표정이 빠르게 변했다.

그가 백아린이 사라진 입구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잘난 척은.’

속이 뒤틀렸는지 사공량은 옆에 있는 감로차를 들이켰다. 허나 이내 그는 머금었던 감로차를 바닥으로 내뱉었다.

"퉤, 더럽게 맛없네."

사공량은 소매로 입가를 닦아 내며 괜스레 불만을 토해 냈다. 다소 짜증이 일긴 했지만…….

그가 곧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중얼거렸다.

"지금 아무리 그래 봤자지. 결국 넌 내가 원하는 대로 내 것이 될 거야. 난 절대 기회를 놓치는 사내가 아니거든."

말을 내뱉는 사공량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뜩였다.

* * *

밤늦게까지 무림맹에서 창고를 감시하던 천무진이 백아린의 연락에 서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급히 장원으로 돌아온 건 단엽 때문이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그가 돌아왔다.

당연히 마음이 급해졌다.

벌컥.

열린 문 너머에는 단엽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입 안 가득 음식을 머금고 있던 단엽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이, 주인.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좋은 식솔을 구해 놨네? 음식 맛이 아주 훌륭해."

남윤이 차려 준 음식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단엽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런 단엽의 말에는 반응하지 않은 채로 천무진이 물었다.

"왜 혼자야? 갔던 일이 잘 안 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히죽 웃어 보인 그가 손가락으로 창 바깥을 가리켰다.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단엽이 말을 이었다.

"주인이 원하는 건 저기 가져다 놨어."

"……고생했어."

"고생은 뭐. 오히려 생각보다 시시해서 문제였지. 그나저나 그쪽한테는 조금 미안하네. 부탁한 대로 시체를 전달해 주긴 했는데 형체가 많이 망가져 버려서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단엽이 천무진과 함께 들어온 백아린을 향해 말했다.

떠나기 전 그녀가 자신에게 했던 부탁 때문이다.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시체를 적화신루에 넘겨 달라 했는데, 자폭을 하는 바람에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백아린이 물었다.

"정말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때려죽인 거야?"

"내가 한 게 아니라 그놈이 자폭을 하더라고."

"……자폭?"

"응, 나 말고 내가 데리러 간 놈이랑 같이 동귀어진을 하려고 한 것 같던데…… 그 자식 보통 놈은 아닌 것 같더라."

아무리 잘 훈련된 자라고 해도 죽음 앞에서 그토록 망설임 없이 행동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의 상황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야기를 전해 듣는 천무진과 백아린은 얼추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만한 자가 감시를 하고 있던 양휴에 대한 의구심 또한 더더욱 커졌다.

그렇지만 이제 그 의아함에 대해 고민만 하고 있을 이유가 사라졌다.

옆에 서 있던 백아린이 천무진을 향해 말했다.

"갈까요?"

"당연하지."

얼마나 오래 기다려 온 일이던가.

말을 마친 천무진이 백아린과 함께 단엽이 가리켰던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둘이 도착한 건물의 문이 열렸고, 그 안에는 한 사내가 방 한쪽에 처박혀 있었다.

점혈을 당한 탓에 두 눈만 부릅뜬 채로 미동도 하지 못하고 있는 사내.

양휴, 바로 그였다.

입구에 선 채로 방 안에 쓰러져 있는 양휴를 바라보는 천무진의 표정은 복잡했다.

과거의 삶에서 자신이 죽였던 상대.

……그런 그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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