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조선 국왕의 부탁
쉬이익!
바로 그때였다.
자신이 펼친 강막을 뚫고 뭔가가 다가왔다.
주성진은 섬뜩함을 느꼈다.
‘뭐지, 이건…….’
위기일발의 순간, 주성진의 마음이 움직였다.
‘오로지 심검뿐이다.’
주성진은 마음의 검으로 정체 모를 자의 몸을 베어갔다.
마음은 곧 살의로 나타났고 살의는 실체로 변모했다.
“커어억!”
난데없이 허공에서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검을 무복을 입은 자가 가슴을 부여잡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주성진은 한동안 놀란 가슴을 부여잡으며 말이 없었다.
상대의 가슴을 자신의 심검이 꿰뚫는 그 순간, 그의 가슴에는 섬뜩한 칼날이 옷자락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자신이 먼저 죽었거나 아니면 동귀어진을 했을 수도 있었다.
‘도대체 저자는 뭐지?’
바로 그때 죽은 자가 꿈틀거리더니 주성진을 바라본다.
“크크, 대단하군.”
“죽지 않았소?”
“심장이 갈라졌다. 하지만 내겐 반각의 시간이 있다. 그 정도도 못 견딘다면 나! 허상객이 아니다.”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을 뒤집어 봐도 허상객이 누군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에 가득 의문을 담은채 주성진은 허상객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살수요?”
“그렇다. 고금제일의 살수를 꿈꾸었는데 너 때문에 좌절되었군. 하지만 심검에 당한 것이라 여한도 없고 후회도 없다.”
“그 말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허상객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난 최선을 다했다. 난 허무의 도를 깨우쳤어. 그래서 너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하늘이 나의 편이 아니었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더니, 네가 전설의 심검을 익히고 있을 줄이야.”
주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만일 지금의 상황이 아니라면 심검이 아니라도 그대를 이길 수 있었을 것이오.”
“뭐, 하긴 이기어검으로 승부를 보았다면 나를 이길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그건 내가 살수라는 걸 모르고 있었을 때야. 내가 너와 정면 승부할 리는 만무하니까. 안 그래?”
주성진은 그의 말에 달리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래. 저자는 살수였어. 오로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죽이는 것에 목적을 둔 자였지. 어쨌든 저자의 허무의 도는 굉장하구나. 내가 펼친 공간막을 뚫고 들어왔으니까. 좀 더 물어봐야겠어.’
“내가 펼친 공간막을 뚫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뭐, 그대의 공간막이 완벽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나 그대의 공간막은 충격으로 빈틈이 있었고 그 미세한 틈을 나의 허무검이 놓치지 않았던 것뿐이다…….”
“완벽하지 않았단 말이요?”
허상객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너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내가 없었다면 너의 공간막이 완벽하다고 여겼을 테니까.”
“음, 그건 그런 것 같소. 고맙소이다. 나를 깨우쳐주어서. 이것 참, 그대와 같은 초특급 살수가 나를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아 좀 전 화탄 공세도 대단했고.”
허상객은 그 말을 듣고 빙그레 웃는다.
“후후, 난 네가 누가 사주했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안 그러냐?”
“그대를 고용할 엄청난 청부금을 내놓을 수 있는 곳은 딱 한 곳뿐이지. 아마도 동창…….”
“클클… 내 죽기 전에 충고 하나 하지.”
주성진은 허상객을 바라보았다.
회광반조의 순간인지 초췌한 허상객의 얼굴이 멀쩡해져 있었다.
“세이경청하지요.”
“마음을 독하게 먹어라. 그래야 마음 편히 오래 살 것이다.”
주성진은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잘 와닿지 않습니다만…….”
“눈앞에 까부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야 얼씬거리지 못하지…….”
“그러면 세상이 재미없을 것 같은데요. 사람들과 부대끼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허상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려면 무공을 폐하고 평범한 상인으로 살아. 하하.”
“음…….”
“그럼 이만…….”
허상객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성진은 그를 고이 묻어주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나야. 난 내 방식대로 살 것이다.’
그 순간 동료들이 다가왔다.
주성진은 그들을 보자 반가움이 물씬 들었다.
하지만 나온 말은 그 반대다.
“왜들 왔습니까? 이리 위험한 곳을!”
“걱정돼서 말이지요. 주 상단주님은 저희가 주상단주님을 보내고 마음이 편할 줄 알았습니까?”
“음,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여간 지독한 놈들이었습니다. 화탄을 퍼붓다니 말이죠…….”
강국영이 대표로 나선다.
“저도 그 점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데 또 누군가가 있었던 것 같던데.”
“방금 묻어 주었어요. 비록 살수이지만 그의 무위는 대단했습니다.”
“도대체 누가 사주한 것이랍니까?”
주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살수가 의뢰자를 토설하는 것 봤습니까? 그대도 낭인회 소속이니, 그 점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에이 심증은 있는 것 같은데요.”
“알면 다쳐요. 자자 그러지 말고 돌아갑시다. 이제 곧 조선 땅이군요. 당분간은 별일 없을 것입니다.”
강국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분간이라뇨? 또 누가 노리기도 한답니까?”
“아마 그럴 겁니다. 내게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허허, 이것 참…….”
주성진은 고개를 돌려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배한나와 양은지, 이철용과 이도연 그리고 금탄호와 옥소소가 보인다.
“우리 자주 비무할까요. 제가 시간 나는 데로 비무에 응해드리지요.”
“정말입니까? 정말이에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보시다시피 저의 주변에 있으면 항시 위험이 상존한답니다. 그러니 제가 조금이라도 여러분에게 도울 수 있다면 도와야지요.”
“하루아침에 마음이 바뀐 이유라도 있습니까?”
금탄호가 물었다. 그는 일전에 비무 요청을 했다가 주성진에게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그냥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갑게 살려고요. 나는 나니까요. 하하.”
금탄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성진이 허상객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니 그럴만도 했다.
“부대끼면서 산다고요?”
“네, 이해가 잘 안 되면 당분간 그냥 저를 지켜봐 주세요.”
그 순간 옥소소가 방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방금 한 말, 마음을 닫지 않고 연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나요?”
“뭐 그렇긴 한데, 무슨 뜻으로 한 말입니까?”
“호호, 그런 게 있어요. 언젠가 제가 고백하겠습니다.”
배한나가 옥소소를 째려본다.
“언니, 너무 들이대지 마세요. 순서가 있다고요.”
“미안해, 그럼 네가 먼저 고백하던가, 호호.”
“…….”
* * *
‘아이코, 내 팔자야 나는 장사꾼이지 도적 잡는 추적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배탈이라니…….’
주성진은 투덜거렸다.
지금 주성진은 혈혈단신이었다.
유능한 길잡이와 주성진의 동료는 도적을 잡으러 오다가 모두 배탈에 걸린 탓이었다.
주성진만 심오한 내공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순간, 주성진은 며칠 전의 일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허허, 참…….’
사신단이 무사히 한양에 도착해 조선 국왕을 배알하고 국왕이 베푼 연회에 참석했을 때까지만 해도 주성진의 머릿속엔 오로지 사업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주홍이 무르익고 얼마 있지 않아 주성진은 조선의 국왕에게 불려가 모종의 부탁을 받았다.
“그대가 우리말을 유창하게 한다던데…….”
“과찬이옵니다.”
“음 방금, 사신단 단주로부터 그대가 엄청난 무인이라는 소리를 들었소. 하늘을 날고 지축을 뒤흔든다는…….”
주성진은 어리둥절했다
‘뭐야, 갑자기 무공은…….’
“폐하. 저는 무공을 익힌 일개 상인일뿐이옵니다. 엄청난 무인이라는 말은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음, 그대는 이야기 들었는 데로 겸손하군. 하하, 마음에 들었소. 실은 내가 제안할 것이 있소. 원래는 그대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데, 돌연 왜구가 남쪽 해안에 출몰하는 통에 무공을 익힌 정예들이 그쪽으로 대거 차출되었소. 해서 북쪽에서 내려온 도적들을 섬멸하는데 아무래도 수가 부족하오.”
“…….”
“해서 그대가 무인을 이끌고 도적들을 잡아주었으면 하오. 북쪽에서 내려온 도적들이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 일개 병사로 그들을 진압하기는 어려움이 있소, 게다가 조선의 지형은 산이 많은 지형이라 말을 타고 도적들을 추적하기는 애로사항이 많소이다.”
“…….”
“만일 그대가 수락한다면 그대의 상단에 내가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이다. 수락하겠소?”
주성진은 분위기상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 알겠습니다.”
“고맙소. 자세한 건 내가 사람을 보낼 테니 그에게 상세히 물어보시오. 아 도적의 수가 대략 오십이라 하더이다.”
그 순간 사신단 부단주의 전음이 주성진의 고막을 때렸다.
―미안하오, 정치적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시오. 그리고 말인데 그대의 일행들로도 충분히 도적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소. 기왕에 도움을 주는데 화끈하게 도와줍시다. 조선 국왕의 정예는 궁과 도성을 방어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폐하, 유능한 길잡이 한 사람만 저에게 붙여주십시오. 도적들을 상대하는 간 저의 일행들로 해결해보겠습니다.”
“오호, 고맙소이다. 북에서 내려온 도적들을 살려두면 나중에 명나라에도 손해를 끼칠 족속들이니 가차 없이 처단해주시오.”
“분부 받잡겠습니다. 폐하.”
* * *
주성진은 회상을 접고 소리만으로 방향을 감지하고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검은 허공을 휘휘 젖다가 그대로 아래로 내리꽂혔다.
스걱!
검이 무언가를 세차게 후려치는 순간 주성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로 앞에 한 사내가 가슴이 길게 배인 체 서 있었다.
순간 주위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땡그랑!
사내가 들고 있던 도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쿵!
주성진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눈길이 닿는 순간, 도적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이길 수 없는 강적을 맞이한 순간이었다.
열 명의 도적 중 가장 무위가 센 자가 몰래 다가가 기습을 했다.
하지만 상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검을 휘둘러 그를 죽음에 내몬 것이었다.
사실 그들 일행 열 명은 도적질하다 자신들의 본대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하필 지금 길목을 차단한 주성진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어쨌든 주성진은 혼자였다.
도적들의 수가 여전히 많은 건 바뀔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용기 있게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 순간 도적들의 뒤에서 체격이 우람한 자가 나타났다.
“머저리 같은 새끼들!”
“용호 부대장님!”
주성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것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소리친 자가 사투리가 심하긴 하지만 중원 말을 쓴 탓이었다.
‘뭐야, 그럼 중원인인가?’
그때였다.
방금 소리친 자가 허공에 자신의 거도를 힘차게 휘둘러본다.
쐐애애액!
바람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에 그는 절로 쾌감이 일었다.
그러고 눈을 부릅뜨며 주성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오라는 신호였다.
‘저놈이!’
주성진은 주저 없이 달려 나갔다.
한데 무슨 생각인지 자신의 검이 아닌 죽은 자의 도를 들었다.
‘내 검에 더러운 도적들의 피를 묻힐 수는 없지.’
용호는 감히 태만하지 못했다.
자세를 낮추며 거도를 허리 뒤로 감았다가 활시위를 놓듯 내뻗었다.
순간 그의 거도가 위맹하게 허공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