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상인-220화 (220/250)

220화 표사들을 돕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쉭!

한줄기 눈부신 빛이 기호철의 눈앞을 스쳤다.

‘뭐지?’

스걱!

동시에 채주의 목이 하늘로 치솟다 아래로 떨어졌다.

한데 목이 잘린 채주의 얼굴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죽으면서도 자신의 죽음을 몰랐던 것이다.

쿵!

“채주님이 돌아가셨다!”

난전 속에서 산적 누군가가 소리치자, 태산처럼 믿었던 우두머리를 잃은 산적들의 반응은 여러 가지였다.

차마 도망가지는 못한다 해도 슬슬 뒷전으로 물러서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자도 있었다.

하나 공포에서 비롯된 발작적인 살기는 전혀 위협적인 공세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삼을 뿐이었다.

“으아악……!”

한편 그 순간 기호철은 상대 두목의 죽음을 강호철의 기습으로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자신을 도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특한 녀석…….’

기호철은 눈가에 미소를 짓다가 돌연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산적들을 본 것이다.

“이놈들 죽어라!”

“끄아악……!”

기호철은 사정없이 산적들을 베어 갔다.

산적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제야 기호철은 앞서 그들을 공격한 산적들에게 생각이 미쳤다.

‘이상하다. 놈들이 당도하고도 남았을 텐데…….’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다 보니 뒤에 적을 남겨 두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다가 이제야 생각이 난 것이었다.

“도망가자!”

반수 이상의 주검을 남겨 둔 산적들이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기호철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추적하지 마라!”

잠시 후 인원 점검에 나선 기호철은 단 한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를 입은 자가 여럿 있었지만, 심한 상처는 아니었고 말들도 모두 무사했다.

순간 강연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호철을 바라보았다.

“형님,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긴 한데 알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

“그게 제가 자칫 죽을 뻔했었거든요. 옆에서 살기를 느끼고 눈앞이 깜깜했었는데, 저를 옆에서 찌르는 자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키더니 주춤하더라고요. 그 순간 가까스로 몸을 피했습니다만,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기호철은 강연호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자식아, 그게 뭐가 이상해, 그놈이 그 순간에 몸에 이상이 왔거나, 그랬겠지…….”

“음, 그런가요?”

“아 참, 인사가 늦었군, 목숨을 구해주어서 고맙다.”

강연호는 순간 영문을 몰라 멀뚱거리다가, 재빠르게 기호철의 표정을 세세하게 살폈다.

‘뭐야, 진지한 표정인데…….’

“저, 형님, 저는 산적 놈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하나 없었습니다.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들었다고요.”

“뭐라, 그럼 누가 날 구해 주었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기호철은 강연호에게 좀 전 채주와 싸우다 벌어진 일을 말해 주었다.

강연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저는 아니고요. 누군가가 저희를 도운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더 있어. 처음 우리를 공격했던 놈들이 우리를 따라오지 않았어. 만일 그들이 뒤에서 쫓아왔다면 우리는 양쪽에서 포위되었을 것이야.”

그 순간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표사 하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 표두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돼요?”

“그래, 뭐든 말해 봐.”

“사실 저도 죽을 뻔했었거든요. 그리고 딴 친구들에게도 물어봤는데 저와 똑같이 다들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하더라고요.”

기호철은 수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누군가 그 순간 도움의 손길을 주었다고 생각하는구나?”

“네, 그렇습니다. 아…….”

기호철은 수하의 놀라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뒤를 보십시오. 누군가 오고 있습니다. 한데 얼굴이 무척 낯이 익는데요. 만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기호철과 강연호는 동시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기호철이 놀라 소리쳤다.

“주성진이다.”

기호철의 놀라는 얼굴을 본 주성진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주성진입니다. 다들 휘주표국 소속이시지요?”

기호철이 대표로 나섰다.

“네. 그렇습니다. 혹 저희를 구해 주셨습니까?”

“구해 주었다기보다는 조금 도움을 드린 거지요. 오히려 저는 여러분이 분투하는 모습을 보고 무척 감명받았습니다. 특히나 목책을 돌파하는 그 작전은 아주 좋았습니다.”

기호철은 주성진이 사실상 구해 주었다고 시인하자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표행단을 대표해서 표두 기호철이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닙니다. 사해는 동포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아니더라도 그 순간 누군가 여기에 있었다면 분명 도움의 손길을 주었을 겁니다.”

“그래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주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저는 바삐 갈 데가 있어서 이만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은인을 붙잡고 술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저희도 북경에 가야 하는지라…….”

그러던 기호철이 자신의 머리를 세게 쥐어 박았다.

“아이쿠, 멍청하긴, 아무리 경황이 없더라도 표물을 받을 분을 망각하고 있었다니.”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희가 북경에 가는 이유가 바로 주 상단주님에 표물을 배달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혹 표물이 견직물과 면직물입니까?”

기호철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하하,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실은 제가 그것을 가져가기 위해 휘주로 내려온 것입니다. 급하게 필요한 데가 있어서 말입니다.”

주성진은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주성진은 멀리서 병장기 부닥치는 소리를 듣고 잠시 갈등했었다.

모른 척하고 그냥 가려다가 곧바로 그건 아닌 것 같아 발길을 돌린 거였다.

십중팔구 산속에서 칼부림이라면 누군가 산적들에게 공격받는 것으로 봐야 했기에…….

‘휴,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갔으면 자칫 길이 엇갈릴 뻔했구나. 역시 마음을 곱게 써야 해.’

“주 상단주님이 직접 물건을 가지러 오셨다는 말입니까?”

“네. 여기서 필요한 분량만큼 제가 가져가야겠습니다. 나머지는 천천히 뒤따라 오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 한데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실은 산적 놈들이 저희를 쫓아올 줄 알았거든요. 앞에서 목책이 가로막고 있으니 꼼짝없이 협공을 당할 형국이었습니다만…….”

“아. 그놈들은 제가 처리했습니다. 그놈들 중 한 놈을 붙잡아 심문했더니, 휘주표국을 노리고 있다고 실토하더군요.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하면 그놈들은 자발적으로 표물을 노리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그 짓을 벌인 거더라고요.”

“사주라고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새로이 녹림맹의 맹주로 뽑힌 자가 청부업을 병행하기로 선언했다고 하더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제가 녹림맹 놈들을 손 좀 봐야겠습니다.”

“직접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상단의 활동에 지장이 있으니까요. 그럼 놈들이 설치고 다니면요.”

*     *     *

북경에 돌아온 주성진은 옷감 문제를 해결하고 한시름을 놓았다.

‘아이구, 피곤하다. 좀 쉬자. 그나저나 연회가 있으면 당분간 북경에 계속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사실 주성진은 하루속히 휘주로 내려가 숙원인 휘주상단의 상단주로 취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잠이 들었다.

쿨쿨!

쾅쾅!

한데 심야의 방문객이 그를 깨우고 말았다.

“아이코 공주님이 이 밤중에 어인 일인가요. 부르시면 궁으로 달려갈 텐데 말이죠.”

공주는 톡 쏘는 눈빛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흥, 원래는 그러려고 했지요. 아버님이 당부한 말도 있고 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번에 새로이 유행한다는 옷감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어서요.”

주성진은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 결국 공주의 귀에도 흘러 들어갔구나.’

주성진은 변명을 시도했다.

“공주님, 제가 이곳 사정을 몰라서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렇지만 연회에 필요한 옷은 문제없도록 조치했습니다.”

“새로운 옷감이 개발되면 당연히 궁에 먼저 알려야 하는 게 상식인데 그걸 몰랐다고요?”

엄밀히 따진다면 그런 법도는 없었다.

하지만 북경에서 장사하려면 관례상 황궁에 먼저 알려야 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급한 사정이 있어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좋아요. 몰랐다고 하나 일단 그것은 넘어가죠. 하지만 내가 기분 나쁜 건 그런 좋은 옷감이 있으면 나에게 먼저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신에게 나는 기원의 기녀보다 못한 존재인가요? 그런가요?”

공주의 추궁에 주성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런! 일이 이렇게 흐를 줄이야. 아무튼 내 불찰이다.’

“공주님.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실은 휘주상단에서 저에게 시험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 상황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주성진은 슬퍼 보이는 공주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공주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슬픈 표정이다.

“그래도 저를 생각하지 못하다니, 많이 서운하군요. 뭐 제가 그대의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이 보잘것없으니 그런 거겠죠…….”

“공주님. 그건 아닙니다. 이미 제 마음속에 공주님이 들어가 있습니다.”

공주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그래요? 정말이죠?”

“네. 그렇다니까요, 공주님,”

“알았어요. 앞으로 계속 지켜볼 거에요. 호호.”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세요. 하하.”

“호호, 알았어요. 자, 이 문제는 일단락하고 두 가지 사항을 알려드릴게요. 하나는 연회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창과의 악연은 깨끗이 털어 버리라는 거예요. 이건 아버님의 간곡한 부탁이기도 합니다.”

사실 주성진은 자신의 암살 시도에 대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황제가 그걸 알고 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주성진은 내심 불만은 있었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아버지께서 동창 제독을 크게 질책하셨어요. 앞으로 사적인 원한을 앞세워 그대를 건드리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이죠. 사실 저는 동창 제독을 잘라 버릴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고요. 여전히 동창 제독을 신뢰하는 것 같아요.”

“아, 네…….”

주성진은 일부러 짧게 답했다.

황제의 조치에 왈가왈부하는 건 득보다 실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계책은 상당히 훌륭했어요. 나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 계책이었어요.”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공주님?”

“그대가 옷감을 홍보하기 위해 기원의 기녀를 이용한 것 말이에요. 역발상은 쉽지 않은데 그대가 그걸 해냈군요.”

주성진은 공주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과찬이십니다. 간절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휘주상단이 가지고 싶었나요? 지금 가진 것도 대단한데…….”

공주는 전생의 일을 모른다.

“네, 가지고 싶었습니다. 공주님도 보지 않았습니까. 휘주상단의 저력을요.”

주성진은 지금 휘주상단에서 새로운 안료를 이용해 옷감을 만든 걸 말하고 있었다.

“음, 그렇군요. 하여간 그대도 저 못지않게 야심이 크군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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