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조선으로 향하다 (5)
주성진은 급하게 손을 휘휘 저었다.
‘허허, 저자 봐라, 아까부터 계속 삐딱선인데… 자칫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뼈도 못 추리겠는어…….’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 생각에 좌시랑께서 완벽히 기세를 갈무리할 수 있다는 건, 세 가지 중 하나의 상황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주성진의 말에 상서와 장군도 크게 관심을 둔다.
그들도 좌시랑이 어떤 유의 무공을 익혔고 어느 경지에 다다든지 궁금해 했다.
순간 주성진의 말이 이어졌다.
“첫째는 반로환동에 버금가는 경지에 오른 것, 둘째는 도문의 최고 무공을 익힌 것, 마지막으로는 공가유문의 무공을 익힌 것입니다. 아, 여기서 제가 부연 설명하자면 무공의 기척을 죽이는 무공은 많지만 제가 말하는 바와는 결을 달리합니다.”
장군은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며 주성진을 바라본다.
“기척을 죽이는 무공이 아니라면 그게 도대체 무엇이오?”
주성진도 사실 이 사실을 안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북경에서 인수하기로 한 서점의 고서적을 보고 안 내용이었다…….
“그건 바로 기척을 자연스럽게 숨기는 무공이지요. 감추는 무공이라고 표현해도 되겠네요.”
장군이 다시 묻는다.
“음, 그 두 차이가 바로 머리에 들어오진 않소만…….”
“기척을 죽이는 무공은 잘 아시다시피 은둔술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적이 바로 공격한다면 기척을 죽이는 무공을 원래대로 풀어야 하기에 반응이 늦기 마련입니다. 하나 기척을 숨기는 무공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음, 그렇지만 일급 살수들이 반응이 늦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진 못했는데…….”
“그건, 그들이 숨어서 표적을 암살하려는 경우에 내공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만큼은 뭐, 날카로운 병기에 의존한다든지 아니면 순수한 근력 혹은 외공에 의존한다고 봐야겠지요.”
장군은 처음 듣는 말이지만 주성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하. 이거 주 상단주가 옆에 있으면 무공 상식이 풍부해지겠소이다. 하면 좌사랑은 어떤 경우요?”
장군과 좌시랑은 품계가 같았다.
나이는 좌시랑이 어렸지만…….
“좌시랑께서는 아마 공가유문 출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공자님의 직계 후손이신 것이죠.”
성으로 공 씨를 사용한다고 모두 공자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쏠리자 좌시랑이 입을 열었다.
“주 상단주의 말이 맞습니다. 이거 참 대단하군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저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죄송하지만, 북경의 서점에서 고서적을 보기 전까지는 공가유문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공가유문은 공자의 직속 후대들이 만든 문파였다.
무림에 관여하기보다는 유문을 위협하는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발전 계승해 온 것이 유구한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에 이른 거였다.
좌시랑은 주성진의 말을 이어 받았다.
“하하. 뭐, 모래알같이 무수히 많은 무공이 존재하는 게 무림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기척은 숨기는 무공쯤이야 하등의 이상한 일은 아니지요.”
장군은 자신이 모르는 무공이 있다는 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자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장군은 재차 좌시랑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무공 수련은 어떻게 하오? 무공을 숨길 정도면 무공 수련도 남이 보지 않은 으슥한 곳에서 할 것 같은데.”
“하하. 선배, 뭘 그리 토라졌습니까? 제가 무공을 익힌 건 비밀이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상서 대인도 알고 있고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답니다. 다만 궁궐에 있을 때는 부족한 무공 수련을 심상 훈련으로 대체하곤 하지요. 설마 심상 훈련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요?”
“이 사람, 마음속으로 무공 수련한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나. 하지만 이 또한 쉬운 게 아니라는 건 잘 알지…….”
좌시랑을 빙그레 웃으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주 상단주, 그대가 답을 해 주시오.”
주성진은 좌시랑이 공을 슬쩍 넘기자 내심 짜증이 났다.
‘저자는 왜 나를 귀찮게 하는 거야.’
“글쎄요. 사람마다 익힌 무공이 다르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심상 수련은 저도 가끔 하는 편입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게 관건인데, 일단 그 고비를 넘긴다면 심상수련도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지요.”
장군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계속 그에게는 혼동의 연속이다.
“음, 마음을 고요히 한다는 건 정확히 무슨 뜻이오? 누구나 운기조식할 때 마음을 고요히 하지 않소이까?”
“그게 좀 다릅니다. 심상 수련이란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나야 하는 게 전제조건이랍니다. 하여 마음이 고요하다는 건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나더라도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장군은 알 것 같으면서도 뒤돌아서면 무슨 말인지 모를 것 같았다.
“음…….”
그 순간 좌시랑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주 상단주의 말은 선배가 그런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으니 꿈도 꾸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성진은 본인의 뜻을 비틀어 말하는 좌시랑이 미웠다.
“아닙니다. 장군님, 그런 뜻은…….”
장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외다. 내가 주제 파악을 못했소이다. 처음엔 좌시랑이 공가유문인지, 뭐인지, 아무튼 그쪽 출신이라 단지 특수한 내공을 익힌 것이 나와 차별점이라고 이해했소이다. 한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도 그것이지만 무공의 경지가 나보다 훨씬 위라는 것을 깨달았소이다.”
“아, 네…….”
주성진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술을 기울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상서 주원래가 돌연 주성진에게 은근한 눈빛을 보낸다.
“주 상단주. 황궁의 권력 다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뭐 그대도 예외는 아닌 것 같은데…….”
그가 예외가 아니라고 말한 건, 주성진이 공주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었다.
‘뭐,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내가 공주를 안 이상 나도 권력 다툼에서 피해 나갈 수는 없어.’
“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도가 지나쳐 황권을 위협하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진다면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하하, 지극히 교과서적인 답이구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우리 같은 관료들이 비록 서로 파벌이 있지만, 공통으로 두려워하거나 경원시하는 존재가 있소이다. 그게 어떤 세력일 것 같소?”
주성진은 그가 자꾸 술맛 떨어지는 말을 하자 빨리 이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고 싶어졌다.
‘제길. 저들도 다 아는 이야기를 왜 나한테 묻고 난리야?’
“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이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오. 누구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좀 많이 힘들 거든…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세력을 좀 키우려고 하오. 하지만 이 일은 우리 힘으로 부족하고 상단의 도움이 필요하오.”
주성진은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뭐야. 동창과 대적하는데, 돈이 필요하다는 거야?’
“그러니 우리가 가진 땅을 좀 사주면 안 되겠소? 예전에는 비옥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관리하지 않아 황무지가 된 곳도 많소이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하사한 땅이라 함부로 팔기도 그렇고… 해서 말인데 상단에서 사 준다면 참 좋을 것 같소이다. 하하.”
“저희에게 판다면 나라에서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5대 상단에 땅을 판다면 나라에서도 좋아할 것이오. 황무지를 비옥한 땅으로 만들면 식량도 늘어날 것이고 동시에 세수도 늘어나니까. 나라에서는 일거양득인 셈이지…….”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스러웠다.
“저. 외람된 말이지만 굳이 저희가 아니라도 신분이 확실한 곳에 팔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아니요. 그게 그렇지 않소. 큰돈을 가진 곳이 오직 5대 상단뿐이오. 그리고 아까도 말했다시피 5대 상단쯤 되어야 나라에서 인정한단 말이오.”
주성진은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듯했지만 일단 수긍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손해가 나지 않는 범위에서 매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서는 흡족한 모습으로 주성진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하. 고맙소, 장담하건대 절대 손해 보지는 않을 것이오. 이제 주 상단주까지 승낙했으니 5대 상단은 거의 다 해결된 셈이오. 아, 휘주상단만 빼고 말이오. 음…….”
주성진은 그의 말에서 다른 상단과는 이미 이야기가 다 된 걸 알 수 있었다.
휘주상단은 혼란한 상황이니 그럴 만했고.
‘음, 내가 왜 마지막일까. 아, 그렇구나. 관과 상단은 예로부터 끈적한 사이였지. 다만 나는 새로이 부임해서 파악이 안 된 것이고…….’
주홍이 도도하게 익어가자 돌연 좌시랑이 비무 제안을 해 온다.
주성진에게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좌시랑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도 나름 무공을 열심히 익혔지만, 늘 고만고만한 상대와 비무를 하다 보니 그로 인한 갈증이 매우 컸다.
지신보다 높은 경지의 인물과 비무를 해야 자신의 진짜 실력을 알 수 있는 법이었다.
주성진은 그의 말에 일단 난색을 표하고 본다.
그와 무예를 겨루는 게 잘해야 본전이라는 건 산천초목도 알고 있었다.
“여긴 장소가 협소해서…….”
“뭐 장소가 협소한들 그게 무슨 짐이 되겠소. 좁은 장소도 하나의 무대 장치라고 생각하고 한번 붙어 봅시다. 만일 내가 땀을 비 오듯 쏟는다면 그대에게 가문의 보물 중 하나를 선물할 용의가 있소이다.”
주성진은 그의 말에 회가 동한다.
어차피 거절하기 힘든 청인데 잘하면 선물까지 챙길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선물이라 함은?”
“그건 가문에서 우연히 습득한 비급이오. 불문에서 유래한 봉술 같은데 소림의 것은 아니외다. 그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소이다.”
주성진은 봉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황궁 무고에서 가져온 녹슨 쇠막대기가 생각났다.
‘잘됐군. 봉술이라… 쇠막대기와 잘 어울리겠어.’
쇠막대기는 저번 황궁 무림대회 때 경공 시합에서 우승하고 하사받은 거였다.
정확히는 황궁 무고에서 무기 하나를 취할 수 있는 특권이었지만, 그곳에는 쓸 만한 무기가 거의 없었다.
주성진은 무게가 꽤 나가는 쇠막대기를 무고 구석의 먼지 구덩이에서 발견하고 이를 취한 것이었다.
주성진은 쇠막대기의 진가를 알아보고 쾌재를 불렀지만, 지금까지 이를 쓸 기회가 없었다.
“하하. 그럼 무예를 겨뤄 볼까요?”
“고맙소이다 내 청을 수락해 줘서.”
“별말씀을요. 제가 오히려 한 수 배울 것 같습니다. 하하.”
주성진은 좁은 천막 안에서 상대가 어떻게 나올까 궁금하던 찰나에 좌시랑이 자신에게 손짓하는 것을 보았다.
“나갑시다. 비무하러…….”
좌시랑이 천막 밖으로 나가려 하자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서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아까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은데…….”
“난 장소가 협소하다는 말을 했지, 여기서 하자는 말을 한 적은 없소이다.”
“음, 그게 그 말 아니었습니까?”
좌시랑은 주성진이 정색하자 본인이 오히려 놀랐다.
‘뭐야, 저 친구! 천막 안 좁은 장소에서 무예를 겨룬다고 생각한 자체가 일반 상식을 훨쩍 뛰어넘는구나, 그렇게 무공에 자신 있단 말인가?’
“이보시오, 내가 말한 좁은 지역이란 이 주변을 이야기한 것이오. 여기도 따지고 보면 마음껏 무공을 펼치기에는 좁은 지역 아니겠소. 자칫 힘이 과하면 애써 세운 천막들이 상하거나 날아가 버릴 것이오.”
“음, 알겠습니다.”
“무기는 일반 병사들에게 빌려 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