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조선으로 향하다 (3)
잠시 후 둘의 혈색이 돌아왔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눈을 떴다.
순간 눈에 희미한 그림자가 일렁이자, 그들은 본능적으로 검을 잡아갔다.
“커억, 큭……!”
“하하. 내 이럴 줄 알았어. 이봐! 내가 너희들의 사지를 점혈했으니, 도망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그들의 눈가에 가는 경련을 일어난다.
그들은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제길, 엿 됐구나…….’
‘어제저녁 잠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누구냐?!”
노상달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누구냐고? 잠깐만 기다려. 친절하게 알려 줄 테니…….”
주성진은 위장으로 쓰인 나무를 삼매진화로 태워 버렸다.
“어때? 이제 내 얼굴이 잘 보이지?”
주성진이 얼굴을 들이대자 노상달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멀뚱멀뚱했다.
반면 우달극의 눈빛은 몹시 흔들렸다.
주성진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예상대로 저자가 나를 알고 있었군.’
“순순히 정체를 밝혀! 아니면 달리 방법이 있으니까!”
우달극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깨끗이 죽여라!”
“고이 죽여 달라고? 너 같으면 순순히 죽이겠냐? 고문을 해서라도 정체를 알아내겠지… 안 그래?”
“…….”
“좋아 뭘 할까? 곧바로 분골착근의 수법으로 들어갈까? 설마 나 주성진이 그 정도도 못 한다고 생각지는 않겠지?”
순간 노상달의 두 눈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당신이 정말 주성진이오?”
“그래. 이봐 둘 다 잘 들어. 내가 너희들하고 한가하게 농담 따먹기를 할 시간이 없어. 난 어떡하든 너의 정체를 알아낼 거야, 그러니 순순히 불으라고. 좋은 말 할 때…….”
“말하면 살려 줄 수 있소?”
노상달이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
그 순간 우달국이 그를 강하게 째려보며 소리친다.
“너 이 새끼, 미쳤어?! 목숨을 구걸하는 거야!”
“그러면 어떡하라고? 넌 분골착근의 수법을 이겨 낼 수 있어? 얼마나 지독한 고문인지는 너도 잘 알잖아.”
“…….”
분골착근은 펼치기 대단히 어려운 고문 수법이었다.
하지만 일단 펼쳤다 하면 백의 백 성공이었다.
거기에 더해 분골착근에 당한 자는 평생 병신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가만!’
주성진은 상대적으로 쉬운 노상달을 공략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주성진의 뇌리에 심령금제의 수법이 떠오른 거였다.
심령금제 수법 역시 천뇌자의 미완성 무공에 그 방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11성까지는 성공했다고 들었어. 12성에서 실패했지만…….’
심령금제의 단계 차이는 시술의 유효 기간에 있었다.
가령 심령금제 수법이 12성에 도달하면 피시술자가 죽을 때까지 평생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다.
하나, 그렇다 치더라도 1년의 유효 기간을 가진 11성도 무시 못 할 고도의 수법이었다.
“이봐, 내가 마음을 바꿨어. 아무래도 난 고문 기술자가 아니거든. 너희들 비명을 들으면서까지 굳이 분골착근을 하고 싶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난 너희의 심령을 금제하려고 해. 그냥 평생 나의 꼭두각시로 살아. 알았지?”
주성진은 조곤조곤 말했지만, 듣는 이에게는 엄청난 공포를 안겨 주었다.
무공을 익힌 자치고 전설적인 수법인 심령금제를 모르는 자는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우달극이 입을 열었다.
“말하겠소.”
주성진은 그가 순순히 나오자 더럭 의심이 들었다.
“이봐. 너무 쉽게 굽히고 들어오는 것 아냐? 좀 전까지 죽음을 불사한다며…….”
“죽여 달라는 건 변하지 않소. 다만 내 의지로 말하고 싶소. 고문이나 심령금제로 토설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떳떳할 것 같으니까…….”
주성진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떡였다.
순순히 밝히겠다는데 굳이 악독한 방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만일 거짓말을 한다면 그때 가서 심령금제 수법을 쓰면 되고.’
“좋아. 말해 봐.”
“음. 나는 정찰병이고 우리 부족은 정통 금나라의 후손들이오. 우리의 목적은 사신단을 몰살시키는 데 있소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가 돈독해지는 것을 계속 두고 볼 수 없기에…….”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신단이 몰살한다고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나빠질 리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일 조선의 영토에서 사신단이 몰살하면 모를까…….
“그건 좀 이해가 가지 않는군, 이번 사신단이 몰살한다고 조선과 명나라의 사이가 멀어질 것 같지 않은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소이다. 이번 시도가 끝이 아니라는 말이외다. 결국,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라오.”
“음… 그렇다면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지…….”
우달극은 주성진의 말에 피식 웃는다.
“그건 알아서 하시고…….”
주성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음, 그러고 보니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조선과 명나라의 사신단이 육로가 아닌 해로를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주성진의 독백처럼 일반인의 왕래는 배편을 이용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잦은 해적들의 출현과 조선왕의 해상 교역 금지 등으로 그마저도 축소되는 형편이었다.
‘음, 무슨 노림수가 있구나. 핵심을 잡아내야 해!’
잠시 눈을 감은 주성진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번쩍 눈을 떴다.
‘그렇군, 존재감이다. 저들 부족은 존재감을 대내외로 드러내려고 하는 거야. 강력한 존재감은 주변을 잠식하며 삼켜 버리지, 흩어진 여러 부족을 통합하자고 기치를 내걸면 아마 존재감이 큰 부족이 가장 유리할 거야. 정통성 확보도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고.’
주성진의 생각은 잡힌 포로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생각한 김에 주성진은 지금의 정세를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객관적으로 보자고!’
명나라는 현재 몽골의 잔당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지만, 예전에 멸망한 금나라에 대해선 안중에도 없었다.
과거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분열되어 북방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었고 간혹 그들 일부가 조선과 국경을 사이에 두고 충돌이 있을 뿐이었다.
‘만일 사신단이 해로를 이용한다면 그건 대망신이겠군, 여진족이 두려워서 바닷길을 이용하는 꼴이니까. 그렇다고 사신단에 매번 강한 군대를 파견하자니, 그건 국력의 낭비를 초래할 것이고… 결국 저자의 말이 맞겠어.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주성진은 저들을 이끄는 자가 대단한 수완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음, 누굴까? 저들 부족을 이끄는 자가…….’
생각을 끝낸 주성진이 우달극을 바라보았다.
“원래 작전이 뭐야?”
“우리는 그대들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소이다. 주 상단주와 같은 무공 고수가 일행에 포함된 걸 알기 때문에 이 길을 돌파하기 어렵게 하려고 늪지대에 독충을 투하한 것이오.”
“그 말은 되돌아갈 때 공격한다는 뜻이냐? 만반의 태세를 완비하고?”
우달극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이다. 실은 그대와 같이 내공을 익힌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 편 고수들이 오고 있소이다. 다만 그들이 당도하려면 시간이 필요하오. 해서 시간을 벌기 위해선 명의 사신단이 반드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오.”
“…….”
“음, 그리고 추가적인 노림수 있소이다. 사신단은 되돌아가면서 주변 경계를 느슨하게 할 게 분명하오. 왜냐면 여기에 올 때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이오.”
주성진은 그의 말에 의문이 들었다.
“이봐, 우리는 기상 이변으로 여정이 계획보다 많이 지체되었다고! 그 정도 지체면 너희들 무공고수가 올 시간으론 충분하지 않을까? 안 그래?”
우달극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그렇지 않소. 사실 사신단이 조선으로 간다는 건 이미 1년 전부터 알고 있었소. 하여 순조롭게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만 문제가 발생했소. 바로 그대를 위시한 무공 고수들이 사신단과 함께한다는 것이었소…….”
“음, 그래서 부랴부랴 계획을 수정했다는 말인가?”
“그렇소이다. 부족장님은 특히 그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달리 빙궁 외는 연락할 길이 없었소이다. 결국, 비싼 대가를 지급하고 그들과 계약을 체결했지만, 시간이 빠듯했지. 아, 그리고 기상 이변은 미리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수가 될 수는 없소이다.”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상 이변을 예상했다고?”
“예상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었소. 기상 이변이 일어날 뚜렷한 전조가 있었기 때문이오. 아마 그대는 뚜렷한 전조가 뭘지 궁금할 것이오. 그건 바로 지난 동절기 날씨와 철새들의 움직임이오. 공교롭게 작년, 재작년의 상황과 그대로 일치한다오.”
주성진은 그의 말을 음미하다 곧장 뭔가를 생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허 참… 저들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알고 있었어. 정보가 줄줄이 새고 있었다고!’
주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심각한 문제야 이건… 황궁의 움직임이 모조리 까발려지면 안 되는데…….’
주성진은 불편한 마음을 잠시 잡고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음, 알겠다. 한데 말이다. 만일 날씨가 멀쩡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지?”
“그건 내 소관이 아니라 잘 모르겠소. 다만 설령 그렇다 쳐도 부족장님의 머릿속엔 필승의 방법이 들어 있었을 거요. 지금은 그대 때문에 기습이 어렵게 되었소만…….”
주성진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래서 모사재인 성사재천이라 하는 거다.”
“하지만 독충 때문에 늪지대를 통과하긴 어려울 것이외다.”
주성진은 잠시 고개를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었다.
‘그렇군. 이들은 내가 독충들을 모조리 재로 만든 걸 모르고 있었군.’
“이봐. 독충들은 모조리 죽었어. 우리는 곧바로 늪지대를 통과할 거야.”
그 순간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상달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봐, 왜 고개를 갸웃거린 거지?”
“아무리 독충이 없다고 해도 3년 전부터 생긴 이 넓은 늪지대를 통과하긴 말처럼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후후,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거야. 가만 그러고 보니 너희 부족에서 독충들을 키우는 거냐?”
노상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만독존자와 협력한 것입니다.”
노상달은 순순히 대답했다.
한데 그 순간, 그의 눈에 갸웃거리는 주성진의 얼굴이 잡힌다.
‘아, 중원인이라 만독존자를 모르는군.’
“저, 만독존자는 독공에 관해서는 변황에서 최고로 뛰어난 자입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만독문을 조직해서 스스로 문주 자리를 꿰찬 인물입니다.”
주성진은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런 놈이 있었군. 이거 앞으로 변황무림도 신경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이 중원 땅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이미 암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주성진은 일명 세외 무림이라 일컫는 변황 무림을 앞으로 눈여겨보기로 했다.
“좋다. 너희 둘을 살려 주겠다. 대신 돌아가면 너의 부족장에게 반드시 내 말을 전해라.”
그들의 얼굴에 순간 살았다는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개중에 노상달은 훨씬 노골적이었다.
우달극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한 마디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너희 둘은 중원어가 능숙하구나. 마치 토박이처럼…….”
우달국이 고개를 젓는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사투리는 시간이 없어 못 배웠고 북경어만 어릴 적부터 배웠습니다.”
“허허. 욕심도 많네. 사투리까지 배우려 했다니… 자. 그럼 간단히 말하지. 또다시 사신단을 공격한다면 내가 이 세상 끝까지 쫓아갈 것이라고 전해.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주성진은 사실 이 말을 전하기 위해 그들을 살려 준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