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음공 고수의 등장
사내는 주변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곧바로 줄을 튕겼다.
딩……!
음률이 시원하고 힘차다.
남자가 연주하는 금이라 그런지, 순간 비장한 기운까지 감돌았다.
빠른 손놀림…….
강약법이 독특하고 들끓는 기운이 드러난다.
예사로운 솜씨가 아니었다.
주성진은 눈을 반개했다.
비록 악기를 배우지 못했지만 듣는 귀만큼은 남들보다 앞서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보통 솜씨가 아니구나. 이건 예민하지 않은 귀라도 감탄할 음률이야.’
그러고 보니 보부상단의 단원들도 금을 뜯는 자에 빠져들고 있었다.
딩딩딩딩……
음률이 고조되고 손놀림이 빨라졌다.
정석적인 탄법은 아니었다.
소리가 높고 음정의 변화가 기묘하여 생소한 느낌이다.
그러나 박자가 안정되고 감정이 풍부하여 사람을 도취시켰다.
연주하는 본인도 스스로 도취된 듯,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반각에 걸친 연주가 끝나자 주성진이 손뼉을 쳤고 이내 우뢰와 같은 갈채가 쏟아졌다.
짝짝짝!
“금탄호님 명성대로 대단한 실력이시군요. 소녀 진심으로 감탄했어요.”
“하하. 옥소소, 내가 그대의 발끝이나 따라가겠소이까?”
“아이 과찬이에요. 그건 그렇고 아까 우연히 만났을 때 묻지 않았는데 그럼 금탄호님도?”
금탄호는 무슨 말인지 짐작하고 고개를 끄떡였다.
“난, 이번이 처음이오. 황태후 마마의 초청을 받은 게…….”
“아, 그렇군요. 황태후 마마님은 정말 음악을 사랑하시는 분이시죠. 궁중에도 훌륭한 악사가 많은데 저희 야인들까지 챙기시고 말이에요.”
“이번에 조선으로 사신단이 출발한다고 하오. 그들의 장도를 기념하기 위해 연주회를 개최한다고 하더이다.”
옥소소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손으로 막았다.
그래도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호호호!”
“왜 그러시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옥소소는 급히 손을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죄송해요. 실은 황태후 마마님은 어떤 명분을 대어서라도 외부에서 악사를 초청하려고 하죠. 조선 사신단은 단지 핑계일 뿐이에요.”
“아, 그렇소? 몰랐소이다.”
“실은 한 가지 비밀이 더 있어요. 황태후 마마님은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음악을 들려 주고 싶어 하세요. 그래서 외부에서 초빙한 악사들은 기왕이면 내공을 익힌 자들을 선호해요. 그래야 멀리 까지 음률이 전달될 테니까요.”
금탄호는 고개를 끄떡이다가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나나 그대는 음공으로 무고한 사람을 헤치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많소이다. 특히 사파나 마교 출신이라면 더더욱…….”
“제가 알기론 철저히 신분을 조사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리고 황궁에 들어가 보면 알겠지만 도처에 고수들이 눈을 붉히고 있다고요. 감히 나쁜 수작은 꿈도 꾸지 못해요.”
“하하. 그렇구려. 그대 덕에 많은 것을 알고 가오.”
주성진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음공의 고수라는 것과 이들이 황태후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는 이유가 조선 사신단을 배웅하기 위해서라는 것 등.
주성진은 그들이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말문을 열었다.
“하하. 우리는 오늘이 아니라도 만나게 될 운명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옥소소가 되묻자 주성진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실은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조선 사신단의 일원입니다. 정확히는 조선 사신단과 같이 떠나는 상단의 일부이지요.”
“호호, 그래요. 인연이 되려니까, 이렇게 만난 것이네요.”
“그래서 말인데 소저의 연주도 미리 들어봐도 될까요?”
옥소소는 주성진을 얼굴을 바라보다 돌연 아!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주성진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용모파기를 통해서…….
“어머, 제 눈이 삐었어요. 여태 유명하신 분을 못 알아봤으니…….”
“하하, 저를 알아 보신 모양입니다. 안 그래도 통성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옥소소은 환히 웃다가 돌연 시무룩하게 말했다.
“휴, 주 상단주님은 저를 모르시는 군요. 하긴 이기어검의 고수신데, 저 같은 게 눈에 들어오겠어요…….”
주성진은 그녀가 투정을 부리자 달래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허허, 여심난측이라고 하더니…….’
“죄송합니다. 제가 무림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요. 거기에다 본업이 상인이다 보니 소저를 못 알아봤습니다.”
“어머, 지금 저에게 사과한 거죠? 호호. 나중에 남들에게 자랑해야겠어요. 주 상단주님이 저에게 고개를 숙였다고요.”
주성진은 그녀의 성격이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평범한 여인은 아니군. 한데 나도 무림사를 꽤 공부했는데 왜 그녀를 알지 못한 걸까…….’
그 순간 금탄호가 끼어들었다.
“주 상단주님, 반갑습니다.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아아, 그러시군요.”
”실은 저는 용모파기까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하. 음, 그리고요 무림에 웬만히 정통한 자들도 저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왜냐면 저희는 무림인이라기보다는 남들이 예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주 활동 무대도 무림이 아니라 저희를 불러 주는 곳이지요. 가령 유명 객잔이나 기원, 가정집 등…….”
“…….”
“저, 한데 혹시 제가 조선에 따라갈 방법이 있을까요? 예전부터 그쪽에 뛰어난 예인들이 많아서 교류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제자도 다 키워 놨고, 자유로운 몸이라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만.”
주성진은 난감했다.
그를 데려갈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떡하나…….’
그 순간 옥소소가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저도 가고 싶어요. 짐이 되지 않을 테니 부탁드려요.”
주성진은 그들의 얼굴에 기대 가득한 열의를 읽었다.
‘이것 참 진심이네.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보지 뭐…….’
“일단 제가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왜냐면 사신단에 합류할 인원이 정해져 있거든요.”
“주 상단주님이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분이잖아요, 꽉 믿고 있을게요, 호호. 그런 면에서 가벼운 연주 대신 저의 음공을 보여드리고 싶군요. 제 음공이라면 상단의 호위로서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해요.”
주성진은 사태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음공은 다수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고 들었으니, 저희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해 주십시오.”
그녀가 고개를 끄떡이며 입을 여는 순간 이번에는 금탄호가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그녀의 연주 중에 음을 넣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을 넣는다고요?”
“일종의 노랫가락 같은 것인데 상대의 음공을 중화하는 역할을 하지요.”
옥소소는 자신도 그런 음을 낼 수 있기에 금탄호의 말에 굳이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중간에 끼어든 그가 기분이 나쁠 뿐이었다.
잠시 후 옥소소의 고운 손에 한 자루의 피리가 마술처럼 나타났다.
삐리리…….
점차 피리 소리의 음률이 고조되면서 돌연 주성진의 마음이 애잔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구슬퍼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다.
‘뭐야, 마음이 너무 슬퍼지는군. 이게 음공의 힘인가…….’
방심하고 있으면 쉽게 감정에 휩쓸려 버릴 만한 피리 소리였다.
이 정도 음공을 가지고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듣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해를 끼칠 수 있을 정도의 힘이었다.
‘저 피리 소리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어 싸울 의지를 갉아먹고 있구나.’
주성진은 음공이라 하면 으레 상대가 무공을 펼치지 못하도록 감정을 들끓게 하거나 아예 소리 자체로 신체 일부를 공격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구슬픈 가락도 음공이 된다는 건 처음 알았다.
주성진은 저도 모르게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보부상단의 단원 중에는 눈물 콧물을 질질 흘리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소리 내 우는 자도 생겨 났다.
“우아아앙, 엉엉…….”
소리 내 우는 자에서 알 수 있듯이 감정에 쉽게 휘말리는 사람에게는 음공은 그야말로 치명적이었다.
그때였다.
“오오오오오오, 우우우우우우……!”
그녀의 연주 중간에 금탄호가 자신의 목소리를 넣었다.
탁한 듯 곱고, 저음과 고음역을 자유자재로 오가고 있었다.
그런 그의 특이한 목소리는 꺾고 터뜨리는 창법으로 매우 독특해 보였다.
주성진은 점차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허허. 신기하네…….’
금탄호의 목소리는 그녀의 피리 소리에 조화롭게 파고들었고 슬픈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종국에는 둘의 협연으로 그녀의 음공이 믿을 수 없이 훌륭한 곡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 * *
북경에서 출발한 조선사신단 일행은 장성을 넘어 요하를 지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행렬은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때는 봄이 갓 지나고 초여름에 접어들었 건만, 갑작스러운 이상 기후로 날씨가 한여름 날씨를 능가하고, 4일에 한 번꼴로 폭우가 쏟아졌다.
그 바람에 조선으로 가는 길이 계획보다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질퍽한 땅이 마르기 전까진 꼼짝달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백여 기의 기마병을 제외한 구백 명의 병사들이 걷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이는 애초에 상단에서 짐마차를 대거 동원했기 때문이었다.
짐마차의 절반만이 짐을 싣고 있었고 나머지 절반에는 아예 짐이 없었다.
이는 조선에 팔 물량보다 살 물량이 훨씬 많아서였다.
중원의 인구가 조선보다 많고 그러다 보니 덩달아 수요가 훨씬 많기에 그러한 조치가 일견 당연해 보였다.
하여간 그런 이유로 병사들은 텅 빈 짐마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한편 주성진은 알려진 자신의 무위에 더해 타 상단의 농간이 한몫해 생각지도 않게 사신단의 선두를 맡고 있었다.
그 탓에 자신의 상단과 동떨어진 상태였다.
사신단의 선두에는 사신단의 호위대장 및 기병 20기와 함께 주성진의 일행 중 절반이 자리를 함께했는데 개 중에는 금탄호와 옥소소도 끼여 있었다.
사실 그들은 주성진의 별 노력 없이도 합류할 수 있었다.
왜냐면 휘주상단이 내부 사정상 상행에 못 오게 되었기에 추가 인원으로 할당받은 거였다.
작금의 휘주상단은 내부적으로 주성진을 지지하는 세력이 그의 원수들을 몰아내려 내부 싸움 중이었다.
그렇기에 주성진이 파견한 인물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상태였다.
“와! 요서 지역이 이리 무지하게 더운 줄 몰랐네요. 이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까요? 겨울에는 살을 에듯 춥다 던데요…….”
“하하, 그게 바로 인간의 위대한 점 아니겠냐.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고 적응하게 되지. 우리도 곧 적응할 거라고, 조금만 힘내.”
두 사람은 보부상단의 이철용과 이도연이었다.
하지만 이도연은 이내 고개를 젓는다.
“단장님, 아니 송 대행수님. 허허 이거 적응이 안 되네요. 죄송해요.”
“됐고.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거야?”
“눈앞을 보세요. 풀이 웃자라 거의 갈대밭 수준이라고요.”
이철용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뭐? 모기 같은 벌레들이 많다는 거냐?”
“그거라면 다행이죠. 우리가 모르는 독충들이 많을 것 같아요. 제 예감에요.”
이철용은 이도연의 예감을 일소에 부칠 수 없었다.
그는 염력이라는 초능력을 보유한 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