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조선으로 향하다 (4)
잠시 후, 그들이 떠나고 금탄호와 옥소소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두 사람은 주성진의 놀라운 무위와 박력 있는 행동에 진심으로 매료된 상태였다.
옥소소가 들뜬 표정으로 주성진을 바라보는 동안 금탄호가 말문을 열었다.
“이거 조선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군요. 기상 이변에다 난데없는 늪지대에 독충까지…….”
“늪지대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것이지만, 독충은 사람의 짓이었습니다.”
“아, 그래요? 역시 그렇군요…….”
주성진은 차분히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다.
“…이상입니다.”
이야기를 경청한 두 사람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 있었다.
한숨을 내쉰 금탄호가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이거 자칫 전쟁이 일어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 생각에 당장 전운이 감돌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기를 못 박는 건 어렵지만 언젠가는 전쟁이 터진다는 건 분명하겠네요.”
“저희 같은 예인들은 나라가 뒤숭숭하면 쫄쫄 굶을 수밖에 없습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누가 연주를 들으려 하겠습니까…….”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건 그렇겠네요. 하지만 좀 전에도 말했듯이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혹여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저를 찾아오십시오. 제가 일감을 드리지요.”
“무슨 일감을 주시려고요?”
“두 분의 음공이 필요한 곳은 생각보다 많을 듯싶은데요? 하하.”
순간 옥소소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 주 상단주님. 저는 당장 상술을 배우고 싶은데요. 제가 제힘으로 객잔을 차리는 게 꿈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주성진은 두 사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고향, 나이, 무공내력 등등.
주성진은 급하게 그들에게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차차 알아 가자고. 시간은 많으니까.’
“하하, 객잔을 차린다고요? 알겠습니다. 나중에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만 제가 지금부터 사천상단의 일원이 될 순 없는 건가요?”
주성진은 그녀의 말에 멈칫했다.
‘뭐야, 지금 상단에 들어오고 싶은 거야?’
“소저! 자유롭게 사는 게 좋지 않으세요?”
“지금까지 자유분방하게 살았으니 조직의 일원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 순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금탄호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드리웠다.
‘저저, 여우 같으니라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보겠다 이거지. 후후.’
그가 생각하는 두 마리 토끼란, 옥소소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것과 동시에 주성진과 사귀는 것이었다.
‘뭐, 누구나 꿈을 꿀 수 있는 거지. 이참에 나도 상단에 들어가 볼까? 상단에 들어간다고 해도 돌아다닐 기회는 많을 거야.’
금탄호는 한곳에 정착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좋아, 일단 나도 상단에 들어가자고. 뭐 싫증나면 그때 다시 떠나면 되니까…….’
금탄호는 주성진이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저, 주 상단주님. 저도 상단의 일원이 되고 싶은데요. 어떻게 안 될까요?”
주성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야 손해 볼 게 없지, 저들을 얻는다면.’
“하하. 좋습니다. 대신 두 분의 소속은 구주상단으로 하겠습니다.”
“구주상단요?”
두 사람이 동시에 묻는다.
“구주상단은 제가 가진 또 하나의 상단입니다. 제가 직접 만든 상단이라 애착이 많아가는 상단이지요.”
“아, 그러세요. 그러면 두 상단의 상단주를 겸직하고 계신 겁니까?”
금탄호의 물음에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하하.”
“그럼 입단은 어떻게 할까요?”
“일행이 있는 곳에 돌아가서 계약을 체결하자고요.”
이야기가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 사이 보부상단의 이철용이 단원을 이끌고 왔다.
주성진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벌어진 상황을 추려서 이야기 해 주었다.
“잘 들었습니다. 한데 포로를 풀어 준 것 때문에 문제는 없을까요?”
“그건 제가 상서 대인을 만나 잘 이야기하겠습니다. 뭐라고 하면 눈을 크게 뜨고 한껏 째려보지요. 하하.”
“주 상단주님. 그럼 여진족들이 다시 공격하는 일은 없을까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저들이 목표로 한 건 기습 공격이지 정면 승부가 아닙니다.”
“그럼 이번 일로 액땜했다고 봐도 될까요?”
“모르죠. 세상일은 알 수 없으니까요…….”
주성진은 그들이 걱정할까 봐, 더는 말하지 않고 속으로 속삭였다.
‘솔직히 저에게 가해지는 신변의 위협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봅니다.’
이철용은 주성진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뭐, 그래도 액땜한 셈 치자고요. 주 상단주님.”
“하하, 그러시지요.”
늪지대를 통과한 사신단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시골 마을 인근에 자리 잡았다.
그간 늪지대를 나무와 흙으로 메꾸느라고 사람들의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곳곳에 쳐진 천막 사이의 큰 공터에는 감미로운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뭇잎에 통통 튕겨 오르는 빗방울처럼 맑고 청아한 소리였다.
“하하, 금 악사가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하는군요. 음공이 아닌 음악으로.”
주성진은 술잔을 기울이며 이철용에게 말했다.
이들이 있는 곳은 대형 천막으로 주성진과 일행들을 모두 수용하고도 남을 특대 크기였다.
“네. 그렇군요. 다들 음률에 빠져 술 마시는 것도 잊었나 봅니다.”
순간 거대한 천막의 내부는 북적대기는커녕 마치 호수라도 된 듯 잔잔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은 천막 가운데에서 곡조를 뜯고 있는 금탄호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딩, 딩. 디리링…….
그는 매끄럽고 길쭉한 손가락으로 팽팽한 금현을 연이어 가볍게 퉁겨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춤추듯 미끄러지며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 날 때마다. 사람들의 눈은 앵속에 취한 듯 몽롱해지고 있었다.
그의 음률은 때로는 연인의 속삭임처럼, 때로는 봉황의 날갯짓처럼, 때로는 시냇물의 노래처럼, 또 때로는 폭포의 우르릉거림처럼. 천변만화했다.
그가 연주해 내는 선율을 감상하는 데에는 그 어떤 음악적 소양도 필요치 않았다.
그것은 그저 듣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딩!
마침내 연주가 멈췄다.
아련한 선율의 반향이 가시고 나서야 사람들은 다시금 지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짝짝짝…….
금탄호가 고개를 숙이자 우레와 같은 갈채가 터져 나왔다.
주성진은 일어나 금탄호를 바라보았다.
“멋진 곡을 연주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모처럼 마시는 술인데 덕분에 술맛이 꿀맛일 것 같습니다. 하하.”
“하하. 과찬입니다.”
“자, 그럼 제 술 한잔 받으시겠습니까?”
쪼르륵!
주성진이 그에게 술을 따라주고 돌아서려는데 천막 밖에서 낯선 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주 상단주님, 상서 대인이 뵙자고 청합니다요.”
주성진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제기랄, 이 좋은 시간에…….’
“알았소, 곧 채비하고 가겠소이다.”
잠시 후 상서가 묵고 있는 천막에 주성진이 들어갔다.
아늑한 내부에는 풍성한 술과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다.
상서와 그를 보좌하는 좌시랑과 임 장군은 모두 일어나 주성진을 반겼다.
“어서 오시오. 주 상단주!”
곧이어 상서 주원래가 주성진에게 자리를 권한다.
“이리 앉으시오. 그간 자리를 한번 만든다고 했는데 이제야 그대를 청하게 되었구려. 하하.”
사실 그들이 초면은 아니었다.
다만 술자리를 같이한 적은 없었다.
“공사다망하신 상서 대인께서 미천한 소인을 부르시다니 이거 삼생의 영광입니다.”
주성진은 자신을 한껏 낮추며 상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상서가 손을 흔든다.
“아이, 이거 왜 이러시오. 지나친 과례는 비례라고 했소이다. 자자 오늘 우리 편히 술이나 마십시다. 격식을 차리지 말고 말이오. 하하.”
“감사합니다. 상서 대인.”
주성진은 상서의 얼굴을 살피며 답했다.
‘여기 모인 자들 모두 닳고 닳은 위인들이니 조심하자고! 분명 나를 부른 건 무슨 목적이 있을 거야. 단순히 사교 차원으로 부른 건 아닐 것이라고.’
사실 주성진은 자신을 일행의 선두에 서게 한 상서의 처사에 여전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상서 주원래가 재차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대를 청한 건 서로 우애를 쌓자는 의미가 크오. 다만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소이다. 실은 그대가 내게 이야기한 여진족의 준동에 대해선 아직 황제 폐하께 보고를 하지 않았소이다. 다시 한번 그대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하려 하오.”
그 순간 조용히 있던 좌시랑이 끼어들었다.
“흠흠, 주 상단주가 포로를 살려 보내 주지 않았다면 이런 절차가 필요 없었을 텐데…….”
그러자 상서가 좌시랑을 제지한다.
“허허, 이 사람. 그 이야기는 다시 왜 꺼내는 거요. 그만하시오.”
주성진은 둘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 말문을 열었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당장 그들이 궐기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알았소이다. 그대의 의견을 반영해 보고서를 작성하겠소이다.”
주성진은 상서의 속마음을 훤히 읽고 있었다.
여차하면 책임을 주성진에게 모두 씌우려는 수작이었다.
“그러십시오.”
주성진이 너무나 태평하게 나오자 오히려 불안한 건 상서였다.
‘저자가 황제의 사위가 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이것 참… 내가 그의 심기를 긁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그와 좀 더 가까이 지내야 하거늘…….’
상서는 순간 경직되었던 얼굴색을 풀고 다시 얼굴에 가득 미소를 담는다.
“최근에 과거 시험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소이다. 내친김에 대과까지 보는 건 어떠하오?”
“하하, 부끄럽습니다. 대과에 급제한 분들을 앞에 두고…….”
“아니오. 그대는 본업이 상인이지 않소. 준비할 시간도 별로 없었을 텐데, 향시에 합격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외다.”
주성진은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과찬이십니다.”
“자자. 우리 술과 음식을 들면서 이야기를 좀 더 나누어 봅시다. 혹 점심을 들지 않았다면 마음껏 드시구려.”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오후가 되었다.
주성진이 놀란 건 그들이 하나같이 술을 잘 마신다는 거였다.
“다들 애주가이신가 봅니다. 취하지도 않으시고.”
주성진의 말에 상서가 대답한다.
“하하, 우리 집안은 대대로 술을 잘 마신다오. 좌시랑과 임 장군이야 내가기공을 익힌 사람이니 그럴 것이고…….”
주성진은 사신단의 호위대장 격인 임 장군이 내가 기공을 수련한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좌 시랑까지 그런지는 꿈에도 몰랐다.
정 3품 좌시랑의 본명은 공도균으로 우시랑인 강은호보다 훨씬 전도양양한 인물로 대내에 정평 나 있었다.
조선 사신단이 출발하기 전 주성진은 공주에게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상서보다 더 주목해야 할 인물이 좌시랑이라고.
‘음, 단순히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공을 익히고 있었구나. 가만… 그가 나에게 포로 석방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한 건, 자신이 그들을 요리할 수 있었기 때문 아닐까……?’
주성진은 순간 그의 손을 자세히 살폈다.
‘음, 진즉에 그의 손을 자세히 살펴보았다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주성진은 그의 오른손을 보자마자 대뜸 그가 검을 익혔음을 알 수 있었다.
검수는 검수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주성진은 좌시랑을 바라보았다.
“하하, 장군님이야 내공을 익힌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좌시랑님이 내공을 익힌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허허, 이거 좀 섭섭하려고 하오. 평상시 우리 같은 관료 나부랭이들을 얼마나 무시했으면 내가 내공을 익힐 줄을 모른단 말이오. 더욱이 그대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이기어검의 고수 아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