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염미란 생포작전 (5)
쉬익!
그녀는 느닷없이 요대를 풀더니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흐느적거리던 그녀의 요대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불쑥 일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한 줄기 빛이 되어 허공을 갈랐다.
‘뭐야!’
명세철은 깜짝 놀라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과히 이형환위에 버금가는 움직임이다.
염미란은 자신의 한 수가 빗나가자 입술을 깨물었다.
‘저자도 고수였어!’
한편 명세철은 조금 반응이 늦었지만 염미란이 떨쳐내는 뱀의 혓바닥 같은 검의 움직임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칠채 연검, 그럼 마병십군…….’
명세철은 조금 전 그녀의 연검에서 피어오르는 무지개를 보았던 거였다.
돌연 그의 눈썹이 휘어졌다.
‘저년, 흑룡가 출신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가만 있을 수 없지.’
주성진 때문에 그저 수동적으로 피하려고 다짐했지만, 상대가 흑룡가 출신임을 안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설령 주성진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명세철은 좀체 사용하지 않는 검을 꺼내 들었다.
‘마병을 맨손으로 상대할 순 없지…….’
그게 명세철이 평상시 장식처럼 가지고 다니던 검을 꺼내든 이유였다.
챙!
두 병기가 부딪혔다.
명세철의 손에는 강한 힘이 실려 있었고, 검 끝에서는 진한 살기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염미란은 재빨리 검을 거둔 뒤, 몸을 옆으로 빼내곤 계속해서 명세철의 측면을 노리며 검을 뻗었다.
쨍!
염미란의 검은 또다시 명세철의 검에 의해 차단 당하고 말았다.
‘이 씨…….’
약이 바짝 오른 염미란은 거듭 찔러 갔다.
하지만 명세철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중도에 차단되고 말았다.
“모두 동작 그만!”
주성진이 참다못하고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염미란은 뒷걸음을 치다가 몸을 돌려 재빠르게 달아났다.
하지만 목덜미가 따끔함을 느끼고는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아아, 격공점혈에 당했어!’
주성진은 일부러 명세철에게 주변을 정리하라고 일렀다.
염미란과 단둘이 남은 주성진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진 안에서 기절해 있던데…….”
“저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요?”
주성진은 그녀를 점혈했지만 아혈까지는 점혈하지 않았다.
“뭐, 그건 아니요. 다만 추정되는 것이 있어서 말이오.”
“그게 뭐죠?”
“정신은 혼란케 하는 굉음…….”
염미란은 주성진을 잠시 바라보더니 체념한 듯 고개를 끄떡였다.
“네, 맞아요. 그건만 아니었어도 다시 나갈 수가 있었는데…….”
“생문이 없다고 들었는데, 생문이 있었소?”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건만 보지요. 생문이 없긴 왜 없어요. 모를 뿐이지…….”
주성진의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명세철은 생문이 없다고 단정하고 반대로 염미란은 생문이 있다고 주장한 탓이다.
“당신이 조금 전 공격한 사람이 진법 전문가였소. 그는 내게 생문이 없다고 말했소이다.”
“그러면 어떻게 진을 찾은 거죠?”
“그가 뜨거운 입김을 불어서…….”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란다.
“그것이 생문을 찾는 방법인데…….”
주성진은 그제야 그녀가 말한 생문의 의미를 깨달았다. 결국, 해결책은 똑같은 거였다.
“진의 명칭을 아시오?”
“천마곡진이잖아요.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는 건가요?”
“음, 그는 환상안개진이라고 하였소이다.”
“환상안개진이 천마곡진이라는 건가요?”
주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소. 다만 내 느낌을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겼었던 진이 다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소, 아마도 환상안개진을 통과하면 또 다른 진이 있을 것 같소이다.”
“음, 아버지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어디까지나 추측이라 하면서 말이죠.”
“하하, 이거 그대의 부친과 내가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오.”
순간 그녀가 주성진을 노려본다.
“함부로 우리 아버지를 끌어들이지 마세요. 그대와는 차원이 다른 분이니까…….”
“아, 미안하오, 그런 뜻은 아니었소.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겠소이다. 난 그대를 총무련 본단으로 보낼 것이오.”
돌연 그녀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어머니가 저를 데려오라고 했나요?”
주성진의 눈에 이채가 그려졌다.
‘뭐야. 그녀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난 그녀가 출생의 비밀을 잘 모르고 있을 줄 알았지. 가만 그래서 그녀가 우리 측을 살생하지 않았던 거구나. 이거 몰랐네…….’
“꼭 그런 건 아니오. 그대 때문에 작전이 차질이 생겨서 여기 책임자인 내가 겸사겸사 나선 것뿐이요.”
“잠깐만요. 그대가 책임자라고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한데 나를 모르시오? 내 용모파기가 도처에 뿌려졌을 텐데.”
“그러면 당신이 주성진……?”
“그렇소, 내가 주성진이요. 염미란 소저.”
염미란은 주성진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만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아아, 또 그러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부정이라 하듯이 열심히 도리질 쳤다.
주성진은 그녀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다.
‘왜 저러는 거야? 갑자기?’
“왜 그러시오?”
“아.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저를 보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대의 아버지가 고수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 하지만 그대가 죽지 않는다면 그가 나설 것 같지 않은데, 이점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음,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럼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는 순수하게 흑룡가의 멸문을 원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의 핏속에는 흑룡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르겠어요.”
“누구나 사정은 있겠지. 하나 누구의 사정을 봐줄 만큼 지금 상황이 녹록하지 않소이다. 지금 이 시점에도 많은 무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소이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난 그래서 전쟁의 빠른 종식을 원하오. 그게 당신을 생포한 이유이기도 하고.”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지요. 알아서 하세요.”
그녀가 체감한 듯 고개를 떨궜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녀가 다시 얼굴을 들었다.
“그대는 왜 참전한 건가요? 내가 알기로는 상인이라고 들었는데.”
“음, 그래서 참전한 거요. 신광상단이 흑룡가와 얽혀져 있기에.”
염미란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도 흑룡가와 신광상단의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흑룡가가 신광상단에 손을 뗀다면 당신도 손을 뗄 것인가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하지만 손 떼기가 어려울 것이오. 신광상단은 흑룡가의 하부조직이기 때문에…….”
“하부조직이라고요? 그건 몰랐는데…….”
“내 짐작이 정확할 것이오. 어쨌든 자발적으로 이 싸움에 참여한 건 아니지만 빨리 이 싸움을 끝내고 싶소이다.”
그녀는 주성진의 말에 섬뜩함을 느꼈다.
“흑룡가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완전히 없애려는 건가요?”
“뭐, 필요에 따라서는…….”
그때였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웬 노랫 자락이 들리자 주성진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뭐지?’
순간 주변을 정리하던 염세철도 잔뜩 긴장하는 눈치이었다.
노랫소리가 술주정뱅이가 건들건들 흥얼거리듯 낮아졌다.
높아졌다 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귀속에 너무 쏙쏙 박힌다는 거였다.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초고수다. 너무 또렷이 들려…….’
잠시 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건들거리는 두 다리, 손에는 커다란 호로병을 든 자가 나타났다.
얼굴은 온통 술에 찌들어 눈은 게슴츠레하고, 코는 빨갛다.
그리고 옷은 정말이지 언제 빨아 입었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지경으로 더럽고 추레했다.
모습으로 보아서는 왕거지에 술주정뱅이 같아 보였다.
주성진은 팔짱을 켜며 나타난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염세철이 불청객을 막아섰다.
“아휴, 고약한 냄새! 노인장! 가까이 오지 말고 게서 멈추어 서시오!”
늙은 거지는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 게슴츠레한 눈을 들어 주위를 돌아보다 염세철을 보며 히죽 웃었다.
“뭐라, 네 놈의 코가 어떻게 된 모양이군. 주변에 자욱한 피 냄새보다는 내 냄새가 향기롭지 않나… 그리고 말이야,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도는 거지에게 가지 못할 곳이 어디 있으려고? 여기가 네 놈의 안방이라고 되는 것이냐?”
거지는 건들건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지만 내뱉는 말은 신랄했다.
주성진은 염세철에게 전음을 펼쳤다.
―우리가 비켜섭시다. 그리고 여길 떠날 때도 된 것 같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갈 수나 있겠습니까. 분명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뭐, 두고 보면 알겠지요…….
염세철이 자리를 옮기는 동시에 주성진도 염미란을 데리고 움직였다.
한데 거지가 주성진이 자리를 옮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염세철은 손을 들었다.
“잠시만 오지 마시오, 우리가 떠날 테니…….”
“오지 말라니, 내 맘이다. 이놈아…….”
“지금 시비 거는 것이오?”
주성진은 염세철을 제지하고 나섰다.
“염 형, 그만하시오. 내가 나설 터이니…….”
그 순간 거지가 주성진을 바라보며 손가락질했다.
“어린놈이 되먹지 못했네. 지보다 스무 살은 족히 많은 자에게 형 소리라니, 세상 말세다. 말세야.”
주성진은 짜증이 왈칵 솟아났다.
“좀 지나친 말씀인 것 같은데요. 그리고 놈이라뇨. 남을 훈계하려면 본인부터 말조심하셔야지요.”
“허허, 무공 좀 한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보군…….”
“오라, 제 정체를 아시나 봅니다.”
늙은 거지는 아예 땅에 철퍼덕 주저앉으며 커다란 술 호로를 연신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입을 쓱 닦으며 주성진을 바라본다.
“크윽, 너는 어른 공경할 줄도 모르느냐?”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럼 저희는 갈 길 가겠습니다.”
주성진이 대꾸 없이 떠나려 하자 그가 소리친다.
“그냥 가면 곤란하지, 가려거든 여인을 두고 가라고.”
“제가 왜요?”
“여인을 납치하면 안 되지, 보아하니 아혈까지 점혈했구먼.”
주성진은 늙은 거지에게 눈길을 주더니 돌연 주변 숲속을 바라보았다.
“나오시오.”
그러자 젊은 거지 하나가 숨을 헐떡이며 부스스 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머리는 헝클어졌고, 얼굴은 언제 씻었는지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옷도 또한 언제 갈아입었는지 지저분하기 짝이 없다. 늙은 거지와 하등 다를 것이 없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두 눈빛만큼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한데 저희에게 볼일이 있으신지?”
“네, 실은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사부님 덕분에 늦지 않게 당도할 수 있었네요.”
주성진은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었다.
‘그러면 시간을 끌기 위해 시비를 건 거였군, 제자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저를 만나보고 싶다고요?”
“네. 실은 무공을 겨루고 싶었습니다.”
주성진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야, 저 친구도 살짝 맛이 갔네, 그 사부에 그 제자인가…….’
“무공을 겨루려면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십시오.”
“안 된다는 겁니까? 여기서는?”
“절차를 밟으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습니다.”
그 순간 늙은 거지가 소리친다.
“몽몽아, 내가 보증할 터이니 한번 붙어 보거라.”
“네, 사부님!”
“무슨 헛소리를…….”
주성진이 말을 내뱉는 순간, 윤기의 반질반질한 몽둥이가 주성진을 향해 날아왔다.
‘저 자식이!’
주성진은 빠르게 검을 집어 들더니 젊은 거지를 향해 살벌한 검초를 펼쳐 냈다.
정말 빠르고 험악한 검초였다.
쉬이익!
주성진의 무시무시한 검초에 젊은 거지는 공격하다 말고 땅바닥을 떼굴떼굴 굴러
겨우 피해 냈다.
주성진은 재차 검을 바로잡았다.
“제법이다만 이번엔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형장, 살살 합시다. 헤헤.”
주성진은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쓴맛을 보여주어야겠군.‘
주성진의 검이 빠르게 대기를 갈랐다.
“아이코, 나 살려!”
젊은 거지는 피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연신 비명을 내지른다.
바로 그때 주성진의 검이 젊은 거지의 목을 베어 버리려는 순간이었다.
피잉!
공기를 찢으며 날아온 무엇이 주성진의 검을 쳐 내고 있었다.
땅!
‘후후, 그럴 줄 알았어!’
자신의 검을 퉁겨내고 땅에 떨어진 물체를 보니 자그마한 단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