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조선으로 향하다 (6)
잠시 후, 주성진은 묵묵히 검을 들어 중단세를 취했다.
한데 의뢰로 좌시랑은 창을 들고 있었다.
‘뭐야, 저 사람…….’
주성진은 창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검수 아니었습니까?”
“창도 검 못지않게 익혔소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주변에는 낮잠을 청하려던 병사들이 소식을 듣고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이 비무가 낮잠보다 더 중요했다.
언제 고수들의 비무를 본 적이 있었던가…….
더구나 흔하지 않은 비무였다.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을 것 같은 고위관료가 비무를 한다고 하니까…….
“오십시오.”
“그럼 먼저 가겠소.”
좌시랑은 천천히 주성진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일단은 조심하고 보던 예전의 자세를 완전히 벗어 낸 듯 보였다.
‘하하, 내가 마음껏 무공을 펼칠 순간이 올 줄이야. 주성진은 나보다 고수이니까 다 받아 줄 거야. 뭐 그렇다고 순순히 질 생각은 없지만…….’
좌시랑은 자신의 무공에 나름의 자부와 확신을 가진 듯 보였다.
그 순간 관전하던 장군의 미간이 은근히 찌푸려져 있었다.
‘허허. 저저 친구. 검을 들지 않고 창을 들다니…….’
장군은 창을 든 좌시랑의 무모함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음… 내가 비록 그의 무공을 모른다지만, 주성진에게 창을 든다? 이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이라고. 혹 주성진이 봐 줄 것이라고 생각한 건가?’
한편으로는 좌시랑이 본인 입으로 말한 것처럼 자신이 있으니 창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음, 창의 장점을 최대로 이용할 생각인가?’
검과 창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그 길이에 있다.
창술의 근본은 길이의 이점을 살리는 데 있엇다.
단병을 사용하는 상대와의 공방에 있어서 접근을 허용치 않으면서 길이로 인해 발휘되는 우위를 온전히 취하는 것이 중요했다.
‘빠른 움직임에 자신 있다는 건가?’
아무래도 창으로 검을 쥔 자를 상대하려면 움직임이 재빨라야 했다.
검을 든 자는 창의 예봉을 피하면서 빠르게 접근전을 시도할 게 뻔한데, 만일 검수보다 동작이 둔중하면 결국엔 거리를 허용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장군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주성진에게 돌렸다.
한데 그만 또 한 번 기함하고 말았다.
‘뭐야, 저 자세는…….’
주성진은 상대가 움직이자 본인도 따라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데 접근전은 별로 생각이 없는 듯 검을 가슴 앞으로 세운 자세 그대로 곧장 창을 가진 상대의 정면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느릿하며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직선의 걸음걸이로…….
‘허허, 기본 원칙을 무시하는 건가? 아무리 무림의 고수라고 하지만.’
검을 가진 자는 으레 병기 차에 의한 길이의 불리함을 극복해야 했다.
그 방법으로 빠른 발놀림을 통해 창을 쥔 자의 약점인 안쪽으로 파고드는 게 보통의 경우였다.
장군은 이제껏 좌시랑의 무모함을 탓하고 있었지만, 주성진의 모습을 보고 난 후는 그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좌시랑이 의외로 창을 들었다고 비난했지만, 주성진은 상대 무기의 이점을 개의치 않고 있었다.
주성진의 그런 모습은 산전수전 다 겪은 장군의 상식으로는 용납되지 않았다.
‘허허, 저건, 자살행위라고!’
장군은 갑자기 두통이 몰려오자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신나게 관전이나 하자고…….’
하나, 그것도 잠시. 장군은 많은 병사의 무위를 돌봐 준 경험 때문인지 도무지 조용히 있지를 못한다.
‘하하. 이것도 병이야. 둘 다 고수인데도 훈수를 두고 싶다니…….’
장군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신의 습성을 못마땅해하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한데 주성진을 보는 순간 그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상대와의 거리가 가까워짐에도 전혀 아랑곳없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였다.
‘허허,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창을 정면으로 상대해서는 이득을 볼 게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검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길게 휘둘러 치는 창 끝단에 실린 힘을 한낱 검으로 맞부딪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리한 싸움을 자초하는 거였다.
‘음, 최대의 힘이 실린 창의 끝단을 피해 창대의 중간이나 그 안쪽을 가격해야만 힘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는데 말이야. 에이 참 안타깝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검기를? 에이 아니야. 친선 비무에 검기를 내뿜는다는 건 욕을 바가지로 듣는 짓이라고!’
장군은 주성진이 검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었다.
그 순간에도 주성진은 정면 격돌을 피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장군의 입술이 실룩였다.
‘정면을 버리고 측면으로 돌아가라. 최대한 거리를 좁힌 다음에 틈을 엿보라고.’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를 내지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전음으로 말할까.’
그러다 그는 급히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내가 비무에 관여하면 안 되지…….’
사실 장군은 주성진의 무위를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참견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건지도 몰랐다.
순간 장군은 주성진의 일행 중 아는 자와 눈이 마주쳤다.
‘뭐야, 평온한 얼굴인데. 그만큼 주성진의 무위를 믿는다는 것인가!’
돌연 그의 마음속에 한 가지 작은 파문이 생겼다.
‘그래. 혹 상대의 병기를 무시할 정도의 압도적인 힘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진다.
‘좋아. 기본 원칙을 깨버린 주성진의 검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지 한번 보자고!’
탕! 타타탕!
창극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고지식하게 정면으로 걸어 들어오는 상대에 대해 좌시랑은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적당한 거리를 맞추고 있었다.
창을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상대와의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창의 힘을 마음껏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게 휘둘러진 창극이 주성진의 검신을 후려치는 순간마다 그 반탄력으로 인해 창대가 크게 휘어졌다.
그리고 그 탄력은 새로운 힘으로 덧붙여져서 다시 주성진의 검을 때렸다.
창이 길이만큼의 원심력을 일으키고, 더하여 창대의 탄력까지 온전히 이용할 수 있으니 그 힘이 어마어마하리라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었다.
따다다다당!
길고 짧은 두 자루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장군의 얼굴이 또다시 갸웃거려졌다.
‘음, 검이 부러져도 벌써 여러 번은 부러졌을 텐데…….’
주성진의 검은 창극에 부닥쳐도 전혀 기울지 않았다.
그 말은 창의 위력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는 증거였지만, 한편으로는 검이 고스란히 창의 충격을 받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맞붙고 있는 좌시랑은 알고 있었다.
주성진이 내력으로 검을 보호하고 있음을…….
여하튼 주성진은 엄청난 창극의 충격을 연달아 받아내면서도 시종일관 묵묵한 모습으로 비무에 임하고 있었다.
또다시 장군의 입이 근질거린다.
‘음, 보통의 경우였다면 팔목이나 어깨에 극심한 충격을 받았거나 최소한 검을 잡은 손아귀가 견뎌내지 못했을 텐데, 검을 굳게 움켜잡고 가슴 앞으로 곧게 세운 그의 자세에는 여전히 흔들림이 없단 말이야.’
그 순간 장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대단한데…….”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를 친다.
그가 탄성을 지를 만큼 창은 강력하고도 현란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힘에 변화를 더하고 있는 거였다.
쉭쉭쉭!
좌시랑이 손아귀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는 창대를 거쳐 창극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예측할 수 없는 천변만화의 움직임을 선사하고 있었다.
순간 주성진의 담담한 얼굴에 처음으로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변화를 일으켰구나…….’
좌시랑의 손목에서 일어난 변화는 창대를 거치면서 증폭되어 예기치 않은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음, 창술의 대가와 싸운다는 게 많이 힘들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하겠군. 창의 길이에다 창대의 탄력까지 감내해야 하는 것이니까…….’
바로 이때, 주성진은 압도적인 힘으로 창대를 잘라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아니지. 비록 시작한 단순한 비무지만 지금은 만인이 보고 있잖아.’
주성진은 창대에서 일으키는 변화가 지금까지 겪었던 권과 검의 변화들과는 또 다른 묘미가 있음을 발견했다.
‘하하. 그래! 마음껏 날뛰어 보시오. 난 나대로 정중동을 지향할 테니…….’
나름의 변화라면 변화였다.
주성진이 택한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은 아주 미세한 변화, 겉으로 봤을 때는 아무 움직임이 없을 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던 주성진의 걸음은 결심과 동시에 멈추어져 있었다.
언뜻 그의 검은 그의 가슴 앞에 가만히 정지해 있었는데, 무수한 창영들이 검에 와서 무작위로 부딪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켜보던 장군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어찌 저런 것이야. 승부는 좌시랑의 승리로 진즉에 끝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그 순간, 장군은 좌사랑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음, 정중동의 경지로구나…….’
좌시랑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모든 걸 쏟아붓는 데만 집중하자. 후회 없이, 원 없이 말이야.’
좌시랑은 기합을 내질렀다.
“야합!”
순간 변화 속에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 그런 화려한 변화 속에서도 주성진은 상대의 창이 호시탐탐 전신 요혈을 노리고 있는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심하게 창극의 변화만 바라보고 있었다.
‘변화의 상극은 부동이지…….’
주성진이 읊조리고 있는 화두는 사실 무림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화두였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만변을 제압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주성진은 내심 웃고 말았다.
‘뭐 또 이런 말이 있지. 부동을 이기는 건 부동을 능가하는 변화라고…….’
말 짓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만들어 낸 화두는 어쩌면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상황에 따라 양면적이고 주관적이었다.
주성진은 지난날 자신이 보여주었던 격렬하고도 화려했던 몸놀림을 생각하다가 살짝 미소짓고 말았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그때와 너무나도 많이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든 상대적인 것이니까…….’
쉭!
쉬쉬쉭!
허공을 찢어발기는 창극의 소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날카로웠고 그 순간 창끝은 주성진의 옷자락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아아아…….”
순간 한치의 걱정 없이 주성진의 비무를 지켜보던 일행들의 눈에 순간적으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장군은 이제야 승부가 났다고 생각하고는 아예 목을 길게 뽑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주성진의 앞가슴 옷자락이 몇 군데나 베어져 바람에 나풀거리고 있고 그사이 언뜻언뜻 맨살이 비치고 있었다.
장군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주성진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고, 좌시랑의 공격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음, 끝난 게 아니었어?’
금방이라도 주성진의 붉은 피가 옷깃을 적시고 흘러내릴 것 같았는데 전혀 그런 기미가 없다.
‘분명 창끝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는데…….’
한편, 주성진은 마음속으로 경동하고 있었다.
‘뭐야 팔이 늘어나다니, 비록 약간이라고 하지만 그 약간 때문에 옷깃에 잘려나갔다고, 세상에 그런 무공이 다 있어!’
주성진은 무림은 까고 또 까도 양파의 속껍질 같은 것이라는 것을 새삼 절감하면서 다시
냉철한 자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제 천천히 승부를 보자! 정중동을 풀어 버리고……!’
주성진은 아울러 상대 내공의 깊이를 알고 싶어졌다.
의외로 좌시랑의 내공은 질기고 끈질긴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핫!”
띵!
띵, 띵!
검에 맞는 창의 소리가 힘겹다고 느끼면서 좌시랑은 서서히 패배를 직감하기 시작했다.
‘천축 유가공에서 유래한 변칙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어. 그의 호신강기때문에…….’
좌시랑은 주성진의 옷자락을 베는 순간, 미증유의 힘에 막혀 자신의 창이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휴, 나중에 그가 뭐라 하겠어, 나는 왜 그 순간 최후의 구명 절초를 떠올렸는지, 쯧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