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단엽 ― 당연히 나지 (2)
영춘객잔.
백아린과 한천은 천무진과 만나기로 한 객잔에서 어제부터 자리하고 있었다. 언제 도착할지 모를 그를 기다리던 한천은 지루하다는 듯이 긴 하품을 했다.
의자에 걸터앉아 있던 그가 어깨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대로 튄 건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잖아."
백아린이 탁자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 뭉치 중 일부를 쥐고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게 여기 있는 한 그는 반드시 와."
탁자를 한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양의 서류들은 다름 아닌 천무진이 부탁했던 양휴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해서 알아낼 수 있는 모든 건 긁어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저 가볍게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하루 이상은 걸릴 정도의 양.
양휴에 대한 이 많은 서류들을 백아린은 밤을 꼬박 새며 확인했다. 천무진이 직접 보겠지만 그녀 또한 미리 한 번 그 내용을 살펴본 것이었다.
오랜 시간 정보 집단에 몸담고 있었던 것만큼 보는 눈 또한 보통 사람과는 남다른 부분이 있다 자부하기 때문이다.
백아린은 다 확인한 서류 중 일부는 따로 또 추려 놓았다.
직접 보고 뭔가 중요할 것 같은 건 재차 분류를 해 놓은 것이다.
분류한 서류에 다시 시선을 돌린 채 집중하는 그녀를 보며 한천이 대단하다는 듯이 물었다.
"허허, 어떻게 그리 하루 종일 종이 뭉치를 붙잡고 계실 수 있으십니까? 전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못 하겠던데."
"지금 그게 적화신루 부총관이 할 말이야? 우리한테 들어올 의뢰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맴도는데."
"걱정 마십쇼. 유능하신 우리 사총관님이 계신데요, 뭘. 설령 신루가 망해도 저 하나 못 먹여 살리시겠습니까?"
"누가 누굴 먹여 살려."
"당연히 대장인 분이 부하인 저를……."
스르릉.
갑자기 대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슬쩍 뽑아내는 백아린의 모습에 기겁을 한 한천이 손사래를 쳤다.
"취소요. 취소하겠습니다. 제가 미친 듯 일해서 대장을 먹여 살려야죠 하하."
"그만 떠들고 부총관도 이것 좀 확인해 봐. 뭐 특이한 거 있으면 따로 빼 두고."
"어휴."
쌓여 있는 서류를 들이밀자 한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내 백아린이 고개를 치켜들고 자신을 노려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급히 서류를 들어올렸다.
그가 서둘러 말했다.
"합니다, 지금 해요."
말과 함께 한천은 서둘러 서류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던 백아린 또한 이내 자신이 확인하던 내용을 재차 살폈다.
그렇게 약 반 시진 가까운 시간이 흘렀을 무렵.
지겹다는 듯 몸을 배배 꼬고 있던 한천의 귓가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기에 자연스레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고 있던 상황.
그런 그의 바람이 이루어졌는지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 이르러 멈췄다.
그리고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천무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뚫어져라 문 쪽을 응시하던 한천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하하! 오셨습니까, 천 소협.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격하게 환영하는 한천의 모습에 천무진이 슬쩍 옆으로 비켜서며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래?"
"왜긴요. 반가워서 그럽니다. 그런데……."
말을 하던 한천이 슬쩍 천무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눈치챘지만 헤어질 때와는 무언가 많이 변한 상황이었다.
가렸다고는 하지만 몸 곳곳에 다친 흔적이 역력하다.
그때 뒤편에 있던 백아린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황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다쳤어요?"
"조금?"
"어쩌다가요?"
"겨우 이 정도로 뭔 호들갑이야. 그냥 좀 긁혔어."
천무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린의 시선에 슬쩍 한 발을 뒤로 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겨우 긁힌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중얼거리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천무진의 뒤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다친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사내, 단엽이 말이다.
백아린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 상처 그쪽이 낸 거죠?"
"그런데 뭐? 난 안 보여? 나야말로 된통 당했거든?"
짜증난다는 듯 받아치는 단엽의 모습에 백아린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녀가 곧바로 대답했다.
"나이 차도 별로 안 나는 거 같은데 어디서 반말이야. 성 낼 거면 사람 잘못 골랐어."
"뭐야?"
눈을 부라리며 단엽이 앞으로 나서려고 할 때였다.
천무진이 자신을 스쳐 지나가려는 단엽을 손을 뻗어 막아섰다.
그가 짧게 말했다.
"시끄러워."
"치잇."
그 한 마디에 단엽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천무진을 따르기로 약속을 한 이상 불만까지 감추지는 못한다고 해도, 결국 명령은 착실하게 받아들이는 단엽이다.
그를 막아 낸 천무진이 이내 앞에서 덤빌 거면 해 보라는 듯 자세를 잡고 있는 백아린을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그쪽도 그만해. 해야 할 일도 있는데 쓸데없는 다툼으로 시간 잡아먹고 싶진 않으니까."
"그러죠."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백아린의 모습에 단엽이 천무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이 자식도……."
단엽은 곧 자신의 말실수를 느꼈는지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주인도 반말을 하는데 왜 나한테만 난리야?"
천무진에게 주인이라 말하는 단엽의 모습에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건 나중 문제였다.
백아린은 곧바로 답했다.
"이분은 의뢰인이고, 그쪽은 그냥 모르는 사람이잖아. 입 함부로 놀리고 싶으면 의뢰라도 하시든가. 물론 받아 줄지는 내가 정하겠지만."
단엽이 뭐라 하기 힘들 정도로 받아쳐 버리고 자리로 돌아가 앉는 그녀를 보며 단엽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단엽의 옆으로 다가간 한천이 웃는 얼굴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희 총관님이 한 성격 하시죠?"
"왜 갑자기 친한 척이야?"
단엽은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자 팍 인상을 구기며 손을 밀쳐 냈다.
그런 단엽의 행동에도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한천이 초승달처럼 휘어진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단엽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틀린 말씀을 하시는 분은 아니라서요."
"뭐?"
한천이 다시금 손으로 그의 구겨진 옷매무새를 다잡아 주고는 씩 웃어 보였다.
짧게 눈인사를 하며 한천이 말했다.
"그럼 저도 일을 해야 돼서 이만."
말을 끝낸 그가 천무진과 함께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백아린에게 다가갔다.
폭풍처럼 한 방씩 먹이고 멀어져 버린 둘을 바라보던 단엽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자신이 누구던가.
어디 가서 당하고 있는 건 적성에 안 맞았다.
그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너희들 미리 경고하는데 잘 들어. 나 나쁜 놈이야. 엄청나게 나쁜 놈이라고. 알아?"
"너 나쁜 놈인 거 알겠으니 조용히 좀 해. 시끄러우니까."
백아린이 슬쩍 바라보며 받아쳤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단엽이 막 폭발할 것처럼 주먹을 움켜쥐는 바로 그때였다.
툭.
아래로 내린 백아린의 소매에서 노란 옥수수 알갱이가 떨어졌고, 이내 그 뒤를 따라 다람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떨어진 알갱이를 줍기 위해 치치가 소매에서 잠시 빠져나온 것이다.
재빠르게 옥수수 알갱이를 쥔 치치가 뺏기지 않으려는 듯 입가에 그것을 밀어 넣었다.
반 정도 남은 옥수수 알갱이를 쥔 채로 오물거리는 치치를 발견하는 그 순간, 움직이는 것도 멈춘 단엽의 입가가 씰룩였다.
물끄러미 치치를 바라보는 단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단엽의 시선을 느껴서일까?
옥수수 알갱이를 먹으며 치치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단엽이 바닥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치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이 녀석…… 치명적인데."
* * *
방해가 되는 단엽과 한천을 내보내 버리자 방 안에는 천무진과 백아린 단둘만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비를 걸며 길길이 날뛸 때는 언제고 갑자기 치치를 보자마자 넋 빠진 사람처럼 실실거리며 웃어 대던 단엽의 행동 때문이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구경을 해 대는 통에 백아린은 방해가 된다며 두 사람을 거의 쫓아내다시피 했다.
방금 그 사내가 누군지 묻고 싶었지만 그보다 천무진의 질문이 빨랐다.
"휴우, 어마어마하군. 이게 다 양휴에 대한 정보야?"
"네, 구할 수 있는 정보란 정보는 싹 긁어모은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사실 필요 없는 자료들도 꽤 많지만 혹시 몰라서 모두 다 챙겨 왔어요."
"고생했어. 그래도 믿고 맡긴 보람이 있네."
사실 이 안에 자신이 찾는 뭔가가 있을지, 그리고 그걸 찾아낼 수 있을지 자신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이 많은 정보를 구해 온 적화신루의 능력이 자신의 기대만큼은 되는 것 같아 천무진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천무진이 앞에 놓여 있는 서류 뭉치 중 하나를 꺼내어 들 때였다.
그녀가 말했다.
"아, 그리고 미리 말씀을 드려야 할 거 같은데 제가 미리 정보를 한번 대충 확인해 봤어요. 혹시나 뭔가 단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이 많은 걸 전부?"
"네, 죽어라 보니까 끝나긴 하더라고요. 보고 대충 분류를 해 두긴 했는데…… 저기 탁자 구석에 쌓여 있는 것들이 그나마 뭔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들이고 나머지는 정말 사소한 정보들이에요. 물론 사소하다는 건 당장의 제 판단이니 그냥 넘기라는 건 아니고요."
천무진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백아린은 작은 정보라도 그냥 넘기지 말라 당부했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시기 전에 도움이 될까 해서 미리 건드리긴 했는데 혹시나 제가 먼저 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말씀해 주세요. 앞으론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요."
사실 이 정보 자체가 적화신루를 통해 얻은 것들이다. 굳이 자신에게 주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해도 이 안의 내용을 확인하는 건 그녀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를 해 주니 천무진은 적화신루의 일 처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괜찮아. 한번 걸러 준 덕분에 살펴보기도 더 수월하고."
천무진은 쥐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그녀가 따로 분류해 두었던 쪽의 것을 집어 들었다.
전부 다 살필 생각이긴 했지만 우선 중요한 것부터 보고 자잘한 걸 살펴야 뭔가를 놓칠 확률이 조금이나마 낮아질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중요한 정보를 알아야, 자칫 의미 없어 보이는 행동이 가진 진짜 이유를 찾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류를 바라보는 천무진을 힐끔 쳐다본 백아린이 이내 자신이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방금 함께 온 그 사람이 전에 만나려고 한다는 그 당사자 맞죠?"
"맞아."
"그 부상도 저자가 낸 거 같던데……."
"살짝 긁힌 정도라니까."
"그 정도가 긁힌 거면 팔 한쪽 정도는 잘려야 어디 가서 다쳤다 말하고 다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백아린의 말에 천무진은 서류를 보다 픽 웃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단엽과의 격한 싸움 때문에 아직도 몸 곳곳이 아프고, 뻐근한 상황이었으니까.
천무진이 말을 받았다.
"그래도 저 정도 녀석을 꺾는 데 이 정도면 긁힌 정도가 맞아."
"대체 누군데요?"
사실 시간을 들여 정체를 캐내려고만 하면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허나 그 상대의 정체를 아는 이가 눈앞에 있으니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서류를 살피던 그가 가볍게 대꾸했다.
"단엽."
"……누구요?"
백아린의 눈동자가 커졌다.
듣지 못해 되묻는 것이 아니다.
생각보다 상대가 너무나 큰 거물이었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재차 묻고야 말았다.
그녀의 반응을 살핀 천무진이 말을 받았다.
"단엽이라고. 들었잖아."
"대홍련의 부련주 단엽이요?"
"뭐 그렇지. 지금은 부련주긴 하더군."
자신이 알던 저번 생에서의 단엽은 대홍련의 련주였지만 지금은 그보다 꽤나 과거니 아직은 수장의 자리에 오르기 전이었다.
대홍련.
사파를 대표하는 가장 커다란 네 개의 세력 중 하나.
운남성을 주요 거점으로 삼고 있으며, 소속된 무인 대부분이 싸움을 즐기는 호전적 성향을 지닌 이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사파의 거두인 대홍련 소속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단엽이라는 인물 자체 또한 보통의 무인이 아니었다.
아직 이십 대의 어린 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사파 최고의 기재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그가 아니던가.
단엽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백아린이 말했다.
"대홍련의 부련주 단엽에게 주인 소리를 듣고 있다니…… 그쪽도 보통이 아니네요."
천룡성의 인물이라는 것을 제외하곤 아직 천무진에 대해 아무런 것도 알지 못하는 백아린이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눈썰미로 대략적인 실력을 가늠하던 상황, 그런데 단엽을 이토록 끽소리 못 하게 꺾어서 끌고 다닐 정도라면 과연 이 사내의 실력은…….
사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갑자기 꼭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며 찾아간 이가 다른 이도 아닌 단엽이라니.
왜 그가 필요했던 것인지부터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백아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엽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주고받은 이후 찾아온 적막.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천무진의 모습에 자리를 비켜 주기 위해 슬쩍 몸을 일으켜 세우던 백아린이 퍼뜩 뭔가가 생각났는지 입을 열었다.
"아참,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천무진은 서류에서 눈을 떼고 그녀를 응시했다.
"이상한 거라니? 뭐 찾은 거라도 있어?"
"딱 한 줄의 정보고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눈에 걸려서요."
"눈에 걸리던 게 뭔데?"
물어 오는 천무진을 향해 백아린은 자신이 의아하게 여겼던 사실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 사람 무림맹 소속이었던 적이 있어요."
"그게 왜?"
정파를 대표하는 무림맹이라는 단체에 들어가는 건 무인으로서는 분명 명예로운 일이고, 특별한 일인 건 사실이다.
허나 무림맹에 들어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상하다니?
그게 무슨 문제냐 물어 오는 천무진을 옆에 둔 채로 백아린은 서류 더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것에 대한 것이 적혀 있는 서류를 끄집어내서 천무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말했다.
"쫓겨났거든요."
백아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천무진을 향해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그것도…… 고작 한나절 만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