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가짜 신분 ― 처음 뵙겠습니다 (2)
처음 보는 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욕설.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거다.
가까이 다가온 둘 중 하나가 천무진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도 눈깔에 힘주고 있는 거 봐라. 야, 정신 안 차리냐? 어디 새파란 신참 자식이."
말과 함께 손가락이 손바닥으로 바뀌었다.
팍.
거칠게 어깨를 치는 사내의 행동.
하지만 천무진이 느끼는 감정은 분노가 아닌 다른 것이었다.
‘……이건 뭐지?’
천무진은 당황스러웠다.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세상에서 그 누가 자신을 이처럼 막 대한 적이 있었던가.
하물며 그 상대가…… 이런 핏덩어리 같은 애송이라니.
실제 지금 이들과 천무진의 나이 차는 그다지 나지 않았지만, 한 번의 삶을 살아 본 천무진에게 아직 어린 티가 팍팍 나는 이들은 솜털조차 채 가시지 않은 햇병아리와도 같았다.
천무진보다 한 뼘 정도 작은 키.
그랬기에 바짝 다가온 둘은 아래에서 고개를 들이밀며 천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을 향한 천무진의 표정은 복잡했다.
‘마교 교주한테도 이런 대접을 받은 적이 없는데…….’
천룡성의 인물이자 과거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던 자신이다. 그런 그가 지금 갓 무림에 출두했을 것 같은 이들에게 손찌검을 당하고 있었다.
참으로 색다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기분은 더러웠지만.
천무진이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자 여태까지 옆에 서 있기만 하던 사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선배들이 말씀하시잖아. 뭔 반응이 이래?"
"겁먹어서 무슨 말을 못 하겠냐?"
천무진이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자 더 만만하게 보였는지 말투가 한층 거칠어졌다.
손 한번 휘두르면 나가떨어질 두 명이 귀찮게 들러붙어서 떠들어 대니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처치 곤란이었다.
너무도 간단한 상대. 그럼에도 천무진이 이토록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건 지금 자신의 상황 때문이었다.
괜한 마찰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역효과를 낳게 된다.
천룡성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어 가짜 신분까지 사용한 천무진이다. 그런 그였기에 어떻게든 눈에 띌 만한 일은 피해야만 했다.
누구보다 조용히 이곳 무림맹에서 조사를 하다 사라질 생각이었던 그가 아닌가.
그런 와중에 자신이 사고를 쳐서 주목을 받게 된다면 천룡성은 그렇다 쳐도 가짜 신분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컸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천무진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이런 같잖은 이들에게 시비의 대상이 되는 건 분명 불쾌한 일이다.
허나 우습게도 모욕적인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죽기 전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 이 상황에 보다 감정적 동요가 일었을 터,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고작 이 정도에 모욕감을 느끼기엔 천무진은 너무도 비참했던 삶을 살았다.
그 삶을 막아 내기 위해서라면…… 겨우 이 정도의 돼먹지 않은 도발 정도야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었다.
거기다가 방금 일기 시작한 소란으로 인해 홍천관 내부의 전각에서 한두 명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그들의 등장에 힘을 얻었는지 두 사내는 더욱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점점 보는 눈이 많아지는 걸 느낀 천무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귀찮게 됐군.’
더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기 전에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마무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천무진의 고민은 길어지지 않았다.
어찌해야 하나 잠시 생각에 잠긴 천무진의 모습에 자신을 무시한다 느낀 사내가 순간 주먹을 휘두른 것이다.
부웅.
주먹이 날아들었다.
사실 천무진에겐 이 날아드는 주먹에 맞아 주는 것보다, 곧바로 둘의 손목을 비틀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빨랐다.
피하는 것보다 맞아 주는 게 더 어려울 정도의 실력 차이.
하지만…….
퍽!
명치에 틀어박힌 주먹.
천무진은 괜히 아픈 척 허리를 굽혔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 한두 대 맞아 주는 걸로 자신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만 있다면 오히려 이쪽이 이득이다.
"이 자식아 어떠……."
둘 중 주먹을 내질렀던 사내가 신명 나게 목소리를 높이는 바로 그때, 허리를 굽힌 상태에서 힐끔 고개를 돌린 천무진과 두 사내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그저 눈빛을 마주했을 뿐이거늘 이상하게 전신의 털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두 사내가 절로 뒷걸음질 치려고 하는 순간 천무진이 빠르게 손을 뻗어 그들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는 걸 다른 이들에게도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천무진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제가 실례를 했다면 반성하겠습니다."
예의 바르게 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잠시 겁을 집어먹었던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색하게 표정을 풀었다.
아무것도 아닌 상대에게 괜히 움찔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도리어 한 사내가 호탕한 척 웃으며 천무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식, 이제야 좀 말귀가 통하네. 앞으로 조심해라. 알겠어?"
"까불면 다음엔 이 정도로 안 끝나니까 각오하고."
옆에 있던 사내도 덩달아 끼어들어 때리는 시늉을 하며 힘을 실어 주는 그때였다.
"적당히들 해. 막 들어온 신입한테 뭣들 하는 거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무진은 물론이고, 다른 두 사내 또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삼십 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에 다소 짧은 머리.
근육질의 몸에 다소 우락부락한 외모를 한 그는 바로 이곳 홍천관의 부관주 여청이라는 사내였다.
부관주의 등장에 두 사내가 옆으로 비켜서고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뭘 하긴요. 그냥 처음이니 이곳의 법도를 조금 설명해 주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어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에게 손찌검을 해서 쓰나. 앞으로 같이 지낼 동료에게 말이야. 그렇지?"
자신을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청이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에 천무진은 기가 찼다.
‘망할 자식, 위에서 다 보고 있던 주제에.’
천무진은 이미 주변의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말리러 나타난 여청 또한 위에서 재미있다는 듯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자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짐짓 이 상황을 혼내는 모양새가 우습기 그지없다.
천무진이 두 사람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그의 앞으로 다가온 여청이 천무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끄덕였다.
"키도 크고 잘생겼군그래."
"과찬이십니다."
"앞으로 함께 지낼 이들인데 조그마한 다툼 정도는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싹 잊고 앞으로 잘 지내도록 하게. 알겠는가?"
"그럼요. 벌써 잊었습니다."
천무진이 애써 감정을 추스르는 척 연기를 하며 답했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여청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아참, 오늘 들어왔으니 관주님께 보고를 해야 할 걸세. 저쪽에 있는 전각에서 대기하고 있게. 관주님이 오시면 연락이 갈 게야."
"알겠습니다."
몸을 돌린 여청은 슬쩍 고개를 갸웃했다.
‘……기우였나.’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기에 주의 깊게 살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어 보였으니까.
그렇지만 꼼짝없이 두 사람에게 맞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자신의 착각이었던 듯싶었다.
거기다가 정말로 당황스러워하는 눈빛까지.
연기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완벽했다.
여청이 옆에 있는 수하들에게 짧게 말했다.
"가자."
말을 마치고 그가 순식간에 홍천관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천무진을 멀리서나마 구경하던 이들도 곧 그에 대한 관심이 식었는지 빠르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혼자 남게 된 천무진이 맞았던 명치 부분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가 피식 웃었다.
‘잊으라고?’
솜방망이와도 같았던 우스운 주먹질이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조차 잊어 줄 생각은 없었다.
천무진은 결코 당한 걸 그냥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모두 갚아 줄 것이다.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린 것까지 모두 기억해서.
여청이 말했던 전각으로 터벅터벅 걸어간 천무진은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는 탁자와 간단한 용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천무진은 곧바로 앞에 놓인 종이와 붓을 쥐었다.
그가 종이를 펼치며 입을 열었다.
"하나라도 까먹으면 안 되지."
종이 위에 천무진이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종이에 적힌 건 간단했다.
명치 한 대, 어깨 한 대.
그리고 방금 그 둘의 외향을 묘사한 ‘못생긴 놈’, ‘야비하게 생긴 놈’이라는 글자까지.
천무진이 종이를 품에 넣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중에 딱 열 배로만 갚아 줄게."
* * *
천무진은 성도의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늦은 시각.
긴 시간 동안 무림맹에 있었던 그가 자신의 거처인 객잔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걸음을 걷는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비단 오늘 홍천관 입구에서 있었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다리면 만날 수 있을 거라 했던 홍천관 관주의 코빼기조차 보지 못해서다.
그 때문에 천무진은 조사는커녕 하루 종일 전각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내다 이렇게 거처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막 들어선 방에는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이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아린과, 중년의 사내.
그리고 그 중년 사내는 익히 아는 자였다.
무림맹 총군사 위지겸이었다.
위지겸을 보는 순간 천무진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자신의 신분을 만들어 준 것이 저자가 아니었던가.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위지겸이 천무진을 반겼다.
"하하, 오셨군요. 그나저나 오늘 무림맹은 어떠셨습니까?"
"어땠냐고 물은 겁니까? 더러운 꼴도 당하고, 조사도 못 하고 시간만 날렸습니다."
천무진이 기가 차다는 듯 되물었다.
되도 않는 두 사람에게 맞은 걸로 모자라, 전각에서 움직이지도 못해 의미 없는 시간만 보냈던 하루였다.
애초에 무림맹에 들어간 것이 양휴에 대한 조사를 직접 하고자 함이었는데, 이래서는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뭐 곤란한 일을 겪으셨다는 건 들었습니다. 거기 쪽 녀석들이 워낙 사고뭉치들이라."
"알면서 왜 굳이 그런 곳에 절 넣은 겁니까?"
"제 입장에서도 조금 더 편한 곳으로 드리고 싶었지요. 그런데 아시지 않습니까. 가짜 신분으로 한계가 있다는 건요."
가짜 신분으로 들어간 무림맹이다.
당연히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를 비롯한 꽤 커다란 문파 소속의 신분은 가질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자라면 이름과 얼굴이 알려졌을 확률이 컸으니까.
아무도 얼굴이나 이름을 모르는 신분이라면 당연히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자라는 것이고, 실력적으로 빼어난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당연히 그리 좋지 못한 곳으로 넣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많이 중요하지 않고, 주목도 덜 받는 곳으로.
물론 그런 걸 천무진 또한 모르는 바가 아니다.
알지만 굳이 이렇게 귀찮은 일들이 벌어지는 곳에 넣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남아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 그를 향해 위지겸이 말을 이었다.
"홍천관은 그리 주목을 받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법 많은 이들이 들어갔다가 포기하고 나가떨어지는 곳이기도 하고요. 나중에 나가실 때도 보다 자연스러우실 테고, 집단보다는 단독으로 많이들 움직여 개인적으로 시간을 쓰시기도 용이할 것 같아 그곳으로 넣어 드린 겁니다."
무림맹 입장에서 뒤처리가 편하기도 했지만 결론적으로 천무진을 위한 선택이었다.
천룡성을 돕기 위해 나서긴 했지만 무림맹주나 위지겸의 입장에서도 그의 존재가 가능한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무림맹의 맹주라고 해서 모든 이들이 그를 따르는 건 아니다.
천룡성과의 맹약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반맹주파는 맹주에게 흠집을 낼 수 있다면 어떠한 핑계를 대서라도 이 일에 딴지를 걸 게 분명했다.
양측 모두를 위한 선택, 그것이 바로 홍천관이었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했던 위지겸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결정적으로 지금 들어가신 홍천관이 쫓으시는 그자가 들어갔던 곳입니다."
"……그 말을 왜 이제 합니까?"
위지겸의 그 한 마디에 그나마 남아 있던 조금의 불만조차도 먼지처럼 사라졌다.
양휴가 한나절도 안 돼서 쫓겨났다는 그곳이 홍천관이었다니. 양휴를 조사하려는 입장에서는 최적의 장소로 배정된 것이었다.
표정이 풀어지는 천무진을 보며 위지겸이 웃으면서 말했다.
"원래 잔뜩 애를 태우다가 마지막에 중요한 말을 던지는 것이 교섭의 기본이지요."
"앞으로는 교섭이고 뭐고 바로 말해 주시면 좋겠군요."
"뭐 생각해 보지요."
싱글벙글 웃고 있던 위지겸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맹주님보다야 좀 여유가 있지만 저 또한 맹을 그리 오래 비워 두기는 힘들어서요. 거기다 객잔인지라 보는 눈도 많고요."
사실 위지겸의 입장에서는 이토록 대놓고 성도의 거리를 다니는 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조만간 자꾸 바깥으로 나가는 자신에게 반맹주파 쪽 감시의 눈길이 붙을 터이니 아마도 이렇게 대놓고 찾아오는 건 점점 쉽지 않아질 터.
그가 말했다.
"나머지 두 분은 방금 드린 신분으로 차례로 들어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시겠지만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말아 주시고요. 제가 막아 드릴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는지라……."
"네, 들어가세요."
백아린이 포권을 취하며 떠나가는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지고 왔던 죽립을 눌러쓴 채로 위지겸이 걸어 나갔고, 이내 방 안에는 천무진과 백아린 단둘만이 남게 됐다.
그녀가 아까 전 둘의 대화를 듣고 계속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곤란한 일이라뇨? 무슨 일 있었어요?"
물어 오는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은 빈자리에 가서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맞았어."
"네?"
백아린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을 때다.
그가 품 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서 탁자 한편에 툭 던졌다. 그녀가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건 뭐예요? 오늘 아무 조사도 못 했다면서요."
"아, 혹시라도 내가 놈들한테 맞은 횟수를 하나라도 빠트릴까 봐 적어 둔 종이야."
"그걸 왜 적어 둬요?"
당황스럽다는 듯 묻는 백아린을 향해 천무진이 입꼬리를 올리며 중얼거렸다.
"왜긴."
절대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듯 서랍을 열어 안에다가 그 종이를 넣으며 천무진이 말했다.
"빚을 졌으면 갚아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