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다가오는 위험 (5)
주성진은 눈알을 부라렸다.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
“어리석은 질문이군요. 그걸 순순히 이야기해 주는 살수가 어디 있나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주성진은 상황이 점점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좀 전 현기증이 나고 눈꺼풀이 무거운 것이 잠시 간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아아. 뭐지, 잠이 쏟아질 것 같구나, 내가 뭔가에 당한 것인가……?’
자신의 높은 공력 덕에 웬만한 독을 무서워하지 않는 주성진은 지금의 상황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정신 차리려 급히 고개를 여러 번 흔든 순간 연우의 목소리가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 잠이 오지 않나요?”
주성진은 그녀의 목소리가 멀리서 아련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음, 이건 비정상적이야.’
주성진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주성진은 수마와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내가 혹 수면 독에 당한 것인가? 시중에 그런 것이 있다는 걸 듣긴 들었었는데… 다만 무림에서는 수면 독보다는 마비 독을 선호하지만…….’
주성진은 연우를 바라보았다.
“이거 혹 수면 독이냐?”
“뭐 정확히는 전설의 천라수면독이죠, 호호호.”
“그렇다면 너희들이 들고 온 향초가?”
주성진은 그녀들이 방으로 들어올 때를 상기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굵은 초를 들고 있었는데 초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났었다.
“호호. 처음엔 진짜 향초였죠. 하지만 저희가 수면 가루를 뿌린 순간, 향초의 향은 수면 향으로 탈바꿈한 것이랍니다.”
“그럼 내가 바닥을 뒹굴 때 뿌린 것이냐?”
“맞아요. 뭐 이 정도면 정성스레 답을 한 것 같고… 한데 왜 아직 잠들지 않는 거죠. 공력이 심후해서 그런 건가요?”
지금 주성진의 내부에서는 잠을 이겨 내기 위해 치열한 투쟁 중이었다.
모든 공력이 잠을 이겨 내기 총동원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성진은 그녀들이 하독한 수면 독이 이렇게 지독한 줄 몰랐다.
순간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홍이라고 소개한 여인이었다.
“이봐요. 대답이 없는 것을 보니 공력이 심후하긴 한가 봐요. 뭐, 이기어검의 고수로 소문나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호호.”
주성진은 감기려는 눈을 부릅뜨고 소홍을 바라보았다.
“애초에 날 알고 있었군!”
“이곳 총관이 인물화를 잘 그리던데요, 그래서 바로 알아보았지요. 호호.”
주성진은 그녀의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뭐 따지고 본다면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다.
뭐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이곳 총관? 그럼 너희들은 여기 소속의 기녀가 아니었구나. 아니 살수…….”
“오라, 이곳 기원을 의심하고 있었군요. 한데 어쩌죠. 우리는 이곳 소속이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소홍이 빙그레 웃는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이곳 기녀들이 모조리 차출되는 통에 우리에게 기회가 온 거죠.”
“차출되었다고?”
“조선 사신단.”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군. 환영 만찬이 오늘이었지…….’
“이제 어떡할 거냐?”
주성진은 잠을 내쫓기 위해서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들에게 계속 말을 붙이는 게 최선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냐면요… 호호, 시간이 무르익은 것 같네요. 본전을 뽑을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랍니다.”
“본전을 뽑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애초에 당신이 가향이에게 당했다면 이럴 필요는 없었죠, 하지만 당신은 가향의 공격을 피했고 우리는 천금을 주고 산 수면 독을 살포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해서 당신을 좀 심하게 다루어야겠어요, 본전을 뽑기 위해…….”
“…….”
“온전한 시신은 남겨두려 했는데 그냥 부셔서 바람에 날려 보낼게요. 호호.”
그러면서 소홍이 탁자를 빙 돌아 주성진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연우도 그녀를 뒤따라오고 있었다.
주성진은 그녀들이 다가오자 조금씩 뒤로 물러났다.
‘안 돼. 조금 더 시간을 끌어야 해. 가만 저년들은 멀쩡하잖아. 후, 그렇구나 해독약을 미리 복용한 게 틀림없어…….’
주성진은 수마와 싸우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봐, 나와 타협하자. 내가 돈 많은 상인이라는 건 잘 알 테고.”
소홍이 피식 웃는다.
“호호.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네요. 살수가 조직을 배신하면 죽음이거든요. 저희는 죽음의 위협 속에 평생 쫓겨 다니며 살고 싶지 않네요.”
“각자 100만 냥을 주겠다!”
100만 냥이면 엄청난 거금이다.
하지만 소홍은 이내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요, 우리는 당신의 공력으로 만족할래요. 다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방중술을 펼치지 못해 아쉬울 뿐이죠.”
“방중술이라니?”
“어머, 성인군자인 척하는 건가요? 남녀 간의 교합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요.”
“그러니까 원래는 방중술로 내 공력을 갈취하겠다는 것이었더냐?”
초홍은 고개를 끄떡였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닌가요. 아마 저와의 운우지락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아, 아니구나! 정정할게요. 하늘나라에 가서도 잊혀지지 않을 거예요. 호호호.”
“결국, 나를 죽이겠다는 거군. 한데 내 공력을 어떻게 갈취하겠다는 거냐?”
“마교의 흡성대법이죠, 당신의 단전에 손을 얹고 공력을 빼내 가겠어요.”
순간 연우가 끼어들었다.
“소홍아 혼자선 안 돼, 우리는 한꺼번에 저자의 단전에 손을 얹는 거다.”
“그건 연우의 말이 맞아. 누가 더 공력을 더 많이 가져갈지는 모르지만, 출반 선은 공평해야 한다고! 안 그래 소홍아?”
그간 말이 없었던 가향의 말이었다.
주성진은 그녀들을 노려보았다.
‘저것들이! 음 그나저나 마교의 흡성대법이라, 한낱 전설로 치부했는데 실제 존재하고 있을 줄은 몰랐군.’
주성진은 살수 주제에 그녀들이 어떻게 흡성대법을 익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거기에 더해 지독한 수면 독까지…….
사실 천라수면독만 하더라도 굉장한 물건이라고 생각했는데, 흡성대법은 아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조금씩 죽음의 그늘이 드리우자 주성진은 자신의 그간 행적이 주마등같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제길,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이제 고지가 눈앞이거늘.’
주성진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새삼 삶의 의욕이 불타오른다.
‘안 돼, 이대로 허무하게 죽을 순 없어,’
주성진의 뇌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던 순간 그의 눈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맡기자, 무의식에 모든 것을…….’
주성진은 위기마다 발동되는 또 다른 자아를 완전히 믿어보기로 했다.
사실 그거 외에는 방법도 없었고.
‘좋아. 그럼 공력을 원래대로 돌리고 잠에 빠져 볼까. 결과는 하늘에 맡기고.’
수면에 저항하던 공력을 풀어 버리자 곧바로 잠이 쏟아졌다.
주성진은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고 자신에게 달려드는 세 여인의 차디찬 감촉을 느끼며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그녀들은 흡성대법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성진의 상의를 들어 올리고 직접 손을 갖다 대었다.
“음냐음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주성진이 눈을 뜨자 촛불이 켜져 있고 주변에는 걱정스러운 모습의 원주와 부원주 그리고 총관이 초조하게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깨어나셨군요.”
원주가 말했다.
주성진은 이불을 치우고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기방이 아닌 다른 방에 누워 있었다.
“지금 시각이?”
“곧 있으면 새벽이랍니다.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제 동료들은요?”
원주가 재차 입을 열었다
“아직 잠을 자고 있습니다. 호흡이나 맥박은 정상입니다.”
“아. 그래요, 지독한 수면 독에 걸려서…….”
“네? 수면 독이라고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원주가 부원주와 함께 깊숙이 허리를 숙인다.
“정말 죄송해요, 은혜를 갚는다는 것이 비수를 들이민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닙니다. 이곳 기녀들이 관가에 차출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하.”
“그래도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나름 방법을 찾은 것인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주성진은 손을 흔들며 아까부터 말을 하려고 입을 들썩이는 총관을 바라보았다.
“총관님. 저를 발견했을 당시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네,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실은 제가 기방을 관찰하고 있었는데요. 어느 순간 너무나 조용해서 안을 살짝 들여다보니, 주 상단주님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료분들은 탁자에 엎어져 있었고요.”
“…….”
“저는 곧장 안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방문을 열어젖히고 창문을 모두 열었습니다. 방안에 가득 기이한 향이 코를 찌르는데 직감에 좀 이상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데려온 기녀들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보았습니다.
“…….”
“한데 기녀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얼굴이 쭈글쭈글해진 노파 셋이 죽어 있습니다. 순간 저는 너무 놀라 소리를 질렀지요. 얼굴만 쭈글쭈글한지 알았는데, 몸까지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었습니다.”
“…….”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노파들을 자세라 살펴보니 그녀들의 옷이 바로 제가 데려온 여인들의 옷과 일치했습니다.”
주성진은 정확히 어떻게 된 노릇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상황이 자신으로 인해 그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음, 그러고 보니 단전이 묵직한 것 같아, 뭔가 있어.’
“아, 그렇군요. 하여간 다행입니다. 저는 이 길로 바로 객잔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제 동료 두 사람을 옮길 사람을 수배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부랴부랴 객잔으로 돌아온 주성진은 급히 가부좌했다.
‘만일 그녀들이 오히려 내게 당한 것이라면 그녀들의 공력을 모조리 내게 옮겨 왔을 거야. 하면 이종 진기 같은 불순한 진기는 태워 버리고 나머지 것들을 모조리 흡수하자고.’
주성진은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후후, 위기 속의 기회라더니, 공력이 오히려 늘어나게 되었군. 그리고 사실 이게 더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내게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야. 나의 또 다른 자아에게.’
주성진은 그런 확고한 믿음이 자신을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잘하면 심검에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을 거야.’
시간이 흐르고 주성진은 가부좌를 풀었다.
환한 미소를 지은 주성진은 시각을 알기 위해 모래시계부터 찾았다.
‘세 시진이 지났군. 다행이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주성진은 저도 모르게 기지개를 켰다.
‘하하, 기분이 상쾌하군. 음 모르긴 몰라도 최소 3갑자의 공력이 늘어난 것 같아. 거기에 공력이 늘면 늘수록 운기조식도 점점 빨라지는구나, 과거 같으면 이 정도의 기연이면 사나흘은 꼬박 운기조식에 매달려야 했는데 말이지.’
잠시 후, 주성진은 급하게 객실에서 나왔다.
‘하오문 지부장을 만나야겠어. 급한 일은 없는 것 같으니.’
주성진은 용의주도하게 운기조식 전에 점소이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객실을 지키게 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방문객은 사양이라고, 대신 자신을 만나고자 한 사람이 있으면 쪽지를 남겨 두라고 했는데, 아무도 없는 듯했다 없었다.
1층으로 내려온 주성진은 객잔 밖으로 나가려다 음식점 곳곳을 둘러보았다.
혹시나 자신들의 일행이 있나 싶어서였다.
순간 자신의 일행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도 주성진을 알아보고 반색한다.
“다들 안녕하시네요. 미안하지만 내가 잠시 어딘가에 다녀올 터이니 돌아와서 이야기 좀 하시지요.”
“어디를 가시게요?”
“하오문 지부에 갔다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