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보부상단의 숨은 요리사
석양이 지고 저녁이 되었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무공을 봐준 주성진은 보부상단의 초청으로 그들이 묻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북경성 외곽으로 가길래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긴 어딘가요?”
주성진은 낡고 폐허가 된 장원을 보며 말했다.
“10년 전 역모로 죽은 사람의 장원입니다.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에 폐가가 된 것을 제가 3년 전에 매입했지요. 워낙에 싸서 말입니다…….”
“음, 아무리 저렴해도 사업상 전국을 돌아다닐 텐데 굳이 살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여기에 정착한다면 모를까…….”
“주 상단주님 같은 분이 있을 것 같아 싸게 매입하였습니다. 한번 둘러보시면 이곳 장원의 진가를 알고 계실 겁니다. 하하.”
주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까, 이 장원을 저에게 판다고요? 귀신이 나오는 집을…….”
“귀신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네. 저는 초자연적 현상을 믿는 편이라서요. 그러는 이 단주님은?”
이철용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하. 저희 같은 보부상이 귀신을 무서워해서야 어찌 장사할 수 있겠습니까? 산길을 가다 보면 무덤 옆에서 잠을 청하는 경우가 허다한데요. 그리고 저희에겐 이도연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염력으로 귀신을 내보냈나요?”
“바로 맞추었습니다. 억울한 원혼을 잘 달래 주었지요.”
주성진은 이도연의 능력이 부러웠다.
‘나도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한번 해 보자고!’
그 순간 이철용의 말이 이어졌다.
“하하, 제가 어찌 주 상단주님에게 돈을 받고 장원을 팔겠습니까? 그냥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저희에게 베푼 은혜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지요.”
“아닙니다. 단주님 휘하 여러분이 저를 위해 생업을 멈추고 조선까지 동행하는데요.”
“아무튼, 저는 주상단주님께 여기를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부디 이 정원이 다시 옛 영화를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자! 지금부터 장원은 상단주님 것입니다. 하하.”
주성진은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숙였다.
공짜 좋아하지 않는 사람 없으니까…….
“아이코 감사합니다. 제가 이 장원을 빛내도록 노력해 볼게요.”
“아, 그리고 주 상단주님. 오늘 제가 모신 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저의 단원 중에 일류 요리사 뺨치는 친구가 있거든요. 이번 여행길 아니, 상행길의 입맛은 그가 책임질 것입니다.”
그 말에 주성진은 반색했다.
그가 기뻐한 이유는 조선으로 가는 여정에 묵을만한 객잔이 손을 꼽을 정도였다.
그러기에 항시 풍진 노숙을 각오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오다가 두 사람이 일행에서 이탈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하하. 요리 재료를 사러 간 모양이구나. 잘 되었군. 육포나 건량을 질리도록 먹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래요. 이거 오늘 제 입이 호강하게 생겼습니다. 하하.”
잠시 후 장원의 넓은 마당에 자리를 잡은 주성진은 임시로 마련된 요리대를 쳐다보았다.
요리대에는 오늘 무공을 봐준 친구가 주성진을 보며 씩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보조인지 또 다른 보부상이 한사람 더 서 있었고.
‘아하, 강여울 저 친구구나. 손이 상당히 빨라 인상적이었는데…….’
주성진은 오동통하게 생긴 강여울을 보며 손을 들었다.
“요리를 잘하신다고요?”
“과찬이십니다. 그저 오다가다 조금 배웠을 뿐입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 무슨 요리를 하실 건가요?”
“닭요리와 돼지고기 그리고 면 요리를 할 생각입니다.”
주성진은 음식명이 궁금했다.
“만드실 요리는 어떤 요리인가요?”
“아, 그게 제가 좀 변형한 요리입니다만… 원래 명칭은 깐풍기와 동파육 그리고 무한 열간면입니다.”
“호, 그래요. 잘 부탁합니다.”
강여울은 준비해 놓은 요리 재료 앞에 가서 눈을 감았다.
‘오늘 주 상단주에게 제대로 점수 좀 따야겠어!’
강여울은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더니 곧바로 신들린 듯 재료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뭐야 저건 무공 아닌가?’
주성진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그가 무공 초식을 활용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하긴 이 많은 사람을 위해 요리하려면 무공이 필요하겠어.’
주성진은 실생활에 무공을 접목하는 걸 좋아했기에 강여울이 요리에 무공을 활용하는 것을 흡족하게 생각했다.
‘나도 이참에 그에게 요리를 좀 배워야겠구나. 답례로 무공 한 수 더 가르치면 되지, 뭐.’
주성진이 그리 결심하는 순간 강여울은 순식간에 양파와 매운 고추 그리고 마늘을 다듬더니, 곧이어 이미 손을 본 닭의 뼈를 발라내기 시작했다.
작은 칼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닭의 등을 쭉 갈랐다.
그다음으로 닭 안쪽에 있는 뼈와 살이 붙은 부분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
그러자 가슴살과 몸통 부분이 분리되고 연이어 닭 껍질과 힘줄까지 제거되어갔다.
그는 넋 놓고 보는 주성진을 보며 미소지었다.
“주 상단주님. 원래 깐풍기는 닭다리를 이용한 요리지만, 저는 닭의 모든 부위를 사용할 겁니다.”
“아, 그래요. 그래서 변형이라고 한 거로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돼지고기를 손봐야겠군요. 하하.”
주성진은 깐풍기가 닭다리를 이용한 건지는 몰랐지만, 동파육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돼지 삼겹살로 만드는 요리였다.
“그럼 돼지고기도 모든 부위를 사용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실은 저의 요리의 근간은 야외입니다. 야외에서는 모든 게 부족하죠. 그러다 보니 부족한 재료로 많은 사람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편법을 쓰게 된 것입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만일 저희가 지금 야외에 있다면 닭 요리가 아니라 꿩 요리나 새 요리가 되겠군요, 하하.”
강여울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강여울은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돼지고기를 먹기 좋게 손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눈 깜짝할 사이 각종 야채와 버섯 등을 다듬더니 이내 돼지고기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데 돼지고기는 수백 번의 칼질이 있었음에도 전혀 형체가 변하지 않고 있었다.
‘오라… 저건 단순한 칼질이 아니고 검결이구나.’
얼마 후, 주성진과 보부상단의 단원들이 깐풍기와 동파육을 즐기는 사이 강여울은 쉬지 않고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했다.
주성진은 음식을 먹으며 그의 동작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와, 굉장하군.’
주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강여울은 진짜 요리의 대가 같은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밀가루가 반죽이 되더니, 그가 몇 번 내리치자 점점 가는 수타면이 되어 갔다.
그렇게 그는 쉬지 않고 면을 처댔다.
‘와!’
주성진은 음식 먹을 생각을 잊은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여울의 손에 잡혀 있던 면이 점점 가늘어져 나중에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되었다.
면발은 머리카락보다 가늘었는데, 불빛에 반사되자 은빛을 내며 출렁거렸다.
‘허허, 대단하군. 한데 너무 가늘어서 먹을 수나 있으려나. 아니면 재료가 부족해서 인가? 그것도 아니면 과시하기 위해서인가?’
주성진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세면을 다시 뭉치기 시작했다.
‘하하. 그러면 그렇지. 실력을 보여 주려고 그랬던 거군.’
주성진의 생각을 읽었는지 강여울은 눈을 찡긋거리면 먹기 좋은 수타면을 다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냠냠냠…….”
강여울이 만든 음식이 탁자 위에서 맞바람에 개는 감추듯 없어지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주성진의 귀가 쫑긋거렸다.
‘어, 누구지? 발걸음으로 보아 한 사람은 여인이다.’
주성진은 1남 1녀가 장원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뭐, 별일 없겠지. 나도 있고 여기 인원이 얼마나 많은데…….’
잠시 후 보부상단의 모든 이들까지 낯선 방문객을 주시하자, 낯선 이들은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말문을 열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여긴 가끔 제가 악기를 연주하던 곳인데…….”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청아해서 꾀꼬리가 지저귀는 것 같았다.
보부상단의 단원들이 일제히 주성진을 바라본다.
‘나더러 상대하라는 건가. 저 두 사람을…….’
주성진은 곧장 그녀를 보며 미소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악기를 연주하였다고요?”
“네. 북경에 연주하러 가는 길이면 으레 여기에 들러 연습하곤 했어요.”
불빛에 비친 여인의 모습은 달덩이 같다.
헐렁하게 입은 옷 사이로 은은히 몸매가 드러났다.
어깨에서 흘러내릴 듯한 비단옷이 풍만하나 천박하지 않아 보이는 가슴에 걸려 어딘지 모르게 색감이 드러나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음, 농익은 여인이군. 많은 남자의 마음을 울렸겠는데…….’
그렇지 않아도 보부상단의 단원 중에 몇몇은 불빛 사이로 어른거리는 여인의 자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실은 이 장원은 제 것입니다.”
여인은 놀라 되물었다.
“어머, 전 주인이 없는 줄 알았어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여인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갈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가까이에 덩그러니 놓은 의자에 앉았기 때문이었다.
“살지 않으니 그럴 수도 있지요. 그리고 제가 장원의 소유자라고 말씀드린 건 저희를 경계하지 말라는 뜻에서 말씀드린 겁니다. 오늘같이 좋은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거든요.”
“아. 그렇게 깊은 뜻이… 호호.”
킁킁!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찌르네요. 맛있는 걸 해 드셨나 봐요.”
“그렇습니다. 이거, 좀 빨리 오셨으면 진수성찬을 맛봤을 텐데요.”
그 순간 여인의 옆에 있던 남자가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시오. 내가 몹시 시장해서 그러는데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없소이까? 답례로 연주를 해드리겠소.”
같은 남자가 들어도 정감 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긴 장발을 묶지 않고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이십 대부터 오십 대까지의 얼굴이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독특한 분위기의 사내는 평범한 옷차림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주성진은 이미 여인을 봤을 때 느낀 것이지만, 낯선 사내도 자신과 동류의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상당한 무위를 갈무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저들은 누굴까?’
주성진은 그들을 좀 더 알고 싶어 강여울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만 음식 재료가 남은 것 같은데 요리를 좀 더 해 줄 수 없습니까?”
“안 그래도 술안주용 요리를 하려고 했습니다. 뭐 내친김에 같이 하지요.”
“아, 그렇습니까? 난 왜 술이 없나 했습니다. 하하.”
강여울은 낯선 이들을 슬쩍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머루주입니다. 맛이 기가 막힙니다.”
“머루주요?”
주성진은 입맛을 다셨다.
황제와 있을 때 포도주 맛을 알아 버린 그였다.
포도와 비슷하게 생긴 머루라면 포도주와 비슷한 맛을 낼 것이라고 확싱했다.
“네. 산야를 오가며 틈틈이 채집한 것을 모아서 담갔지요.”
“하하. 그래요. 술과 연주라, 이거 더없이 좋은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주성진이 너스레를 떨고 있을 때 그와 똑같이 입맛을 다시는 이가 있었다.
바로 낯선 사내였다.
그는 배낭에서 금을 꺼내 들며 강여울을 바라보았다.
“음, 음, 음, 미안하지만 머루주를 좀 얻어 마실 수 있겠소이까?”
강여울이 그를 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저희는 손님을 박하게 대하지 않습니다. 같이 드시지요.”
“고맙소이다. 이거 마땅히 내줄 것은 없고 분위기도 살릴 겸 바로 금을 연주해 보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