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새로운 상행 준비 (2)
주성진은 상념을 접고 송 대행수를 바라보았다.
“자, 그러면 도서 문제는 여기서 일단락하고 말안장에 대해 말씀해 보시지요.”
“네. 사실 제가 예전부터 친하게 지내는 북방 상인이 있습니다. 사실 그는 중원인은 아니고 거란족입니다. 며칠 전에 그를 사업상 만났는데 본인이 말안장 사업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면서 잘 부탁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러면서 다량의 말안장을 저희 창고에 맡겨 놓았습니다.”
주성진의 눈이 번뜩인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생각지도 않았는데…….’
“아, 그래요? 그럼 바로 그를 만날 수 있는 건가요?”
“네. 마침 오늘이 기한입니다. 실은 제가 임의로 말안장을 살 수 없으므로 그에게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오늘이 지나면 그는 저희 말고 다른 상단과 접촉을 시작할 겁니다. 품질은 매우 우수하니 심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성진은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말안장 건은 함께 그분을 만나서 종결짓는 것으로 하지요. 그 외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휘주상단의 일로 촉발되어 상단과 무림과의 결탁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모양입니다. 나라에서도 이 문제를 상당히 좋지 않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구체적인 반응은 내놓지는 않았지만요.”
사실 주성진은 송 대행수보다 이 사항을 훤히 잘 알고 있었다.
휘주상단이 시끄럽게 된 건 다 본인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성진은 송 대행수가 이 이야기를 꺼낸 배경에는 자신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챘다.
“하하, 송 대행수님.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저는 어떤 무림 세력과 손을 잡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러니 나라의 눈총을 받는 일은 없을 겁니다.”
송 대행수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하. 저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상단주님!”
“그러면 제가 질문을 하나 드리죠. 휘주상단을 제외한 타 상단은 과연 무림 세력과 얽힌 관계가 없을까요?”
송 대행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그럴 리 없지요. 어떤 식이든 결탁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은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쉽사리 알 수는 없겠지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순간 낭인회의 강국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강 호법 말씀하세요.”
주성진은 장기 계약한 낭인회 소속의 낭인들을 편의상 호법으로 부르기로 했다.
“말씀드릴 게 있는데, 혹 이야기 도중에 제가 끼어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성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기탄없이 말해 보세요.”
“네, 주 상단주님. 실은 요즘 북방에 마적들이 횡행한다고 합니다.”
“마적들은 예전부터 있지 않았습니까? 그게 새삼스러울 게 있는지요?”
강국영은 고개를 저였다.
“숫자가 많이 불어났다고 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몽골과 여타 부족의 병사들이 마적으로 위장해 약탈을 일삼고 있다고 합니다.”
강국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였다.
“음, 그래요?”
“해서 이번 사신단에 병사들이 얼마나 따라갈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희도 나름의 대비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비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강국영이 주성진의 눈치를 슬쩍 본다.
뭔가 말하기 어려운 것을 꺼내려는 것 같았다.
“저, 그래서 말인데, 일꾼들을 모두 무인으로 채웠으면 합니다.”
주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비용이 좀 많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야, 방도가 있습니다. 주 상단주님이 한번 행차해 주시면 이 문제는 단박에 해결될 겁니다.”
“행차해달라고요?
강국영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크음!
“실은 제가 북경으로 오다가 우연히 안면이 있는 보부상단을 만났습니다.”
주성진은 그의 말을 제지했다.
“에이, 보부상단이 아니라 보부상이겠지요?”
“헤헤, 그들은 원래 보부상인데 자신들의 무리를 보부상단으로 말하고 다닙니다. 하하.”
“아, 그래요, 재미있는 사람들이군요. 한데 그들과 친한 사이인가요?”
강국영는 고개를 끄떡였다.
”네, 사실 그들은 제 주요 고객이었습니다. 물건 값을 떼먹고 도망간 자들을 붙잡아, 제가 대신 돈을 받아 주었거든요. 아 오해하실까 봐 그러는데 절대 폭력은 쓰지 않았습니다.”
“아, 그래요. 강 호법이 그런 일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따지고 보면 노력 대비 그렇게 돈벌이가 되는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그 일을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한가할 때 그런 의뢰가 들어오면 제가 자청해서 그 일을 하곤 합니다.”
주성진은 강국영이 그런 취미를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
‘추적이 취미라. 재미있는 친구군…….’
주성진은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한데 저와 장기 계약을 맺어서 그건 취미 생활을 하기 힘들어질 것 같은데…….”
“아닐 것 같은데요. 제 느낌으로는 그와 유사한 일이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은 일어날 것 같은데요.”
“하하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요. 그래 하던 이야기 계속해 보시지요.”
강국영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혹,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저 평범한 보부상이 아닙니다. 무공을 익힌 자들입니다. 지금의 보부상단을 이끄는 이철용은 원래 표국의 표두 출신입니다. 한데 어느 날 자신이 속한 표국이 재정난에 휩싸이자 밀린 임금 대신 표국을 인수하게 되었지요.”
“…….”
“물론 그 혼자 인수한 건 아니고 자신의 휘하에 잇던 표사와 쟁자수들과 함께 말입니다. 하지만 표국은 단 한 번의 운송 실패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모아 두었던 돈까지 다 털어 보상금을 지급하고 무일푼이 된 그와 그의 부하들은 간신히 돈을 빌려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그의 부하 중 하나가 보부상을 하자고 제안한 거죠. 적은 돈으로 시작하기에는 그게 적당하다면서요. 이철용도 표행을 다니면서 보부상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여러 차례 있었기에 흔쾌히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
“그렇게 그들은 장사를 시작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보부상으로 돈을 크게 벌지는 못했지만, 기연을 얻어 무공이 강해졌다고 하더군요. 한데 그가 저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절정을 넘어선 고수와 꼭 비무를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죠.”
강국영은 말을 끝내면서 손가락으로 주성진을 가리켰다.
주성진은 그의 행동이 무슨 의도인지 바로 알아 차렷다.
‘오라, 나더러 비무를 해달라는 모양이군.’
“하하. 그래서 접니까? 왜 강 호법이 비무 상대를 해 주지 그랬어요?”
“간신히 절정의 문턱에 턱걸이한 게 접니다.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주성진은 강국영의 말에서 이철용의 무위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저, 이철용의 나이가 어떻게 되죠? 표국에서 표두 노릇을 했다면 나이가 많은 것 같은데 웬지 느낌은 그렇지가 않아서 말입니다.”
강국영이 고개를 끄떡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표두가 되었지요. 아주 큰 표국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작은 표국에서는 왕왕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표국의 표두는 나이순이 아니라 무공순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군요. 한데 내가 그의 비무 상대가 되어 주면 기꺼이 보부상단 모두가 짐꾼 노릇을 해 줄까요?”
“그럼요. 그건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가 북경에 있기에 주 상단주님이 날짜를 정해 주시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비무에 임할 것입니다. 그의 부하들 또한, 좋은 구경거리가 생겨 좋아할 것입니다. 운이 좋으면 배워 가는 것도 있을 것이고요.”
* * *
사흘 후, 긴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마무리한 주성진은 북경성 밖의 공터에서 이철용과 그의 부하들을 만났다.
이철용은 주성진을 대하자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보다 더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한바탕 요란한 인사를 마치고 주성진과 이철용 두 사람은 비무를 하기 위해 거리를 벌렸다.
이철용이 주성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주상단주님. 비무의 기본자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부님이 늘 말씀하셨죠. 턱을 바싹 당기고 가슴을 펴고 팔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시선은 전면으로 향하라고요…….”
“하하, 역시 그 사부에 그 제자셨군요.”
주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하하, 뭐 그렇지요… 자 그럼 비무를 시작할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비무를 마치면 제가 왜 오늘과 같은 비무를 간절히 꿈꾸어 왔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시지요.”
잠깐 사이에 이철용의 기도가 변하자 자연스럽게 주성진의 눈이 이철용의 위아래를 살핀다.
‘음, 만만한 실력이 절대 아니야…….’
은연중 뿜어지는 그의 기도는 무척 날카로웠다.
마치 날이 잘 선 한 자루 칼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미미하게 끄떡인 주성진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검은 원래 그의 애검이 아닌 비무용으로 준비한 청강검이었다.
채앵!
순간 이철용의 동공 위로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역시 고수라 그런지 검을 든 자세가 범상치 않구나.’
주성진의 자세는 철저히 기본에 충실한 자세였다.
그러면서도 전혀 허점을 찾아볼 수 없는… 일견 평범한 자세지만, 이철용의 눈엔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철용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최선을 다하자. 내가 익힌 것만 모두 펼치면 돼!’
반면 주성진은 담담했다.
상대에게 가진 바를 모두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비무의 취지에 맞게 그를 호락호락 상대해 줄 생각은 없었다.
쉬익!
쉭!
두 사람의 발이 동시에 바닥을 찼다.
쐐애애액!
일직선으로 날아든 상대의 검으로 주성진의 검이 마중 나간다.
쩡!
주성진이 휘두른 검에는 간결함과 위력을 동시에 갖췄다.
“음!”
이철용은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손목에 전해지는 느낌이 너무도 묵직했다.
마치 바위가 날아든 듯한 공격이었다.
‘대단한 공력이다. 일수에 이런 위력이라니… 만일 내가 근력을 단련하여 강한 악력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검을 놓쳤을지도 몰라.’
바로 그 순간 이철용이 눈을 부릅떴다.
‘이크, 또 온다!’
미세한 틈조차 허용치 않으려는 듯, 주성진의 공격이 날아들었고.
슈우욱!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대지를 진동시킨다.
‘피하자! 잘 피하는 것도 실력이라고!’
이철용은 자신이 익힌 유령보법을 이용해 뒤로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허깨비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어!’
주성진의 검은 그만 허공을 베고 말았다.
‘뭐야, 이형환위인가?’
주성진은 그의 빠른 보법에 감탄했다.
“하하, 대단한 보법입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네, 언제든지 들어오십시오.”
이철용은 대지를 박찼다.
순식간에 전개되는 보법.
마치 문어발처럼 이철용의 다리가 늘어났다.
정확히 말해, 빠르게 움직였기에 그 잔상의 여파로 다리의 길이가 늘어난 것처럼 보인 것이다.
‘하!’
잠시 움찔하면서도 주성진의 눈은 상대의 움직임을 쫓았다.
쐐애액!
순식간에 그어지는 섬광.
주성진의 왼쪽 어깻죽지를 노린 검이 날카로운 이빨을 들어댔다.
‘하하, 그럼, 나도 똑같이 돌려주어야지…….”
주성진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간 주성진의 신형이 대기 속으로 녹아든 것 같았다.
이철용이 휘두른 검의 궤적은 그만 허공에 멋진 여운 남긴 채,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지 못했다.
‘오, 역시 피했구나!’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이철용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파팟! 파파팟!
이철용의 검이 단순히 빠른 것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복잡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날카로우면서도 집요하구나! 거기에 변초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