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거점 ― 어딥니까
"흐음."
무림맹에 들어간 천무진은 오늘도 홍천관에 있는 전각 중 하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무렵, 오늘은 다행히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제 완전히 굽힌 탓인지 더는 괜한 시비를 걸지 않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 탓에 자신을 얕보는 눈빛은 감내해야 했지만 말이다.
문제는 홍천관에 제대로 들어가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곳의 관주를 만나서 신고를 마쳐야 했는데,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까지도 관주는 코빼기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 탓에 천무진은 오늘도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고만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말이야.’
천룡성 거점을 나오며 자리를 비운다 말했던 오십 일의 시간이 거의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 무림맹에서 뭔가를 얻어 내지도 못했을 뿐더러, 이것을 조사하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릴 모양새였다.
아무런 단서도 없는 상황, 이곳 홍천관에서부터 차근차근 뭔가를 찾아야만 했다.
길어지는 객잔 생활에 정보를 쌓아 갈 공간도 모자랐고, 분류를 해 두는 것도 쉽지 않았다.
거기다 단엽은 하루가 다르게 죽는소리를 해 댔다.
무림맹주를 만나 최소한의 보고는 한 덕분에 대홍련의 부련주인 그가 무림맹의 구역에서 죽립을 쓰고라도 간간이 외출할 수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그 또한 한정적인 데다, 딱히 무공을 연마할 연무장도 없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는 만큼 그에 맞는 방도를 강구해야만 했다.
홀로 이것저것을 고민하는 사이 조용했던 전각의 문이 열렸다.
혹시나 관주인가 했지만 상대를 확인하는 순간 천무진의 얼굴엔 실망의 빛이 서렸다.
‘젠장.’
모습을 드러낸 건 어제 천무진의 명치를 때렸던 사내였다.
‘이름이…… 방건이었나?’
어제 귀동냥으로 누군가 그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기에 어렴풋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방건이 천무진을 불렀다.
"야, 무진."
"무슨 일이십니까?"
귀찮긴 했지만 천무진은 그런 속내를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진, 그것은 천무진이 이곳 무림맹에서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누군가로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인물을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름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백아린과 한천은 무림에 알려진 이들이 아니었기에 굳이 가명을 쓸 이유가 없다며 본명을 사용했지만 천무진은 조금 달랐다.
정체불명의 그들에게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성을 빼고 무진이라는 이름으로 무림맹에 들어온 것이다.
방건이 귀찮다는 듯 천무진에게 손짓했다.
"뭐긴. 밥이라도 먹이란다."
방건과 같이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천무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서 있는 문가로 다가갔다.
방건이 계단 아래로 내려서며 말했다.
"따라와."
어제의 일 이후로 자신이 확실히 위라는 개념이 잡혔는지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천무진의 관심은 그런 그의 태도가 아닌 다른 것에 있었다.
‘양휴가 한나절 동안 몸담았던 곳이 이곳 홍천관이라고 했으니…….’
천무진은 슬쩍 방건을 살폈다.
별 대단한 걸 알고 있을 위인은 아니지만 뭔가 자그마한 단서라도 얻어 낼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게다.
천무진이 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여기 홍천관에 계셨던 겁니까?"
"나? 한 사 년 정도 됐나?"
사 년 정도라면 양휴가 있었던 시기와 겹친다.
번거롭게만 느껴졌던 그와의 시간이 아주 조금 쓸모가 있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틈을 만들어 양휴에 대해 캐내 봐야겠군.’
물론 방건이 양휴에 대해 알 확률은 극히 적었지만, 그래도 홍천관에 오래 몸을 담았으니 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정보를 얻을 수도 있는 노릇이다.
천무진은 이런 부류를 어떻게 하면 손바닥 위에 놓고 조종할 수 있는지 잘 알았다.
조금의 칭찬, 그것만으로도 알아서 나불거리는 것이 뽐내기 좋아하는 이들의 특징이었다.
천무진이 슬쩍 그를 띄어 줬다.
"사 년이라니 대단하시군요. 무림맹에서 그리 오래 계시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치? 내가 어릴 때부터 말이야……."
예상대로 방건은 신이 나서 혼자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무진은 그런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추며 뭔가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고 있었다.
자기 자랑을 신명 나게 하며 걷던 방건은 문득 주변에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꼈다.
남녀 가리지 않고 힐끔거리는 시선들.
처음엔 뭔가 싶었지만 이내 알 수 있었다.
함께 걷고 있는 천무진 때문이었다.
훤칠한 외모에 사람의 눈을 확 잡아 끄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천무진이었기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전혀 느껴 본 적 없는 그런 시선에 방건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지고 있었다.
여인들의 시선이 느껴지자 방건은 괜스레 천무진의 등을 탁탁 두드리며 보라는 듯 크게 웃었다.
"어쨌든 무진 넌 이제부터 아무 걱정 하지 마. 내가 알아서 잘 끌어 줄 테니까. 앞으로 나만 잘 따라오라고."
모두의 시선을 잡아 끄는 그런 사내에게 윗사람처럼 굴자, 자신이 더 뛰어나게 느껴져,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천무진은 갑작스레 친근하게 굴어 대는 방건의 행동에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속내는 전혀 달랐다.
지금 자신의 등을 두드려 대는 행동까지 횟수를 세 머릿속에 숫자로 새겨 넣고 있는 천무진이었다.
식당으로 천무진을 안내한 방건이 유쾌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갈 때였다.
웅성웅성.
주변의 분위기가 뭔가 잔뜩 흥분된 듯한 느낌을 풍겼다. 많은 이들의 웅성거림은 그저 사람이 많아서 생겨나는 소란이 아니었다.
방건 또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확인하고는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지? 뭔 일 있나 본데?"
친한 척 자신을 잡아당기는 방건의 손에 이끌려 천무진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쪽으로 따라가야만 했다.
귀찮다는 듯이 터덜터덜 끌려간 그곳에는 한 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내 넷에 여인 하나로 구성된 무리.
그리고 이 모든 시선을 받고 있는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무리에 섞여 있는 한 명의 여인이었다.
하얀 백의를 입은 채로 뭔가를 듣고 있는 여인.
백아린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천무진은 평소와 다른 뭔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항상 들고 다니던 대검이 없다는 거다.
천무진의 바로 옆에서 까치발을 서며 안쪽을 살피던 방건이 탄성을 터트렸다.
"우와…… 끝내주는데."
도저히 눈을 떼기 어려웠는지 방건은 멍하니 사람들 건너에 자리하고 있는 백아린에게 시선을 고정시켜 둔 상태였다.
천무진이 그런 그녀를 향해 전음을 날렸다.
『왜 오늘 무림맹에 있는 거야? 내일부터 들어온다고 하지 않았어?』
갑작스레 날아든 전음이었지만 백아린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며 천무진을 찾았다. 키가 크고 워낙 눈에 뛰는 외모를 가진 덕분에 그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백아린 또한 천무진을 향해 전음을 날렸다.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부총관하고 오전, 오후로 나눠서 들어오기로 했어요. 어차피 중요하지 않은 곳이라 크게 주목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고 해서요.』
그녀가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다시금 전음을 보냈다.
『이상하다. 대검을 놓고 와서 그렇게 시선을 잡아 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왤까요? 옷을 좀 바꿔 입어야 할까요?』
『……그런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옷보다 얼굴이 더 문제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천무진은 말을 돌렸다.
『그럼 한천도 이미 여기 들어와 있는 건가?』
『하아, 말도 말아요.』
뭔가 골치 아프다는 듯한 말투에 천무진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전음이 이어졌다.
『벌써부터 사람들 모아서 대낮부터 술잔치에 난리도 아니던데요.』
자신이 알기로는 기껏해야 한두 시진 정도 전에 들어왔을 그가 벌써부터 술잔치를 한다는 말에 천무진은 의아한 듯 물었다.
『무림맹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었던 거야?』
『아뇨.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벌써 호형호제하면서 얼싸안고 난장판이에요. 친화력 하나는 보통이 아니거든요. 이럴 때 또 발휘가 되네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슬쩍 손으로 미간을 꾸욱 눌렀다.
자신은 맞으면서 간신히 옆에 있는 이 방건이라는 자와 그나마 안면을 텄거늘, 대체 어떻게 하면 벌써 호형호제를 하며 얼싸안는 사이가 되는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뭔가 억울한데…….’
그때 천무진의 옆에 있던 방건이 그의 등을 팍 치며 말했다.
"자식, 남자라고 미인한테서 눈을 못 떼네. 뭐해? 밥 먹자. 어차피 저런 여자는 우리한테 눈길도 안 준다고. 저 옆에 있는 녀석들이 누군지 알아? 하나같이 뒷배 쟁쟁한 녀석들이야. 우리랑 완전히 다르지."
말을 마친 방건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천무진을 때리는 방건의 모습에 백아린은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이내 전음을 보냈다.
『옆에 있는 그자가 어제 그 살생부 같은 종이에 적힌 사람이에요?』
『맞아. 지금은 살아 있지만 곧 나한테 죽을 거야.』
표정을 구기며 받아치는 천무진의 농담에 백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픽 실소를 흘렸다.
전음을 보내다 웃은 것도 모르고 그녀의 옆에서 뭔가 떠들어 대던 사내는 자신의 이야기에 미소를 지은 줄 알고는 더욱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천무진이 전음을 보냈다.
『아참, 오늘 저녁에 머무는 곳을 바꿀 생각이야. 짐 옮길 준비하라고. 혹시 나보다 먼저 도착하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미리 챙겨 두라고 해. 서둘러 옮기게.』
『어디로 가게요? 서류도 많은데 굳이 번거롭게 다른 객잔으로 옮기는 건…….』
『객잔이면 옮기자고 안 했지. 내가 아는 곳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그래요? 마침 잘 됐네요. 사실 객잔 생활이 영 불편했거든요.』
사람이 많은 성도의 객잔.
하루에 오가는 이들 또한 그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런 곳에서 계속 지내는 건 분명 불편한 일이었다.
대충 전음을 마무리하려는 그때 옆에 있던 방건이 목소리를 높였다.
"야, 밥 먹으러 가자니까."
다가온 손이 천무진의 볼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볼이 주욱 늘어나는 걸 보는 순간 백아린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로 웃음을 터트렸다.
"킥."
크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는 그때.
볼이 늘어난 그 상태 그대로 천무진이 백아린을 향해 재차 전음을 날렸다.
『……진짜 곧 죽일 거야.』
며칠을 머물렀을 뿐이거늘 객잔에서 챙길 짐은 산더미처럼 많았다. 물론 그 대부분은 적화신루를 통해 받아 온 서류 더미들이었다.
가장 먼저 객잔에 도착한 건 백아린이었고, 그 이후로는 천무진이, 마지막으론 한천이 돌아왔다.
거나하게 술을 마신 한천이 노래를 부르며 객잔으로 오다가 깜짝 놀랐다.
"왜들 거기 계십니까?"
짐을 다 마차에 실은 채로 바깥에 나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일행들을 발견한 탓이다.
그런 그를 향해 백아린이 짧게 말했다.
"주정은 그만 부리고 어서 타기나 해."
말을 마친 백아린이 마차에 올라탔고, 이미 안에는 천무진과 단엽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엽이 짜증스레 말했다.
"뭐 이렇게 늦어?"
"하하, 인맥 관리 좀 하다 왔지요. 그런데 이 짐들은 다 뭡니까? 저희 야반도주라도 하는 겁니까?"
"야반도주는 무슨. 거처를 옮기기로 했어."
백아린의 대답에 한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굳이 옮길 이유가 있습니까?"
아까 전 무림맹에서 전음으로 거처를 옮기자는 말을 했을 때 백아린이 했던 것과 비슷한 반응.
천무진이 대꾸했다.
"무림맹에서의 조사가 언제 끝날 줄 알고. 그때까지 객잔에서만 머물 생각이야?"
"물론 갈 곳이 있으면 가죠.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갈 만한 곳이……."
"있어."
천무진이 말을 딱 자르는 순간 마차 또한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천뿐만이 아니라 백아린과 단엽 또한 지금 자신들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상황.
단엽이 물었다.
"주인, 연무장은 있어?"
"몇 개는 있으니 걱정하지 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권갑을 어루만지며 히죽 웃었다. 오랫동안 제대로 몸을 못 풀었다며 계속 죽는소리를 해 대던 그였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아린이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랐는지 입을 열었다.
"연무장이 몇 개나 있을 정도로 큰 곳이라고요?"
"응, 무림맹과도 멀지 않아."
"대체 그런 곳이 갑자기 어떻게 생겼대요?"
"가 보면 알아."
천무진은 길게 이야기를 이어 가지 않고 대화를 끊었다. 그렇게 마차가 대략 이 각 정도 더 달렸을 무렵.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마차가 멈추어 섰다.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린 천무진이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앞에는 오래돼 보이는 장원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천무진이 거리낌 없이 열어젖혔다.
열린 문을 통해 드러난 내부는 휑했다.
정돈되어 있긴 했지만 사람이 사는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장원은 꽤나 넓었다. 집만 해도 몇 채는 있었고, 커다란 연무장과 곳곳엔 높은 나무들이 운치 있게 자리하고 있었다.
내부를 꾸며 놓은 연못과 높은 담장 등을 보았을 때는 마치 고관대작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노후를 보낼 법한 장소처럼 보였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기거해도 전혀 모자랄 것 같지 않은 커다란 장원.
천무진이 장원을 휘이 둘러볼 때였다.
재빠르게 따라 다가온 한천이 장원 내부를 보며 물었다.
"휘유. 크기도 그렇고 보통이 아닌데요. 대체 여긴 어딥니까?"
물어오는 한천의 질문에 천무진이 답했다.
"천룡성 비밀 거점."
"에엑!"
생각지도 못했는지 한천이 비명을 질러 댔다.
모든 것들이 감춰져 있는 천룡성, 그런 곳의 비밀 거점이라고 하니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백아린 또한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뒤에서 다가오며 물었다.
"이런 곳에 저희 같은 외부인을 받아도 되는 거예요?"
"뭐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긴 했는데 상관없어. 사실 이런 비밀 거점은 중원 곳곳에 있으니까. 그리고 이런 장소들에는 아무것도 없거든. 그냥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일 뿐이지."
중원에 퍼져 있는 수십여 개의 거점들 중 하나.
그리고 이곳은 그중의 하나인 성도 거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