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왕-5화 (5/293)

5화. 동행 ― 저희가 필요할 겁니다 (2)

천무진의 설명만으로는 대체 누구를 만나려 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는 반드시 운남으로 가려고 한다는 거다.

천룡성과의 인연을 이어 나가야만 하는 백아린의 입장에서는 곤란할 수밖에 없는 상황.

머리를 감싸 안은 채로 고민하는 백아린을 바라보던 한천이 퍼뜩 뭔가를 떠올렸는지 물었다.

"운남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그거까지 말해 줘야 해?"

천무진이 표정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정보 단체 중 그나마 믿을 만하다 여기고 적화신루에게 연락을 취하긴 했지만 자신의 모든 걸 드러낼 이유는 없었다.

천무진은 이전의 삶에서 당한 게 너무도 많았다.

가시를 세우며 쏘아붙이는 천무진의 한 마디에 한천이 너털웃음을 흘리며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혹시 운남의 남쪽이나 서쪽으로 가시는 거면 일정이 조금 꼬이시지 않을까 염려가 되어서 드린 말씀입니다."

"꼬이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천무진이 묻는 그 순간 백아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지금 한천이 한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녀가 빠르게 말을 받았다.

"새외 세력과 그 인근에 있는 녹림도들이 결합하여 날뛰고 있거든요. 관도를 따라 넓은 지역을 관군들이 엄중히 관리하고 있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금 운남성 서쪽과 남쪽은 허가증을 발급 받아야만 드나들 수 있어요."

"허가증? 그건 어디서 구하는데."

"당연히 관부에서 구하죠. 그런데 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며칠은 기다리셔야 할 거예요."

며칠이나 걸린다는 말에 천무진은 당혹스럽다는 듯 물었다.

"아예 길목을 다 막은 건가?"

"아뇨, 운남의 서쪽과 남쪽으로 가는 모든 길을 막기엔 무리가 있으니 빈 길목은 꽤나 많아요. 그런데 아무래도 산길이나, 돌아가는 길이라 시간이 곱절 이상은 걸리겠죠. 관도를 이용하실 생각이셨다면…… 아마 생각하신 날짜에 도착하시긴 힘들 거예요."

말을 내뱉은 백아린은 슬쩍 천무진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반쯤은 도박이었다.

천무진이 가려고 하는 목적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상황, 만약 애초부터 관도가 아닌 외지로 향하는 다른 길을 선택할 생각이었다면 지금의 수는 먹히지 않을 테니까.

허나 백아린은 승산이 있는 도박이라 여겼다.

자신들이 만난 이곳 서창.

이곳은 관도가 이어져 있는 길목이었고, 그렇다면 그 관도를 따라 운남으로 가려고 했을 확률이 높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생각은 맞았다.

"골치 아프게 됐군."

천무진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백아린은 한천에게 전음을 날렸다.

『잘했어!』

『대장의 부하가 이 정돕니다. 하하!』

사실 관도를 지키는 관군들을 뚫고 길을 지나가는 건 천무진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된다면 시끄러워질 것은 자명한 사실.

자신이라는 존재를 최대한 감추고 움직이려는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그리 내키지 않는 결정일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던 천무진은 자연스레 백아린에게 도움을 청했다.

"뭐 방법 없겠어? 늦으면 다시 만나기 조금 까다로울 것 같아서 말이야."

"흐음, 글쎄요.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말을 하며 백아린은 슬쩍 한천에게 곁눈질을 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을 받았다.

"제가 관도를 막고 있는 관군 중 길을 열어 줄 만한 이를 하나 압니다."

"그게 가능하겠어?"

"예, 가장 큰 관도는 아무래도 인맥으로 넘어가기 빡빡하지만 제가 아는 길은 그곳과 그리 멀리 있지 않은데도, 크지 않아 이야기만 잘하면 어렵지 않게 지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제가 직접 가야 한다는 건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은근슬쩍 동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내비쳤고, 백아린이 그의 말에 힘을 보탰다.

"부총관의 생각이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요. 동행하게 되면 요청하신 정보도 빠르게 확인하실 있을 테니까요. 추가적인 요청도 곧바로 처리할 수 있고요."

둘의 말에 천무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애초에 적화신루의 사람들과 동행을 하고자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자신이 의뢰했던 양휴에 대한 정보를 받고 우선 이곳을 떠나 다음 목적지인 운남으로 가려 했던 그다.

그렇지만 정보를 받으려면 칠 일이나 걸린다는 말에 처음부터 계획이 어그러졌다.

지금 상황이라면 운남까지 갔다가 정보를 받기 위해 다시 이곳으로 와 조우해야 했다.

다음 의뢰를 한다 해도 양휴에 대한 것을 확인한 이후에나 가능한 상황, 다시금 긴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많은 천무진의 입장에서는 분명 비효율적인 상황이었다.

잠시 고민은 했지만…….

천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어차피 한동안 의뢰를 해야 할 게 좀 있을 거 같거든."

이번 정보를 시작으로 자신이 찾아야 하는 그들에 대해 많은 걸 알아내야 하는 천무진이다.

한동안 이들에게 많은 의뢰를 하며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니 지금 백아린의 말대로 오히려 동행하며 계속적으로 의뢰를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승낙이 떨어지자 일순 백아린의 얼굴이 몰라볼 정도로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혹여나 천무진의 마음이 바뀔세라 급히 물었다.

"언제 떠날 생각이시죠?"

"난 여기서 할 일은 끝났어.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겠는데? 그쪽 일정은 어때?"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그럼 바로 마차를 준비할 테니 짐 챙기신 후, 이쪽과 연결된 길목에서 뵙도록 해요."

말을 마친 백아린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객잔을 박차고 나가는 그녀의 뒤를 한천 또한 서둘러 쫓았다.

누가 쫓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둘러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천무진은 나머지 식사를 하기 위해 젓가락을 들다가 움찔했다.

자신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두 개의 소면 그릇 때문이었다.

"어이!"

뒤늦게 천무진이 두 사람을 불렀지만 이미 그들은 객잔을 나가 멀리 사라진 이후였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이긴 했지만 얼결에 두 사람분의 것까지 뒤집어쓰게 된 상황에 천무진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남은 소면을 후루룩 먹은 천무진은 이내 품에서 전낭 주머니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이거 뭔가 당한 것 같은데."

객잔과 연결된 길목을 나온 천무진은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마차를 발견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의 외향은 평범했다.

크기는 조금 컸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문양 하나 없는 어디서나 볼 법한 그런 종류의 마차였다.

아마도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범한 마차를 준비한 모양이다.

천무진이 나타나자 마차에 기대어 서 있던 백아린이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

"이쪽이요!"

자신을 부르는 백아린과 그를 따르는 한천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 천무진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전취식이 취미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전 금전 관계 엄청 깔끔한 사람입니다만?"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백아린의 모습에 천무진이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됐어, 우선 타지."

말을 마친 그가 먼저 마차에 올랐고, 곧바로 백아린이 따라 들어섰다. 그녀는 긴 대검이 불편했는지 다소 엉거주춤한 자세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이내 백아린은 등 뒤에 걸고 있는 대검을 옆으로 눕혔다. 워낙 무기가 큰 탓에 똑바로 세워 뒀다가는 당장이라도 마차의 지붕을 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으라차."

뒤이어 마차에 올라탄 한천이 힘든 시늉을 하며 걸터앉았다.

천무진은 자신의 옆에 바짝 붙어 앉는 한천을 보며 표정을 찡그렸다.

"저쪽에 앉지?"

"어휴,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저 대검 때문에 저기 앉으면 저는 엉덩이의 반 정도가 공중에 떠 다녀야 한다고요."

"그건 그쪽 사정이고."

"야박하게 그러지 맙시다. 한동안 함께 다녀야 할 사이 아닙니까, 하하!"

"……벌써부터 후회가 좀 되는데."

천무진이 턱을 괸 채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 있는 백아린이 물었다.

"출발할까요?"

"마음대로 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가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출발해 주세요!"

외침과 함께 가만히 서 있던 마차가 조금씩 속력을 내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운남성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는 적막만이 가득한 상황.

서창을 벗어나 이제는 인적이 드문 관도를 달리고 있는 그때, 창밖을 보고 있는 천무진의 옆얼굴을 백아린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함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게 됐지만 사실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를 바라보던 백아린이 문득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강할까?’

천룡성의 전설은 무인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쪽에 관심만 있다면 일반인이라 해도 대부분이 알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다.

그들의 엄청난 무위는 오랜 시간 전설처럼 회자되었고, 언제나 강호를 지켜 내는 신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로만 전해 듣던 대상이 지금 눈앞에 있다.

특출한 외모와 묘한 분위기를 지니고는 있지만 그거 말고는 아직 아무런 것도 알 수 없다. 과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백아린은 천무진이 궁금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천무진이 슬쩍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할 말 있어?"

그의 물음에 백아린이 답했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어서요. 어릴 때부터 천룡성에 대해서는 정말 귀에 딱지가 질 정도로 들었거든요. 그 믿을 수 없는 전설이나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요. 그래서 조금 궁금하네요. 정말로 제가 들어 왔던 그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정파와 사파, 그 어디의 편도 아니고 강호를 혼란스럽게 하는 세력이 나타났을 때 귀신처럼 모습을 드러냈다가 모든 일들을 해결하고 다시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전설의 문파.

백아린의 질문에 천무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글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허구일지 그게 궁금한가 보군."

"네, 사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워낙 많아서요."

눈을 빛내며 묻는 그녀를 바라보던 천무진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안됐지만 대답은 안 해 줄 거야. 스스로 밑천을 다 드러낼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정보를 알아내는 거, 그게 그쪽 일 아닌가? 능력이 된다면…… 그것도 한번 알아내 보든지."

"흐음, 그런 식으로 나오시겠다 이거군요. 그래요.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이왕 말이 나온 거 어디 한 번 힘닿는 데까지 최대한 알아보죠."

"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천무진이 해 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두 사람의 짧은 대화가 오가고 이내 마차 안엔 다시금 적막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 적막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크어엉."

한천의 커다란 코 고는 소리가 마차 안을 가득 채웠으니까.

* * *

사천성 서창에서부터 달리기 시작한 마차가 어느덧 운남성에 들어서 목적지가 있는 남쪽 인근에 도달했다.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마차의 말과, 마부를 바꿔 가며 달렸다.

잘 닦인 관도를 통해 움직였기에 마차만으로도 생각보다 편한 이동이 가능했다.

운남성의 남쪽 지역으로 향하는 관도의 길목으로 들어서자 확실히 주변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지나가는 곳곳마다 관군으로 보이는 이들이 보였고, 점점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민 한천이 마부에게 말했다.

"곧 왼쪽에 작은 길 하나가 나올 텐데 그쪽으로 가 주게."

가장 큰 관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많은 숫자의 관군들이 있었고, 한천은 그런 그들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몇 번이고 길을 꺾어 가며 어딘가로 일행을 안내하고 있었다.

마차 안에서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는 천무진이 불안한 듯 물었다.

"정말 당신 말대로 간단히 지나갈 수 있는 건 맞아?"

"속고만 사셨나. 믿어 보시죠."

말과 함께 한천은 엄지와 검지를 말아 동전 모양을 만들어 내고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크크크.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제가 옛날부터 술값이니 뭐니 이걸 무지하게 먹여 놨거든요. 거기다가 약점도 하나 쥐고 있으니 제 부탁을 절대 거절 못 할 겁니다."

자신만만한 모습에 천무진 또한 더는 할 말이 없어 그저 두고 보겠다는 듯 목적지에 도달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샛길로 들어서고도 한참을 달려가던 중 마침내 관군들이 진을 치고 있는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레 마차의 속도가 줄어들었고, 마찬가지로 이쪽을 발견한 관군들 또한 다가오고 있었다.

관군 중 하나가 소리쳤다.

"멈추시오! 이곳은 통행 제한 구역이니, 통행증을 제시하시오!"

관군들이 길을 막아서자 백아린이 반대편에 앉아 있는 한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갔다 와.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그야 당연하죠. 제가 잘 마무리 짓고 오겠습니다, 대장. 하암, 그럼 슬슬 가 볼까."

길게 기지개를 켠 한천이 문을 벌컥 열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고는 이내 관군들을 향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고생들 하는군그래. 자네들 같은 관군이 있으니 백성들이 발 편히 뻗고 자는 것 아니겠는가."

갑작스레 친근하게 다가오는 한천의 모습에 일순 당황했던 관군들이었지만 그들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창을 앞으로 밀었다.

"더 다가오지 마시오! 쓸데없는 소리 말고 통행증을 제시하거나 없다면 썩 물러나시오."

거칠게 대답하는 관군들을 향해 한천이 뭔가 더 말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무슨 소란들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염소수염의 사내였다. 그가 화가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감히 여기가 어딘지 알고 소란들을 떠는 것이냐! 국법으로 엄히……."

"어이, 이보게! 곤오붕, 날세."

다가오던 염소수염의 사내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한천의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그제야 소란의 주범을 확인한 곤오붕이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그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황급히 달려왔다. 곤오붕은 곧바로 한천을 데리고 마차 뒤편으로 끌고 가서는 속삭였다.

"아니 연락도 없이 찾아오면 어째!"

"하하,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연락할 틈이 없었다네. 급히 좀 여길 지나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말이야…… 부탁 좀 하지. 조용히 길 좀 열어 주게."

"내 말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급해도 갑자기 이러면 곤란하다고."

"세상사 급한 일이 다 갑자기 벌어지지 예고하고 벌어지던가?"

"그, 그건 그렇지만……."

"어허. 사내가 이리 담이 작아서야 쓰는가. 우리 하나 보내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자네만 그냥 입 꽉 닫아 주면 우리도 좋고, 자네도 좋고 아무런 일도 없고 모두 행복한 일 아니겠는가."

어깨를 툭툭 치며 한천이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며 곤오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한천이 이곳에 찾아온 이상 자신이 어떤 핑계를 갖다 붙여도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고 말 것이라는 걸.

곤오붕이 다짐하듯 말했다.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야! 알겠지?"

"물론이지. 진짜 딱 이번만."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하는 한천을 보며 곤오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마지막이라는 말을 골백번은 한 것 같았지만…….

지켜지지 않을 약속이라는 걸 알면서도 곤오붕은 울며 겨자 먹기로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마음을 정하고도 못내 내키지 않는지 곤오붕이 투덜거렸다.

"에이씨, 이거 진짜 안 되는 건데."

거칠게 머리를 막 헝클어트리던 그가 이내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로 마차 앞으로 걸어 나왔다.

곤오붕이 수하들이 있는 쪽으로 헛기침을 해 댔다.

"험험."

관군들이 막고 있는 쪽으로 다가간 곤오붕이 수하들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야, 열어 줘."

"통행증 확인은 하고……."

"내가 그것도 확인 안 하고 보내 줄 것 같아? 확인 했으니까 보내 주라고."

말을 내뱉었던 곤오붕은 자신을 향한 수하들의 마뜩지 않아 보이는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버럭 소리쳤다.

"받았다고 이 자식들아! 한 명씩 확인시켜 줘? 응? 그래야 믿을래?"

그는 품 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어 들고는 가장 앞에 있는 수하의 면전에 대고 마구 흔들어 댔다.

"아닙니다!"

화를 내는 상관의 모습에 이구동성으로 수하들이 대답했다. 그제야 씩씩거리던 숨소리를 멈춘 곤오붕이 빨리 열어 주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자 관군들은 길목을 막기 위해 놔뒀던 상자들을 황급히 옆으로 치우고는 자신들도 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 줬다.

관군들이 소란스러운 틈을 타 다시금 마차로 돌아온 한천이 막 관군들 사이를 지나가며 창문 바깥으로 인사를 던졌다.

"여, 나중에 보자고."

한천의 인사에 곤오붕은 고개를 돌린 채 됐으니 빨리 가라는 듯 손짓했다.

관군이 길을 터 준 덕분에 마차는 손쉽게 관도를 통해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시금 달리기 시작한 마차는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백아린이 만족스럽다는 듯 맞은편에 있는 한천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는 말했다.

"잘했어. 혹시나 통과하더라도 시간이 좀 걸릴까 염려했는데 이렇게 말 몇 마디에 될 줄은 몰랐네. 그 동안 술 먹으면서 쓸데없이 돈만 축내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허어, 대장! 당연히 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그에 대비해 어쩔 수 없이 저런 자들과도 술을 먹고 그런 것이지요. 절대 제가 좋아서 마신 게 아닙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시던가. 어쨌든 이번엔 부총관의 그 술친구 인맥이 꽤 도움이 됐네. 제법이야."

"하하! 제 인맥이 보통은 아니죠."

좋다는 듯 웃고 있는 한천을 바라보던 천무진이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저자가 그쪽 돈을 받은 건 그렇다 치고, 약점은 뭔데?"

천무진의 질문에 한천이 짧게 답했다.

"그게 약점입니다. 돈을 받은 거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이 줬다면서? 그걸로 협박을 한다고?"

"사실 저 친구는 그 돈을 제가 준 건지 모르거든요."

씩 웃으며 내뱉는 그의 말에 천무진은 설마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천무진의 표정에서 생각을 읽어 냈는지 한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맞습니다. 지금도 그 돈이 저희 쪽에서 나간 게 아니라 다른 상계와 관련된 곳에서 받은 뒷돈이라 알고 있지요. 한 마디로 저 친구는 제가 그 비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 알지, 제가 그 돈을 준 당사자라는 건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다른 사람을 통해 돈을 주고, 그걸로 약점을 잡았다?"

"그렇지요. 물론 다른 쪽을 통해 흘려 보냈던 뒷돈으로 약점을 만든 이후에는 원만한 관계를 위해 제가 직접 그에게 필요한 정보나 술값 정도 좀 쥐여 줬죠. 인간관계라는 게 무조건 누르기만 해서는 결국 엇나가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멋대로 굴지 못하게 최소한의 약점은 잡고 있되 그 이후로는 적당한 대접을 좀 해 주면서 지금까지 이런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요."

지금 한천과 곤오붕의 교분과 같은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상황이 있다.

하나는 이득, 다른 하나가 약점이다.

허나 이 두 가지 중 하나만으로 사람을 움직인다면 결국 언젠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득만으로 형성된 관계라면 결국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가 오겠다 싶은 순간에 발을 빼기 쉽고, 반대로 약점만을 지니고 흔든다면 상대에게 감정이 좋지 않을 테니 결국 언제든 뒤통수를 칠 기회를 노리게 된다.

그랬기에 한천은 언제나 두 가지를 모두 상대가 가질 수 있게끔 만들었다.

이득과 약점.

두 가지가 뒤섞이면 하나만을 취했을 때보다 훨씬 더 쥐고 흔들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익숙하게 설명을 이어 가는 한천의 모습을 보던 천무진이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보아하니 이런 식으로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군."

"흐음, 글쎄요. 몇이나 되더라."

손가락으로 꼽는 시늉을 하던 한천은 결국 어깨를 으쓱했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많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다.

약속대로 운남의 남쪽으로 향하는 길목을 텄다는 사실에 신나 떠들어 대던 한천은 이내 뭔가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변명을 해 댔다.

"아, 그래도 오해는 마시죠. 약점을 잡고 있긴 하지만 이건 그들과의 관계를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뿐이지, 그걸로 뭐 어떻게 한다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서둘러 둘러댔지만 그게 먹힐 리 만무했다.

맞은편에 있는 백아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포장해 봐야 뭐하나. 누가 봐도 협잡꾼인데 뭘."

"혀, 협잡꾼이라뇨! 진짜 오해십니다."

절대 아니라는 듯 소리쳐 대던 한천이 이내 천무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마치 어서 아니라고 해 달라는 듯한 시선에 천무진은 무심히 말했다.

"글쎄. 일반적으로 옳지 않은 방식으로 남을 속이는 걸 협잡꾼이라고 하지 아마?"

"그렇죠. 역시 뭘 아시네."

곧바로 맞장구치는 백아린의 모습에 한천은 가슴을 두드리며 비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빠르게 통과했다고 그렇게 좋아하실 때는 언제고. 역시 사람은 뒷간을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가 다르다고 하더니……."

억울하다는 듯 마차의 지붕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백아린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최근 들어 사건 사고가 가득한 운남성의 남쪽 지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