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기묘한 환상진
유홍개는 그녀의 슬픈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음, 이제부터 어떻게 할 작정이냐?”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입니다. 저는 지금 포로로 잡혀있지 않습니까?”
유홍개는 주성진을 바라보자 주성진이 말문을 열었다.
“저는 개의치 마십시오. 다만 제가 본단까지 그녀를 데리고 가겠습니다.”
“하하, 알겠소.”
유홍개는 재차 염미란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를 너희 어머니에게 데려갈 작정이다.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아라, 널 비구니로 만들 생각은 없으니까.”
“제가 붙잡혀서 어머니로 가면 아버지가 슬퍼할 텐데 그게 걱정이군요.”
“너희 아버지에게는 은밀하게 기별을 보낼 것이다. 아마 너의 아버지도 이 싸움이 곧 끝이 날것이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흑룡가가 반기를 들어설 때부터 싸움의 행방은 정해져 있었던 거지…….”
염미란은 유홍개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에게 항복을 권유할 건가요? 제 생각에 아버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항복할 분이 아닙니다.”
“항복을 권유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이 진흙탕 싸움에 개입하지 말라고 해야겠지.”
“아마도 아버지는 거처를 떠나 저를 보러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유홍개는 그녀의 말을 예상한 듯 담담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럴 거로 생각하고 있다. 너의 어머니도 보고 겸사겸사.”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전쟁이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너도 이제부터는 미래를 생각하거라, 뭘 할지…….”
염미란은 주성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무리 총무련이 관대하더라도 패자 출신인 제가 기를 펴고 살기는 힘들겠지요. 그래서 저는 무림을 떠나 상인의 길을 가 볼까 합니다.”
“뭐라, 상인?”
“뭐, 저를 붙잡은 분이 알아서 잘 해주지 않을까요. 호호.”
* * *
석 달이 쏜살같이 지났다.
여러 일을 거의 동시에 숨 가쁘게 처리한 주성진은 왕천유와 역산도 그리고 명세철을 대동하고 정의단 본단을 떠나 신강과 세외의 경계지역에 이르렀다.
그들이 가는 목적지는 옛 흑룡가의 터전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었다.
주성진이 모래 먼지를 뒤집어쓰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굳이 이곳을 찾은 이유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과연 여기서 그를 만날 수 있을까? 나의 전쟁은 그와 만나야 끝이 나는 데…….’
사실 만난다는 의미는 여차하면 상대를 죽인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간 정의단은 증파된 원군과 합세해 흑룡가를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싸움의 성격도 그간의 산발전이 아닌 본격적인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전면전이 벌어지다 보니 독자적으로 행동하기로 한 주성진도 한동안 이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상대 진영에서 최고수가 등장한다면 곧바로 본인이 나서서 그를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모두가 아는 흑룡가의 최고수는 반로환동한 인물이었고, 주성진은 그가 일전에 비무에서 참관인 역할을 한 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전면전이 발발한 이후 흑룡가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존립의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 그런데도 흑룡가의 최고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로잡은 흑룡가의 무사를 심문하는 과정에 그가 과거 흑룡가의 옛터에 있을지 모른다는 정보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도 한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다수의 증언으로…….
* * *
왕천유는 모래에 파묻히지 않은 유일한 건물을 바라보면 입을 열었다.
“단주님! 과연 그가 저기에 있을까요?”
“글쎄, 이제부터는 조심해야겠소. 혹 함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한데 왜 인상을 찌푸리고 있습니까?”
주성진은 왕천유에게 고개를 돌렸다.
“음, 내 기감에 반로환동한 고수가 잡히지 않아서 말이오. 물론 그가 완벽히 기세를 감추고 있다면 찾아낼 방도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가 여길 도착한 걸 안다면 나타나는 게 정상이 아닐까 싶소이다. 그 정도의 인물이라면…….”
“단주님,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그가 아무리 반로환동한 고수라 할지라도 출신이 흑룡가입니다. 언제든 뒤에서 칼을 찌를 수 있는 인물이라고요.”
“음, 그가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 아무튼 그대의 말도 일리는 있소이다. 내 참조하겠소.”
끼이익!
주성진은 꽉 닫힌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의 손잡이가 녹슬지 않고 반질반질한 것으로 보아 필시 안에 사람이 거주하는 게 분명 했다.
“사람이 살았나 보네요. 주 단주님.”
뒤에서 왕천유가 말한다.
“그런 것 같소, 왕 호법.”
주성진은 문을 연 순간 인기척을 느꼈다.
“오오!”
왕천유는 생각보다 훨씬 넓은 전경에 놀라움을 표시한다.
바로 그 순간 주성진은 2층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인물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는 코가 우뚝한 서역인이었는데, 세월의 서리를 맞아 머리칼이 백발로 변해감에도 군데군데 금발이 남아 있었다.
주성진은 그에게서 풍기는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알아볼 일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한다.
‘저벅저벅…….’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딛는 서역인의 발걸음에는 엄청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걸음은 무거워져 계단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용케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생사 대적을 만나 기세를 북돋우고 있는 것 같았다.
실력이 비슷한 자라면 상대의 기세를 흘리거나, 정면으로 맞서 기세를 일으키는 게 정상이었다.
왜냐면 그래야 상대에게 기세에서 밀리지 않고 맞붙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성진은 자신을 향해 상대가 기세를 올리는 것이 분명한데도 팔짱을 끼고 관조의 시선으로 그를 바로 보았다.
마치 본인이 방관자가 된 양…….
순간 서역인은 주성진의 태연자약한 모습에 혼란을 느꼈다.
‘으음, 내 예상과 다른데… 나의 모습에서 조금도 위압감을 못 느끼는 것 같아. 정말로 그자의 말대로 강자란 말인가. 저 어린놈이! 아니야, 뭘 모르고 저럴 수도 있어. 아직 세상 경험이 부족해서 말이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지렁이여서 가만히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을 우습게보고 자신만만해서 저러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내 후자 쪽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자 불끈불끈 전의가 치솟는다.
‘후후,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날 무시한 대가를 보여 주어야겠지.’
“처리해!”
그러자 2층 계단에서 3명이 인영이 주성진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오더니 다짜고짜 공격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애초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었는데, 아마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기척을 숨기고 있던 것 같았다.
살을 에는 듯한 손바람이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고 휘몰아쳤다.
“밖으로 나가! 어서!”
주성진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자신들의 일행에 소리쳤다.
일행들은 휘몰아치는 손바람에 놀라 분분히 물러섰다.
사실 주성진이 소리친 건 분위기가 흉흉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건물 내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낀 탓도 있었다.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주성진은 일행들이 밖으로 철수하자마자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장풍엔 장풍으로…….’
그러자 그의 장심에서 짙푸른 광채가 일렁이더니, 이내 부챗살 모양으로 맹렬히 퍼져 나갔다.
꽈꽈꽝!
주성진의 장력과 마주한 3인은 공중으로 튕겨 올라갔다.
순간 주성진의 눈에 이채가 발한다.
‘뭐야. 저놈들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어!’
분명 눈의 착시였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단 하나.
‘이 건물에 진이 설치되어 있구나. 음, 전설의 부분환상진 같은데, 실체와 진이 공존한다는…….’
주성진은 책에서 읽은 진법 안내서를 떠올렸다.
‘사라졌다고 알려진 진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다는 말이지, 그럼 내가 보고 있는 것들도 절반은 허상이라는 말인데…….’
주성진은 눈을 완전히 믿어서는 안 되는 걸 알고 마음의 눈을 일으켰다.
심검이 어느 정도 성숙한 경지에 들어섰기에 심안을 일으키는 건 그자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심안만으로 모든 게 해결된 건 아니었다.
허상과 실체를 구분하는 건 주목할 만한 성과였지만, 허상 속으로 사라진 상대를 공격하는 건 심검 외는 그 어떤 다른 공격으론 소용이 없었다.
설사 이기어검이라 할지라도…….
‘후후, 일이 점점 묘하게 흘러가는 군.’
바로 그때였다.
3명의 인형이 주성진을 겨냥하더니, 마치 시위를 놓는 것처럼 팔을 움직였다.
‘이번엔 또 뭐야?’
슝, 슝, 슝…….
‘아아, 저건 지법이구나! 한데 저 동작은 못 보던 동작인데, 음 꽤 특이하네.’
그 순간 상대가 뿌린 지풍이 주성진에게 휘몰아쳐 왔다.
주성진은 잽싸게 고개를 틀어 상대의 지법을 피했다.
‘뭐야, 피부가 얼얼한데… 맞으면 최소 중상이다.’
아슬아슬하게 주성진의 관자놀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데도 상대 지풍의 위력은 대단했다.
‘음, 그러고 보니 날카로운 화살이 옆을 스치며 지나가는 것 같았어.’
주성진은 그들의 지법에 호기심에 생겼다.
‘괜찮은 수법인데, 좀 더 지켜보자고!’
주성진은 공력을 조금 더 끌어올렸다.
슝, 슝, 슝…….
계속해서 주성진은 공간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그들의 지법을 피했다.
어느덧 개개인이 연속해서 대여섯 번을 지법을 쏘아대자, 주성진의 주변 공간은 온통 상대 지풍의 날카로운 기세로 가득 찼다.
주성진은 그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나 상대가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우니 확인한 길이 없었다.
‘어디서 온 놈들 일까? 분명 중원인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역산도가 문을 빼꼼히 열어 안의 정경을 바라봤다.
‘헉, 뭐야…….’
미친 듯 휘몰아치는 바람에다. 귀청을 따갑게 때리는 소리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괜찮겠지, 주성진이니까…….’
사실 역산도는 단지 본 것만으로도 오싹한 위험을 느꼈다.
그 순간 왕천유가 역산도의 엉덩이를 찼다.
“뭐해, 자식아, 건물에서 널찍히 벗어나는 게 주 단주를 도와주는 거라고.”
“아. 알았어, 한데 말이야 수상한 자들이 처음 보는 공격을 하는데, 뭐 천하의 주 단주를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만약 내가 저 안에 있다면 곤욕을 면치 못하고 있었을 거야.”
“뭐야, 그 정도야, 잠깐 나도 좀 볼까?”
그러자 역산도가 왕천유의 팔뚝을 잡았다.
“아서라, 빨리 여기서 떨어지자.”
“좀 보자니까.”
그 순간 명세철이 끼어든다.
“두 사람 다 그만하고 주변을 살펴봅시다.”
“선배, 뭐 눈에 거슬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왕천유가 명세철을 바라본다.
“아니요. 그냥 느낌이 싸하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알겠습니다. 설마 흑룡가의 최고수가 우리 앞에 나타나는 건 아니겠죠?”
“음, 만일 그자가 나타난다면 우린 한 날 한 시 저승행 마차를 타는 거지, 허허.”
역산도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선배 우리 같은 피라미는 죽이지 않을 겁니다. 먼저 우리가 공격하지 않는 이상.”
“확신하오?”
“확신은 못하지만 사부님이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초고수가 되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진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