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목적지 ― 제법 쓸 만하거든요 (1)
천무진은 밤새 홀로 적화신루에서 가져다준 서류를 살폈다. 세세한 모든 정보를 가져다 달라 부탁한 탓에 백아린의 말대로 정말 쓸데없어 보이는 것들도 많았다.
좋아하는 술이나 음식, 옷 취향에서부터 해서 말버릇까지.
그와 관련된 지인들에 대한 정보도 제법 많았고, 유년 시절에 있었던 일들도 꽤나 자세히 적혀 있었다. 그 모든 걸 확인한다는 건 생각보다 긴 시간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긴 시간 동안 서류들을 살피던 천무진이 갑자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허공에서 한 장의 종이가 날아와 그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하지만 이건 지금 이 방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현재 방 안에서는 많은 이들이 놀라 까무러칠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스스스스.
놀랍게도 수십여 장의 종이들이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전부 천무진이 벌인 일이었다.
허공섭물(虛空攝物).
손을 대지 않고 내력만으로 물건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초절정의 경지다.
게다가 하나가 아닌 수십여 개를 동시에 움직이는 건 그만큼 많은 내공과, 정교함을 갖춰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지금 천무진은 서류를 보면서도 허공섭물이라는 극강한 경지를 아무렇지 않게 넘나들고 있었다.
과거의 삶 덕분에 한층 더 발전된 실력을 뽐내는 천무진이었다.
긴 시간을 서류 더미와 싸움을 벌이던 그가 마침내 의자에 몸을 기대며 고개를 들었다.
"하아."
뻐근하다는 듯 가볍게 목을 움직이는 천무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살펴보고 고민해야 할 문제였지만 막상 이 많은 서류에서 그녀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서류의 삼분의 이 정도를 본 지금까지는 희망보다 막막함이 더 컸다.
‘역시 양휴 하나로 뭔가를 알아내는 건 무리였나?’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적화신루에게 의뢰하지 않고 양휴부터 시작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턱대고 그 모든 걸 한 번에 의뢰했다가는 지금 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서류 뭉치의 몇십 배는 될 정보들을 한 번에 받아야 할 것이다.
그 안에서 공통되는 뭔가를 찾기는 쉽지 않을 테고, 모든 걸 연결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자신이 죽여야만 했던 그 모두가 각자 다른 이유로 정체불명인 그녀의 표적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억지로 상황들을 끼워 맞추며 의문점을 찾아보기보다는 우선 시간의 순서에 따라 하나씩 자세히 살펴보고, 의심스러운 정황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심스러운 것이 그녀의 또 다른 부탁과 연결점이 있나 찾아보는 식으로 엉킨 실타래를 풀어 가려고 했다.
다만 문제는…… 그 실타래의 시작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꽤나 꼼꼼히 살폈고 딴에는 분명 의심스럽거나,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정보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백아린이 먼저 확인해 따로 추려 준 서류들이었다.
적화신루의 총관답게 백아린은 날카롭게 정보들을 분석해 분류해 놓았다.
덕분에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 정보만으로는 자신이 찾는 그녀와, 그들에 대해 알아내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다소 마음이 조급하긴 했지만 천무진은 최대한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애초에 양휴에 대한 정보 하나로 그들의 뒤를 잡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자료들 안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을 조금 더 찾아보고, 만약에 그럼에도 찾지 못한다면 우선은 다음 표적이었던 양가장에 대해 조사를 해 봐야 했다.
서류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천무진의 시선이 이내 따로 챙겨 두었던 한 장의 종이로 향했다.
백아린이 말해 준 그 정보가 적힌 종이.
양휴가 한나절 만에 무림맹에 들어갔다, 쫓겨났다는 그 사실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계속해서 거슬렸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단 말이지.’
무림맹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단체답게 들어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만큼 확실한 절차를 통해 선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토록 신중하게 뽑는 무림맹의 무인을 한나절 만에 쫓아낸다니…… 뭔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지간한 사고가 아니고서야 쫓아낼 이유가 없고, 들어간 지 한나절 만에 그 정도의 사고를 친다는 것도 이상하다.
말없이 서신을 들어 올려 내용을 살피던 천무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에 들어갔다 한나절도 못 돼서 쫓겨났다는 그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전부다.
수백 장이 넘는 서류 중 단 하나의 문장.
어쩌면 놓쳤을지도 모를 이런 정보를 찾을 수 있었던 건 백아린의 공이 컸다.
천무진은 말없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툭툭.
그는 턱을 괸 채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상념에 잠겨 있던 천무진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옆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방을 찾았다.
그가 문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봐, 들어간다?"
"그러세요."
백아린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천무진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았다.
"벌써 다 보신 거예요?"
"아니 아직. 한 삼분의 이 정도밖에 확인 못 했어. 그래도 그쪽이 중요한 정보를 분류해 준 덕분에 그나마 보는 게 한결 수월했어."
"도움이 되셨다면 다행이에요. 그나저나 밤을 꼬박 새신 거 같은데 식사는요?"
"아직. 그보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는데."
"뭔데요?"
"혹시 양가장이라고 알아?"
"양가장이요?"
되물었던 백아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한 문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는 정보 단체의 총관답게,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말씀하시는 게 섬서성에 있는 그 양가장이라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어요."
"다른 건 특별히 뭐 아는 거 없고?"
"네, 아쉽게도요."
그리 유명하지 않은 가문이었기에 백아린 또한 별도의 조사를 하지 않고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양가장은 왜요?"
"양휴와 무슨 관련성은 없나 해서."
"양휴와 양가장이요?"
사실 별반 알려지지도 못한 가문인 양가장과 양휴의 관계가 왜 중요한지 궁금했지만, 그것을 묻기 전 백아린은 퍼뜩 뭔가를 기억해 내고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녀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잠시만요!"
"왜 그래?"
"우선 서류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승낙이 떨어지자 백아린은 천무진과 함께 서둘러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쌓여 있는 수백 장의 서류 더미들.
백아린은 성큼 들어가 그것들 사이를 헤집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리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이 찾고자 했던 서류를 찾아냈다.
내용을 눈으로 훑던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백아린이 서류를 내밀었다.
"이거 보세요."
서류엔 수많은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서류의 내용을 자세히 보기 위해 천무진이 그녀의 옆으로 바짝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자신의 볼 바로 옆까지 고개를 들이민 천무진의 행동에 잠시 움찔했던 백아린은 이내 손가락으로 서류의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이에요."
섬서에 있는 양씨 가문과 먼 혈육 관계.
교류는 없는 편.
서류의 내용을 보는 순간 천무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리고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거 혹시……?"
"여기 적힌 양씨 가문이 양가장 아닐까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어둠.
그 어둠의 저 끝에 존재하는 가느다란 빛줄기 하나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양휴와 양가장, 성씨가 같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다. 세상에 같은 성씨를 지닌 이들은 많았고 양씨 성 또한 결코 특별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확인하지 못한 서류 내부에 있던 정보이기도 했지만, 사실 봤다고 해도 곧바로 양가장을 떠올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 양씨 가문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이 가리킬 수 있는 건 비단 양가장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이 양씨 가문이 양가장이라고 십 할 확신할 순 없다.
다른 양씨 성을 지닌 가문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걸 확실히 확인하는 건 적화신루의 몫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려는 찰나 백아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부를 통해 이 양씨 가문이 양가장인지, 아니면 여타의 다른 곳인지 확인해 볼게요."
자신이 말하기도 전에 생각을 읽어 내고 먼저 말을 꺼내는 모습에 천무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토록 어린 나이에 총관의 직책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리고 천무진은 또 하나 그녀에게 놀란 점이 있었다.
그가 물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기억하고 찾은 거지?"
이토록 많은 서류 더미 속에서 손쉽게 이 한 장을 찾아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넘길 법한 내용까지도 기억해 내고 있었다.
백아린에게는 아직 양가장에 대한 의뢰를 하지 않았으니 이 같은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하며 읽지도 않았을 터.
그 말은 곧 이곳에 있는 서류의 많은 부분을 이미 암기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심지어 그게 어느 곳에 적혀 있었는지조차도.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는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이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이 제법 쓸 만하거든요. 한번 본 내용은 거의 기억하는 편이에요."
한두 장도 아닌 수백 장에 달하는 서류들을 고작 하루 만에 읽고 대부분 기억한다니…… 쓸 만한 수준 정도가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양휴와 양가장, 그리고 무림맹.
양휴와 무림맹의 풀리지 않는 관계를 해결하기 위해 천무진이 물었다.
"혹시 양가장과 무림맹 사이에는 뭔가 연관된 게 없을까?"
"흐음, 글쎄요. 사실 양가장이 무림맹과 뭔가를 하기에는 너무 자그마한 곳이라…… 우선 이 부분도 신루에 의뢰를 해 봐야 정확히 알 것 같아요."
"그럼 말한 대로 이 서류에 적혀 있던 양씨 가문이 양가장이 맞는지 확인해 줘. 그리고 이왕 건드리는 김에 양가장에 대한 조사도. 그들과 무림맹 사이에 혹시 뭔가가 있는지도 알아봐 줬음 해."
"무림맹을 건드려야 하는 부분이라 시간이 조금 걸릴 거예요."
"얼마나?"
"확인은 해 봐야겠지만 이번 의뢰처럼 자세히 알아보려면 열흘은 필요해요. 아무래도 저희 위치가 운남성이다 보니 정보를 받는 데도 시간이 더 걸리거든요."
"열흘……."
사실 천무진은 이번 일을 끝내고 우선 천룡성의 본가로 돌아가려 했다.
애초에 본성을 나오며 가솔인 남윤에게도 오십 일 정도 걸릴 여정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열흘 정도라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천무진은 가지고 다니던 중원의 지도를 펼쳤다.
그의 눈이 지도에 그려진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목을 따라 천천히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천룡성의 본가가 있는 사천성에 이르러 멈추어 선 시선.
하지만 지금 천무진이 보고 있는 건 천룡성의 본가가 있는 자양이 아니었다.
이내 지도에서 시선을 뗀 그가 입을 열었다.
"성도로 가야겠어."
"성도요? 갑자기 그곳은 왜요? 거기다가 그곳엔……."
말을 하던 백아린이 갑자기 설마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물었다.
"혹시 지금 제가 생각하는 곳에 가려는 건 아니죠?"
"아니, 아마 맞을걸."
지도의 성도 부분을 슬쩍 곁눈질한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을 때는 고민만 하고 있기보다는 직접 알아보는 게 방법일 수도 있지."
백아린을 향해 시선을 돌린 천무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가자고, 무림맹으로."
* * *
마차는 쉼 없이 달렸다.
사천성에서 운남성으로 향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마부와 말을 바꿔 가며 목적지인 성도를 향해 움직였다.
그렇게 미친 듯 달려 마침내 도착한 성도.
마차가 멈추고 안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한천이 뛰어내렸다.
그가 바닥에 발을 대기가 무섭게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맙소사, 대체 얼마 만에 밟는 땅이람."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마구 비비며 죽는소리를 해 대는 한천의 뒤를 따라 내리던 단엽이 투덜거렸다.
"신명나게 싸우게 해 준다더니 이거야 뭐 마차타고 전국을 순회할 모양샌데. 어이, 주인. 나 속인 거 아니지?"
불만 가득한 단엽의 목소리.
그 순간 마차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속이긴 누가 속여."
말과 함께 천천히 바닥에 내려선 천무진이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멀리에 보이는 길고 커다란 담장.
무림맹이었다.
천무진이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 질리도록 싸우게 해 줄게."
그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멀리에 있는 무림맹을 응시하고 있는 바로 그때였다.
"저기요 죄송한데 좀 비켜 주시면 안 돼요? 무기가 워낙 커서 나갈 수가 없거든요."
마차의 입구에서 낑낑거리며 서 있던 백아린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