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낙구 ― 임무거든 (2)
잠룡대(潛龍隊).
정파를 대표하는 후기지수들만이 모여 있는 무림맹 내의 단체다. 당연히 그곳에는 수많은 문파의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같이 정도 무림을 대표하는 세력들의 인물들도 있었지만, 그 외 중소문파의 재능 있는 이들 또한 즐비한 곳이었다.
사공세가(司空世家)의 사공량(司空梁).
그 또한 뛰어난 재능으로 잠룡대에 들어온 사내였다. 사공량의 가문인 사공세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나름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가였다.
사공세가 가주의 아들로 형들에 비해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어릴 때부터 가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탓인지 사공량은 안하무인의 성격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자신을 치켜세웠고, 엄청난 재능이라는 칭찬을 귀에 달고 자랐으니까. 그 때문에 그는 주변 사람들을 무시했고, 자신만이 최고라는 생각에 젖어 살아왔다.
허나 그런 그의 오만함은 이곳 무림맹에 온 이후 깨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알아 버렸으니까.
무림맹에 온 이후 만난 많은 이들이 자신보다 가문도 뛰어났고, 무공에 대한 자질 또한 앞섰다.
이곳에서 자신은 최고가 아닌 그저 조금 뛰어난 수준의 자질을 지녔을 뿐이다.
물론 잠룡대에 들어갔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거리일 수 있었지만 어릴 적부터 콧대가 높았던 그로서는 만족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허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짜증은 났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을 적으로 만드는 우는 범하지 않았다. 적당한 선에서 맞춰 가며 사공량은 이곳 잠룡대에 녹아들고 있었다.
임무를 위해 다른 동료들과 약 오십 일 가까이 무림맹을 비웠던 그가 마침내 임무를 마치고 복귀를 했다.
"고생들 했어."
함께 움직였던 동료들을 향해 짧은 인사를 던지며 미소를 지어 보인 사공량은 이내 짐을 정리하겠다며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나름 훈훈한 외모에 사람 좋은 태도를 보여 댄 덕분에 잠룡대 내의 평판은 그리 나쁘지 않은 사공량이다.
모두의 앞에서는 고생했다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무섭게 돌변했다.
침상 옆으로 짐을 휙 집어 던진 사공량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이딴 임무에 왜 내가 나가야 되는 거야? 무시하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잠룡대가 움직였다는 건 나름 무림맹의 입장에서도 중요한 뭔가와 관련된 임무였지만, 막상 그걸 수행한 사공량에겐 하찮은 잡일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이번에 움직인 이들이 잠룡대에서도 손꼽히는 이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 불만이었다.
그런 이들을 빼고 계획되어진 일에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것.
그것이 결정적으로 사공량을 짜증나게 만드는 요소였다. 마치 자신이 그런 어중이떠중이들에 낀 것 같아서.
잠룡대에서도 손꼽히는 몇몇 후기지수들을 떠올리며 사공량은 침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가 옆에 놓여 있던 주전자에 담긴 물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사공량은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네놈들이 왜 최고인지 알아? 좋은 가문과 문파가 있기 때문이야. 운도 좋은 놈들. 그리고 애초부터 내 가문이 미천하니, 공평한 기회조차 오지 않는 게지. 만약 내가 그곳에 소속되어져 있었다면 네놈들은 내 발끝에도 못 미쳤어.’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모자람을 이처럼 다른 뭔가에 전가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에는 훌륭한 무공이 없다거나, 다른 이들의 배경이 너무나 튼튼하다는 둥의 그런 변명거리들이었다.
사공량은 항상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불공평하다 생각했다.
자그마한 가문이다 보니 주목도 받지 못하고, 똑같은 성과를 내도 무시를 당한다 여겼다.
그랬기에 만약 이 모든 것이 반대였다면 위에 있을 건 자신이라며 스스로에게 항상 되뇌었다.
자신이 최고라 여겼고, 항상 주목을 받으며 살아왔던 사공량. 그런 그에게 이런 평범한 삶은 너무나 무료했고,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 년이 넘게 감정을 숨긴 채로 지내 오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뭔가에서 최고가 되고 싶고, 주목받고 싶다는 욕심은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리눌러야 했던 시간만큼 그 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속이 타는지 주전자에 담긴 물을 다시금 들이켜고 있는 그때였다.
방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정리 다 안 됐냐? 식사 하러 가자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마찬가지로 잠룡대 소속인 유상기라는 사내였다.
비슷한 가문에, 비슷한 위치에 있는 자.
이 정도면 함께해도 무시를 당하지 않겠거니 하며 지기인 척 지내는 인물이었다.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사공량이 답했다.
"아, 잠시만 바로 나가지."
대답을 끝낸 그는 슬쩍 옆에 있는 거울을 통해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곧바로 방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밖에 서 있던 유상기가 그런 그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이렇게 늦냐, 인마."
친근한 척 구는 상대가 여타의 유명 문파 인물이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사공량은 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을 받았다.
"성격은 급해 가지고. 그렇게 배가 고프냐?"
"그래. 당장에라도 배가 등가죽에 붙을 지경이다."
말과 함께 유상기가 가자는 듯 손짓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오십 일 만에 돌아왔다고 왜 이렇게 새롭냐."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대답을 하고 있긴 했지만 사공량은 사실 모든 것에 짜증이 나 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식사고 뭐고 들어가서 한숨 자고 싶을 뿐이었지만, 평소 연기하는 자신의 모습을 위해 억지로 맞춰 주고 있는 상황이다.
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그때, 옆쪽에서 눈에 익은 이들과 함께 나아가는 한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나름 무림맹 내에서 알아주는 젊은 사내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여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백아린이었다.
그녀는 이미 무림맹 내에서 나름 유명인이 되어 있었지만, 한동안 자리를 비웠던 사공량에겐 생면부지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백아린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사공량의 심드렁한 감정이 확 하고 돌변했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그 때문에 유상기 또한 제자리에 섰다. 몸을 돌린 그가 물었다.
"왜 그래?"
유상기의 질문에도 그저 멍하니 멀어져 가는 백아린을 바라보기만 하던 사공량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찾았다."
"찾다니? 뭘?"
유상기가 되물었지만 그의 질문 따위는 이미 사공량의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자신의 실력을 드러낼 방법이 떠올랐으니까.
무림에서 주목을 받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뛰어난 가문이나 실력, 그리고 미녀다.
애초에 가문은 그다지 빼어나지 않았고, 실력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공정한 기회가 와야 한다고 여겼던 사공량이다.
그런 그의 앞에 백아린이 나타났다.
저 여인만 있다면 자신이라는 존재가 두각을 드러내게 될 것이고, 그렇다면 공정하게 실력을 평가 받을 수 있게 될 거라 믿었다.
더군다나 지금 백아린에게 쏠리는 저 시선들 속에 자신이 함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이상할 정도로 짜릿함이 느껴졌다.
그가 눈에 활기를 띈 채로 옆에서 걱정스레 서 있던 유상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기야."
"무슨 일 있냐? 갑자기 왜 그래?"
걱정스레 물어 오는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공량은 자신의 욕망을 드러냈다.
"……너 나 좀 도와줘야겠다."
* * *
창고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돌을 찾아내 의뢰를 맡긴 천무진은 그날 이후로 부관주 여청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정보 또한 적화신루에 의뢰하긴 했지만 맹 내부에서의 움직임은 자신이 직접 살피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여청의 하루 일과는 단순했다.
무림맹 홍천관에 들어와서는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업무 외 시간에는 바깥에서 무림맹 소속의 무인들과 술을 마시거나 하는 일들이 꽤나 잦다고 들었다.
뭔가 그에게 바짝 붙어 정보를 캐내고 싶었지만 일개 말단으로 들어간 천무진에게 그건 불가능했다.
양휴를 잡으러 간 단엽이 돌아올 동안 계속해서 감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뭔가를 알아내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고민이 길어지는 사이 그의 거처로 백아린과 한천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까지 장원을 관리할 사람이 오지 않았기에 매번 식사는 바깥에서 사 와 해결하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객잔에서 음식을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가 천무진을 발견하고는 말했다.
"오늘은 있었네요?"
삼 일 동안 여청의 뒤를 쫓는다며 이 시간엔 항상 장원을 비웠던 천무진이다. 그 때문에 빈방에 사 놓은 음식을 놓고만 갈 뿐이었는데, 오늘은 천무진과 마주할 수 있었다.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이 답답한 듯 대답했다.
"또 주루에 들어가서 온종일 술만 마시고 있더군. 동행한 이들도 많은 자리고, 딱히 뭐 없을 것 같아서 우선 돌아왔어."
여청의 뒤를 캐고는 있었지만 사실 천무진 혼자서 감당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여청도 문제였지만, 당시 그가 들어섰던 그 창고 또한 감시해야 하는 상황. 몸이 하나인 천무진이 두 개의 일을 동시에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여청에게는 조금 더 바짝 옆에 붙어 감시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천무진은 그런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난 창고 쪽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은데 여청에게 붙일 만한 사람이 무림맹 내에 누구 없겠어?"
"붙일 만한 사람이라……."
잠시 말을 끌긴 했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백아린의 시선이 어느새 자리에 앉아 사 가지고 온 음식들을 풀고 있는 한천에게로 향했다.
"부총관이 하면 되겠네."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막 젓가락을 들던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을 가리켰다.
"엑? 제가요?"
"나이도 좀 맞고, 무림맹 내에서 직급도 그나마 비슷하잖아. 그리고 술을 좋아한다는데 굳이 다른 사람 찾을 필요도 없이 딱 부총관이 적임자 아냐?"
말단으로 들어간 천무진, 백아린과는 달리 나이 덕분에 한천은 조금 더 위의 직책을 부여받았다.
때문에 한천은 홍천관의 부관주인 여청과 어느 정도 맞는 위치에 있었다.
백아린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기에 한천은 대답을 흐렸다.
"아니 뭐 맞는 말씀이긴 한데……."
"왜 갑자기 빼고 그래. 술 마시는 일이라면 환장을 하잖아."
"어휴, 그냥 좋아서 마시는 거랑 뭔가 캐내려고 마시는 게 같겠습니까. 술은 그냥 딱 즐기면서 마셔야 제맛인데."
"그래서 못 하겠다고? 요새 다른 사람한테 일거리 다 맡겨 두고 술만 마시고 다니는 게 누구더라?"
슬쩍 말꼬리를 올리는 백아린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 한천이 손사래를 쳐 댔다.
"그럴 리가요. 해야죠. 다른 분들도 다 바쁘게 뭔가 하시는데 저만 놀 순 없지요. 하하."
한천은 곧바로 천무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 곧바로 그자한테 접근해 보죠."
"어딘지 모르게 음흉한 부분이 있는 자야. 접근하는 데 신경을 좀 써야 할 거야."
"그거야 걱정 마시죠. 반 시진 안에 홀딱 제 사람으로 만들어 둘 테니까요."
웃으며 말하는 한천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무림맹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그의 친화력은 분명 보통이 아니긴 했다.
사 온 음식을 먹을 준비를 끝마친 한천이 말했다.
"자자,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고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세 사람이 막 식사를 시작한 그 무렵 장원의 입구로 누군가가 들어서고 있었다.
성큼 안으로 들어선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계십니까?"
처음 듣는 목소리에 백아린과 한천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그때 천무진이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말을 마친 천무진이 옆에 있는 창문을 확 열어젖혔다.
바깥쪽으로 향한 천무진의 시선에는 한 명의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 또한 천무진을 발견하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멀리에서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작은 주인님을 뵙습니다."
노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천룡성의 하나뿐인 가솔인 남윤이었다. 천룡성의 본거지를 지키고 있던 남윤이 천무진의 부름을 받고 이곳 사천 성도에 도착한 것이다.
남윤을 처음 보는 백아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분은 누구시죠?"
천무진을 향해 작은 주인님이라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천룡성과 관계된 자라는 건 알겠는데, 갑작스레 그런 사람이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궁금했다.
그녀의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일전에 말했잖아. 이곳을 관리해 줄 사람이 올 거라고."
"아, 그럼 저분이……."
그제야 백아린과 한천은 남윤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천무진이 슬쩍 앞에 놓인 음식들을 바라봤다.
한동안 비슷한 음식들로 배를 채우다 보니 조금씩 질려 가던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도착한 남윤을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천무진이 남윤을 맞이하러 방을 나서며 말했다.
"이제 객잔에서 음식을 사 오지 않아도 돼. 음식 실력이 보통이 아니거든."
말을 끝내고 먼저 바깥으로 나온 천무진이 입구 쪽으로 다가갔고, 마찬가지로 남윤 또한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마주하는 순간.
천무진이 입을 열었다.
"오느라 고생했어, 영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