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주성진 움직이다 (1)
어둠을 틈타는 비밀스러운 움직임이 있었다.
그 움직임은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표표했다.
곧이어 마치 땅에서 솟아나는 물처럼 허공에서 튀어나오더니, 곧 사람으로 변하였다.
“단주님 역산도입니다.”
사실 주성진의 휘하에는 많은 무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본인의 부재 동안 상단의 안전 및 보호에 투입된 상태였다.
지금 그의 측근으로는 황제가 데리고 가라고 한 육선문의 왕천유와 역산도가 있을 뿐이었다.
주성진은 그들 둘을 호법으로 임명하였다.
“야. 이거 역 호법, 나날이 은신 잠행술이 발전하는군요. 그야말로 도둑고양이가 따로 없습니다 그려… 소림의 방장님이 그대의 모습을 봐야 하는 건데…….”
역산도가 손을 저었다.
“에이 단주님. 왜 그러십니까? 소림에 돌아가면 얌전하게 살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보는 눈이 있으니 말을 놓으라니까요.”
“이것 참 아직도 적응이 안 돼서… 아, 그러지 말고 나는 평상시처럼 할 테니 그대는 알아서 하시오. 난 그게 더 편하겠소이다.”
역산도가 씩 웃더니 돌연 고개를 숙였다.
‘후후, 말이라고 고마운데… 한데 그의 동향을 주기적으로 육선문에 보고하는 걸 알고 있을까? 하긴 그가 모를 리가 없겠지. 일부로 내색을 하지 않을 뿐…….’
역산도는 미안한 감정을 숨기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몸을 부동자세로 세워 최대한 예를 다하면서…….
“속하, 주 단주님께 보고드리겠습니다.”
“보고하시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염미란의 어머니는 정파 출신인데 지금은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를 생포하려는 건 염미란 모친의 강력한 요구가 있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개 비구니가 무슨 힘이 있길래 염미란을 살려달라고 하는 거지…….’
주성진은 자신이 모르는 깊은 흑막이 있음을 깨달으며 그녀에 대해 아는 사항을 빠르게 떠올려 보았다.
‘음…….’
염미란은 흑룡가 무공 서열 5위의 고수로서 특히 경공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녀는 흑룡가의 무사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어김없이 나타나 그들을 안전하게 구해 냈다,
신출귀몰한 그녀 때문에 정의단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정의단에서는 눈에 가시 같은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심사숙고 끝에 치밀하게 함정을 팠고 이번에 드디어 그녀가 걸려든 거였다.
일단은…….
“도대체 염미란의 모친이 누구란 말이오?”
“저도 그것까지는 파악 못 했지만, 정파의 명숙이라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염미란이 저희 아군을 상대할 때 일부러 살생은 자제한다고 합니다.”
“허허, 그렇소이까. 이거 그녀의 무공이 뛰어난 것인지, 정의단 전력이 보잘것없는 건지 잘 모르겠소이다.”
역산도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의 눈높이로 본다면야 나조차 눈에 차지 않겠지만…….’
“아무튼, 사실이 그렇습니다.”
“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내 생각은 그녀를 봐 주면 안 될 것 같소. 그거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거리에 불과하오. 생각해 보시오. 그녀가 구한 흑룡가의 무인들이 또다시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를 찌르고 있지 않은가 말이요?”
역산도는 고개를 끄떡였다.
“뭐,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하여간 복잡합니다.”
“정의단 1대가 실패하면 곧장 내가 나설 것이오. 왕천유가 참관인으로 1대를 따라갔으니 곧 소식이 올 거외다.”
역산도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단주님, 결심하신 겁니까? 개입하기로…….”
“그렇소이다. 여기에 계속 있으니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소이다. 더는 수동적으로 있지 않을 것이오.”
“그러다 내부에 불협화음이 생기면요?”
주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겠지. 요령껏…….”
“알겠습니다. 저는 그럼 정의단 예하 진영으로 돌아갔다가 단주님이 움직이면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정의단 예하 진영이란 부단주가 장악하고 있는 전투부대를 지칭하는 거였다.
주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정의단 예하 진영에서 계속 참관인으로 있으시오. 그대는 소림 출신이라 정의단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잖소이까. 왕천유는 왕따지만…….”
역삼도는 정색하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단주님, 저도 요즘 들어서는 눈총을 많이 받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거꾸로 저에게 단주님의 신상에 관해 묻는 이들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요. 정말로 귀찮아 죽겠습니다.”
주성진은 역산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 역산도가 빠지면 나는 눈먼 장님이 되는데. 어떡한다… 뭐 할 수 없지. 본인이 싫다는데…….’
“좋소이다. 대신 앞으로 각오 단단히 하도록 하시오. 우리가 신강에 놀러 온 것이 아닌 만큼 적에게 자비는 금물이오. 그들 하나를 죽이면 그만큼 우리 편의 희생을 줄이는 것이라오!”
역사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돌연 입을 열었다.
“저, 만약에 정의단 1대가 그녀를 생포하면요?”
“뭐, 그러면 할 수 없이 다음 기회를 노릴 수밖에. 모름지기 명분이 중요하니까… 안 그렇소?”
“이거 정의단이 그녀를 생포하기를 바라야 하는 건지, 아니면 놓치는 걸 바래야 하는 건지 갈피를 못 찾겠습니다. 하하.”
주성진은 내심 똑같은 심정이다.
‘아니야. 다음 기회를 노리더라도 이번 작전이 성공하길 바라야지. 한데 그게 잘 안되네…….’
탁……!
주성진은 몇 방을 남지 않은 찻잔을 탈탈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오늘 이야긴 그만하고 내일 봅시다. 아무튼, 정보를 알아낸다고 수고하셨소이다.”
“네, 그럼 단주님, 내일 뵙겠습니다.”
주성진이 먼저 자리를 뜨자 역산도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늘따라 일찍 자러 가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 * *
밤늦게 이름 모를 작은 술집에서 세 사람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한데 한 인영이 일어나더니 술집에 딸린 단 한 개의 객실로 가 버렸다.
“왕천유, 주 단주가 좀 이상한데…….”
역산도가 속삭이듯 말하자 왕천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무슨 일 있는 건가? 산도야, 아무튼 우리는 한잔 더하고 자러 가자.”
“그래…….”
그 순간 역산도의 뇌리에 오늘 낮에 벌어진 이 일이 생각났다.
“저기, 주성진이 염미란를 보고 반한 건 아닐까? 그래서 마음이 심란한 지도…….”
“넌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게, 오늘 우리가 처음으로 염미란을 보았잖아. 비록 잠깐이지만… 그때 내가 주성진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주성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는데, 그가 입을 벌리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더라고. 내가 헛기침을 세 번이나 하자, 그제야 염미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는 거 있지…….”
왕천유는 씩 웃으며 고개를 여러 번 끄떡였다.
“음, 그런 일이 있었군. 솔직히 나도 한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어. 너무 미인이라서 말이야.”
“그래? 내 눈만 어찌 되었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던데. 솔직히 내가 좋아할 상은 아니더라고. 난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청초한 여인을 좋아하는데, 반면에 그녀는 화려하고 도발적으로 생겼잖아…….”
“웃기고 있네. 뭐가 화려하고 도발적이야. 내 눈엔 청초하기 그지없던데. 그리고 말이야 너 같은 땡중이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해야지. 뭐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인을 좋아한다고.”
“…….”
그 시각 주성진은 자신의 객실로 들어가 검을 내려놓고 침상에 앉았다.
오늘 낮에 염미란을 보자마자 가슴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모님의 얼굴과 판박이일까?’
주성진의 이모는 주변에 소문난 미인이라 어린 나이의 그조차 설레게 했었다.
하여 그런 이모의 미모는 주성진의 가슴속 깊게 화인으로 남아 있었다.
후일 어른이 되고 환생한 이후에도 절대 잊히지 않았다.
그런데 주성진이 11살 되든 해 돌연 그녀가 사라졌고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설마 이모님이 나처럼 염미란으로 환생한 것은 아니겠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정의단 1대가 염미란 생포에 실패하자마자, 주성진은 서신을 남기고 그녀를 추적하러 신강의 경계선을 넘었다.
주성진의 작전은 간단했다.
염미란이 흑룡가의 무사들을 도우는 것을 철저히 방해하는 것이었다.
어디선가에서 염미란이 나타나면 어김없이 자신이 나타나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러다 도망치면 그녀를 바짝 추적하는 게 그의 작전 전부였다.
왕천유가 웃으며 말한 일종의 거머리 작전이었다.
또한, 이러한 주성진의 행동은 정의단 전투부대의 활동에 전혀 저촉되지 않았다.
오히려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역할이라 총무련의 련주나 정의단의 부단주는 아무런 토를 달지 못했다.
바꿔 말해 주성진을 제지할 명분이 없는 거였다.
* * *
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염미란은 흑룡가의 제3 분타에 도착했다.
그녀는 주성진의 일행이 그녀를 추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를 왔다는 연락을 받고 마중 나온 제3 분타주 경포승은 40대 초반의 인물로 인상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염미란 소저!”
경포승이 미소를 그리며 말하자 염미란은 살짝 고개를 숙었다.
“오랜만에요. 경 분타주님.”
“그렇군. 근 10년만인가. 자 안으로 들어가지.”
경포승이 안내하자 그 뒤를 염미란이 따르며 입을 열었다.
“요즘 이쪽 전황이 어떤가요?”
“뭐, 여전하지.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되고 있어. 하지만 정의단 놈들이 야금야금 우리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밀리고 있다는 거네요.”
경포승은 탐스러운 수염을 쓰다듬었다.
“뭐, 그렇다고 완전히 밀리고 있는 건 아니야. 여전히 주요 요충지는 우리가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까.”
“다행이네요. 저는 이번에 천마곡에 들를 생각입니다.”
경포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마곡에? 그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한데 너도 위치를 아는 거냐?”
“네.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마곡은 오직 흑룡가의 주요 간부급 인물들만 알고 있는 장소였다.
과거 그곳 근처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일이 있어서 두어 차례 조사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그렇기에 극소를 제외하곤 현재 강호에서는 천마곡이 존재하는 자조차 모르고 있었다.
“음, 저기 하나만 물어보지? 천마곡이 정말로 천마께서 무공을 익힌 장소가 맞는가?”
“네. 아버님 말씀에 의하면 그건 사실이라고 합니다.”
“음, 그렇군…….”
염미란이 분타주의 안내로 회의실에 들어가니 그녀가 잘 아는 인물이 있었다.
“어머, 송정호 아저씨! 반가워요.”
“네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널 만나려고 기다렸다. 원래는 제2분타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송정호는 분타를 돌며 관리 감독과 분타의 어려움을 헤아려 상부에 보고하는 순회 사자였다.
“어머 그래요? 무슨 하달할 말씀이라도…….”
“아니다. 네가 잘 지내는지 보려고. 한데 얼굴이 수척한데…….”
“실은 얼마 전 제가 정의단의 함정에 빠졌다가 겨우 빠져나왔어요. 한데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저를 집요하게 쫓는 인물들이 있어요. 몇 차례 제가 하려는 작전을 방해까지 했다고요.”
경포승과 송정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단순히 무위만 따진다면 그들은 염미란의 아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