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단리평의 충고
재빠르게 평정심을 회복한 천야홍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순간 사라졌던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다시 피워 오른다.
“그렇소이다. 한데 말이요. 하하. 나와 내 동료는 소원을 풀었소이다. 영생하게 되었으니까…….”
주성진은 그제야 그가 미소 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강시가 되는 게 그렇게 좋은 거요?”
“그게 뭐 어때서요? 나는 나인데… 기억도 사라지지 않으니 문제될게 있겠소? 다만 원수 같은 저년들과 같이 지낸다는 게 좀 불편하지만, 뭐 그런 감정도 강시로 변하면 서서히 사라질 거요.”
천야홍은 하오문의 후예답게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아 참, 백강시들은 어떻게 되었소?”
“모두 파괴되었소.”
“음, 그렇구려, 한데 왜 저들을 싫어하는 거요? 저들이 파훼법을 탈취해 갔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그게 없어도 여기에 들어 올 수 있지 않소이까?”
천야홍은 순간 고개를 돌려 여자 자객들을 노려보더니 말문을 열었다.
“나는 손해 보는 것을 아주 싫어하오. 그래서 그렇소이다. 그럼 나도 한마디 해도 되겠소이까?”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이오, 뭐든지 말해보시오.”
“그대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오. 하지만 말이오. 길을 예로 들어봅시다. 길이란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었단 말이오. 한사람이 다니고, 두 사람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다니다 보면 그곳이 길이 되는 법이오.”
“…….”
“언제 가는 말이오. 내가 가는 길이 새로운 길이 될 것이고, 세상 사람들은 나를 추앙할 것이오. 내가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주성진은 그의 말이 궤변 같아 보였지만, 달리 생각해보니 타당해 보이기도 했다.
‘음…….’
“잘 알겠소. 한데 그대와 그대의 조상들이 배가 아플 일이 있소이다. 수호대장의 말에 의하면 우연히 진으로 들어온 자들을 모조리 강시로 만들었다고 하더이다. 하하.”
“이런… 정말이오? 그동안 연구하느라 얼마나 개고생했는데, 음 그대의 말처럼 이거야말로 배 아플 일이구려.”
주성진은 천야홍의 손을 잡았다.
“잘 사시오, 나는 이만 가리다.”
“잘 가시오!”
천야홍에게 멀어진 주성진과 일행들은 비급인지 그냥 책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책들이 있다는 서고를 향해 갔다.
물론 두 구의 강시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다.
쉭, 쉭!
한데 도중에 무공을 펼치고 있는 일단의 무리를 보인다.
주성진은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급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은 몹시 떨리고 있었다.
‘분명 저들의 복식은 그림으로 보았던 형산파의 그것이다.’
주성진은 고개를 돌려 가문호를 바라보았다.
“저들은 누구요?”
“아. 저들은 우연히 들어왔던 자들이오, 아, 그러고 보니 가장 최근에 들어온 자들이오.”
“음, 내가 저들과 말을 섞을 수 있겠소이까?”
가문호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시오, 단 그들은 건드리면 절대 안 되오, 규칙이니까…….”
“알겠소, 그러리다.”
잠시 후 주성진의 일행들이 다가오자 그들은 무공수련을 멈추고 새로이 나타난 이방인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구면인 가문호와 진구는 본체만체하면서…….
주성진은 그들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갔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틀림없어!’
그의 얼굴은 비록 강시로 변해 눈빛도 변하고 얼굴빛도 푸르뎅뎅하지만, 그의 안면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언뜻언뜻 보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소생은 형산파 출신의 주성진이라고 합니다. 복식으로 보니 형산파의 선배님 같아 보이는데요.”
그는 큰 반향 없이 담담히 고개를 끄떡인다.
주성진의 말에 동요되거나 흥분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강시로 변했기에 감정이 메마른 것이지만 마음이 들뜬 주성진은 순간 그 점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렇다, 난 형산파의 장문인이다. 난 너를 알지 못하는데 어째서 형산파 출신이라고 하는 거냐?”
그의 말에 그제야 주성진은 그가 강시임을 자각했다.
‘내가 순간 착각했군, 저분은 강시라고, 사람이 아니고.’
“아. 제가 잘못 말씀드렸군요. 저는 형산 인근의 무관에서 무공을 익혔습니다.”
“그러냐? 한데 넌 사람인 것 같은데, 같이 온 자들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긴 사연이 있는데 생략하고 몇 가지 여쭐 말이 있습니다.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고개를 끄떡이자 주성진이 빠르게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어떻게 오게 된 것입니까?”
“오악 검파대회에 참가하러 가던 중에 무림 맹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급히 만나고 싶다고 말이야. 그래서 여기로 오게 되었는데 그만 진에 갇혀 버렸다.”
“이강두 무림 맹주의 연락을 받았다고요?”
이강두는 무림맹이 해체되기 전 마지막 맹주였던 자였고, 최근 총무련에 반기를 든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장문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나도 처음엔 좀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맹주가 긴히 만나자고 하니, 저간에 무슨 사정이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무림 맹주는 만나지 못했죠?”
“그렇다.”
주성진은 형산파의 장문인과 제자들이 함정에 빠진 것으로 확신했다.
‘음. 이강두는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정정하다고 들었는데…….’
총무련에 반기를 든 세력 중 아직도 저항하고 있는 세력은 옛 무림맹 세력이 유일했다.
“혹시 무림 맹주가 왜 만나자고 했는지 정말 모르시나요?”
“모르겠다.”
주성진은 강시로 변한 전대 장문인과 대화하는 게 몹시 답답했다.
‘감정이 배제되어 버렸으니 이거야, 원… 그래 질문 자체를 바꾸어야겠구나.’
“알겠습니다. 그 당시 형산파에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과거 고대 천마와 마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정파의 초고수들이 모여 마교에 대항하는 무공을 연구했는데 그게 형산의 이름 모를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급히 비급들을 비밀스러운 장소로 옮겼고.”
“저, 혹시 당시 비급들을 대외에 알릴 생각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다.”
주성진은 전대 장문인의 직설적인 대답에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그렇구나, 뭐 좋게 생각하면 전대 장문인은 오로지 형산파의 발전만을 생각한 것이겠지…….’
그러다 순간 주성진은 이강두를 떠올렸다.
‘이강두 그자를 꼭 만나봐야겠구나. 그가 진실을 알고 있을 거야.’
주성진이 추측한 건 당시 무림 맹주였던 이강두가 어떤 경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비급을 발견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계책을 꾸며 형산파의 장문인을 유인했다는 거였다.
물론 주성진의 추측에는 이강두가 몽혼천리행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
‘뭐, 알 수도 있겠지,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까…….’
주성진은 전대 장문인을 얼굴을 바라보았다.
“혹 형산파의 무공을 기록에 남기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왜?”
“아,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요.”
잠시 후 주성진은 더는 그에게 물어볼 게 없자, 아쉬움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 * *
시간이 흐르고 생문이 있었던 몽혼천리행의 입구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인영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조금 전, 진을 통과해 바깥세상으로 나온 주성진과 그 일행들이었다.
순간 하오문주가 긴 한숨을 쉰다.
“휴, 깡그리 다 까먹었습니다, 이거야 원.”
그는 진 안에서 비급으로 생각되는 무공들을 열심히 외웠었다.
하지만 난해한 비급의 내용들이 하루아침에 외워질 리가 없었다.
“주 상단주님, 혹 기억나는 것이 없습니까? 같이 보시지 않았습니까?”
“제대로 보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러자 왕천유가 주성진을 바라본다.
“정말로 외운 게 없습니까?”
“없다니까, 왜 그러시오?”
“만약에 말입니다. 외운 게 있다면 문주님이 이강두의 행방을 알려 줄지 모릅니다.”
주성진의 고개가 하오문주에게 향했다.
“알고 있습니까?”
“대강은 알고 있습니다.”
“음,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비급의 오의를 꿰뚫어 보긴 했는데 비급 자체를 달달 외우지는 않았습니다.”
하오문주가 눈을 찡긋거렸다.
“거래하시지요?”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도 머릿속을 정리해야 하니까, 나중에 만나서 진지하게 대화하시지요.”
“그럼요, 목놓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대화를 듣고 있던 단리평이 갑자기 웃으며 주성진을 바라본다.
“선배님, 뭐 즐거운 일이라도?”
“주 상단주의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아서 웃고 있지.”
“제가요, 뭐가 다르다는 것인지?”
단리평이 멀뚱멀뚱 쳐다보는 주성진을 보며 말한다.
“무림에는 손 뗄 것처럼 늘 이야기하더니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지. 이강두의 행방을 알 수 있다고 하니 후배의 태도가 돌변했잖아.”
“아, 그거야. 그가 형산파를 해코지를 했는지 확인하는 게 중요한 일이라서 말이죠. 저의 사문을 위해 그 정도의 일은 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봐, 그걸 내가 왜 모르겠나, 다만 이강두를 건드리는 것은 총무련에 반기를 든 무림맹 세력들을 모두 상대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주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그건 아니지요. 총무련 소속의 마교의 후예들이 구 무림맹 세력들을 상대하고 있잖아요. 저는 이강두 그자만 상대할 거랍니다.”
“그게 말처럼 쉬울까? 지금껏 총무련에서 무림맹의 잔당들을 소탕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무공이 높아서가 아니야. 지금의 정파 세력 중에 은연중 그들을 돕는 자가 부지기수라서 그런 것이야. 그런 자들까지 모두 솎아 내야 무림맹 잔당들을 소탕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선배님의 말씀은 제가 이강두를 잡으려 한다면 자칫 정파 세력과 마찰을 일으킬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게 맞습니까?”
단리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런 각오 없이 이강두를 잡으려 든다면 큰 오산이야. 후배 상단에도 악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고.”
“음, 그 점은 제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하면 고견이 있으신가요?”
“시간은 누구 편인가? 늙고 쇠약한 이강두의 편은 아니지. 그러니 후배는 잠시 자신을 돌아보는 게 좋겠어. 내가 알기로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들었는데.”
주성진은 단리평의 다음 말이 궁금해졌다.
“제가 해야 할 일이 많긴 하지만, 산더미같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허허, 이래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걸세. 내가 말이야, 흉악범을 쫓으러 다닌다고 중원에 돌아보지 않은 곳이 없지. 한데 일전에 장사의 천화각 지부에 들렸는데 아리따운 세 여인의 환대에 몸들 바를 몰랐어!”
“…….”
“그런데 말이야. 누군가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그녀들의 이름다운 옥봉이 표독한 고양이로 변하더군. 내가 중원을 제집처럼 돌아다니지만, 엄연히 육선문의 부문주라고. 나름 황궁의 일에 박식하다는 뜻이지. 크크.”
주성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혹시 황궁의 일을 삼선녀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당연한 일 아닌가. 그렇게 나를 환대하는데 응당 보답해야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아는 범위에서 황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재미있게 풀어놓았지. 그런데 말이야… 그녀들이 유독 황제나 황비들의 근황보다는 유독 공주에 대해 많이 묻더군. 그 누군가와 엮어서 말이야. 하하.”
주성진은 단리평을 바라보았다.
“제가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내 생각에 후배는 내부 문제부터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혼자 답을 구하지 못하겠으면 내가 지금이라도 당장 연애, 애정 전문가를 소개해 줄 수 있다네.”
주성진은 그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발 어느 분인지 빨리 소개 좀 해주십시오.”
“하하. 맨입에? 농담이고 소개해 주지, 그리고 한 가지 더! 후배가 움직이는 건 후배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움직인다는 걸 명심하게. 그러니 사소한 일이라도 각별히 유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자넨 누구 말마따나 고금 삼대 무인 아닌가, 하하.”
“음, 선배님의 말씀을 뼛속 깊이 새기겠습니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