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황제의 본심
황제가 재차 입을 열었다.
“자네는 무공 고수이니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나보다는 더 잘 알 것 같군. 자네의 비법은 뭔가?”
주성진은 느닷없는 황제의 질문에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뭘 말해 주어야 하나…? 음, 일반적인 방법에다 내 경험을 곁들어야겠어.’
“황제 폐하도 잘 아시고 있는 방법일 줄 압니다만, 그래도 그것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건 명상을 겸한 운기조식입니다.”
“후후 역시 명상인가? 그래 계속 이야기해 보게.”
“네. 저는 이 방법으로 상당한 효과를 보았습니다. 우선은 먼저 가부좌를 틀고 마음을 가라앉히십시오. 그런 다음 모든 잡념을 떨치고 최대한 몸을 이완시키십시오. 절대로 내공을 끌어 올리시면 안 됩니다.”
주성진은 황제가 내공을 익히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시간은 얼마가 걸려도 좋습니다. 느긋하게 준비하십시오. 서두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하하 나에겐 상당히 어려운 주문이야. 그래도 자네가 한 말이니 다시 해 봐야겠군.”
주성진은 조금 더 부연해 설명하기로 했다.
“폐하, 상념이 떠오르면 억지로 끊지 마시고 물이 흘러가듯 내버려 두십시오, 이 또한 언제가 끝나리라 하면서요. 그렇게 긍정적인 마음을 불어넣으면 점차 다른 생각이 스며들지 않고 점점 무념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또 하나 도움이 되는 게 불경을 읽는 것입니다. 폐하.”
황제는 빙긋 웃었다.
“나더러 득도한 고승이 되라고? 세속에 파묻혀 헤어나질 못하는데…….”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반복해서 읽으시면 됩니다. 구절 하나하나를 음미한다기보다는 정신 수양의 한 방편이려니 생각하면서요.”
“하하, 자네 인제 보니 불제자였군.”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폐하, 그렇습니다만 솔직히 불심이 깊지는 못합니다. 절에 자주 가지도 않고요.”
“뭐 마음속에 부처가 있는데 굳이 절에 갈 필요가 있을까, 하하.”
주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하!”
황제는 돌연 눈을 반개하며 불경의 한 구절을 읊조린다.
“사물은 하나요, 삶도 하나요, 죽음도 하나니 모든 것이 공에서 왔다가 공으로 간다. 공은 허하나 충만하고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나 어디에도 있다. 한데 마음에 집착하니 형이 생기고 욕을 갖게 된다.”
“…….”
“그런 형과 욕은 마음을 사로잡아 고통을 낮고 끝없는 번민에 들게 한다. 그러므로 욕을 버리면 더는 흔들림이 없고 굳건하여 의문이 없으며 나아갈 바도, 물러설 바도 없다…….”
주성진이 놀라워하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일세, 어머니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억지로 그 의미를 생각하려 말고, 해석하지 말라고, 그저 잔잔한 마음으로 읊조리라고. 자네가 말한 것처럼…….”
주성진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저, 폐하. 가벼운 운동을 병행하시면 더 좋을 듯싶습니다. 운동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잡념이 사라지니까요. 아마 폐하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셨을 겁니다.”
“운동이라, 뛰는 것은 싫은데…….”
“그럼 체조는 어떻습니까, 제가 아는 체조가 있습니다만…….”
황제가 관심을 보인다.
“그거 익히고 어려운 건 아니지?”
“아주 쉬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운 건 아닙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펼쳐 보일까요?”
황제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지 말고 내가 지명한 사람에게 가르쳐 주게, 난 그를 통해 배우도록 하겠네.”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황제의 말이니 그저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자네에게 뭘 기대한 건 아니야, 그래도 자네의 말을 듣고, 나 스스로 불경을 읊조리니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차분해졌어. 지금은 다시 잡념으로 가득 찼지만…….”
“그게 정상입니다. 폐하. 솔직히 저도 그렇거든요.”
“세상사에 열망과 욕심이 없으면 그것만큼 무미건조한 삶이 없지. 열정을 가지려면 어느 정도 욕심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너무 과하면 안 되겠지만…….”
“하하, 그렇습니다, 폐하.”
황제는 잔을 기울였다.
주성진이 뭐라 말하기 전에 단숨에 포도주를 비운다.
“카악, 술맛이 좋군, 자네도 한 잔 마시게.”
“네, 폐하.”
주성진이 잔을 비우자 황제가 포도주를 따르며 말했다.
“아 참, 향시 합격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난 그대가 마음만 먹으면 대과도 합격하리라 믿네.”
주성진은 손을 저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그 어려운 대과를 통과하겠습니까?”
“후후, 그야 모르지, 하지만 내가 보긴 현재의 자네 위치가 딱 좋아 보이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황제가 돌연 무릎을 쳤다.
“이런, 자네를 만나면 꼭 물어본다는 걸 까먹을 뻔했군. 자네 말이야 지금의 무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제 생각에 지금의 정세는 상당히 불안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총무련에 반기를 든 세력이 등장하고 있으니까요.”
“음, 나도 그리 보고 받고 있어. 서북방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림이 뒤숭숭한 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니란 말이야. 그렇다고 내가 본격적으로 개입하기도 그렇고, 이것 참 뜨거운 감자야, 무림이라는 건.”
주성진은 황제가 무림에 부정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긴. 어떤 황제가 무림을 좋아할까…….’
주성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제 생각에 그렇다고 전면전이 벌어질 것 같진 않습니다. 아직은 총무련의 세력이 크고 건재하니까요.”
“그 말은 수시로 국지전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꼭 그것이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소수 정예의 부딪힘이나 고수끼리의 대결은 이전보다 훨씬 잦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황제는 입을 여러 번 삐쭉거렸다.
아마도 그의 버릇인 것 같았다.
“국정에 도움이 될 만한 좋은 방법이 없나?”
“사실 무림이 혼란스러우면 저희 상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무림의 안정을 절실히 바라고 있습니다만, 그게 기도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요. 어차피 곪아서 터질 것이라면 화끈하게 터지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
“그래서 말인데, 억지로 지금 상황을 막을 게 아니라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피해를 줄이려면 신무기를 많이 만들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떨는지요?”
황제는 주성진이 꺼낸 신무기가 먼지 감히 잡혔다.
“화약과 대포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음, 가령 그래서 무림에 고하는 것이죠. 백성의 삶을 고달프게 한다면 대포의 뜨거운 맛을 보여 주겠다고요.”
“그거 좋은 생각인데… 자네 뭔가 좀 아는군.”
주성진이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오다가다 좀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화기의 보관과 관리에 허술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혹 무림에 유출되면 안 되니까요.”
“음, 내가 알기론 사적으로 화탄을 만드는 곳이 더러 있다고 들었는데…….”
“네. 저도 그렇다고 알고 있습니다. 해서 제 생각에 그런 곳이 발견되면 강하게 응징하는 게 좋을 것 갚습니다. 엄포가 아니라 강력한 힘으로 말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떡였다.
“자네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화약과 대포를 많이 만들어야겠군.”
“기술자들을 우대하면 그들이 자발적으로 성능도 개선하고 무거운 대포를 좀 더 가볍게 만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 이거 골치 좀 아프겠는데… 관료들이 들고일어날 것 같아서 말이야.”
주성진은 황제가 생각을 물리지 않도록 밀어붙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폐하. 기술의 발전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제 생각에 과거 시험에 잡학을 한 과목으로 집어넣는 것도 방법입니다. 절대 천대할 일이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하하, 알았네! 알았어. 그러잖아도 자네와 비슷한 의견을 개진하는 관료들이 많지는 않지만 좀 있거든. 그들을 중용해서 써먹어야겠어. 하하.”
황제는 잠시 말을 끊더니 지긋이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네, 미끈하게 생겼군, 후후.”
주성진은 황제가 갑자기 자신을 외모를 입에 올리자 일순 당황스러웠다.
‘음, 미끈하게 생겼다고? 내가 날씬하다는 말인가…….’
순간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뭐 전설의 송옥이나 반안에 버금가는 미남이라 볼 수 없지만,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정감 있는 얼굴이야. 자네 같은 얼굴을 특히 미인들이 좋아하지. 적당히 잘생겼기 때문에…….”
주성진은 황제의 말을 되새기며 생각했다.
‘음, 미끈하다는 게 얼굴을 말한 거였군. 한데 미인들이 적당히 잘생긴 사람을 좋아한다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 듣는 소리인데…….’
어쨌든 무작정 침묵할 순 없었다.
주성진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폐하,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황제는 주성진의 말을 듣자마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하하, 슬쩍 공주 문제를 거론하려고 하는데 저 친구가 길을 열어 주는군. 저 친구를 어르고 달래서 정신없게 만들어 놓아야겠어.’
황제가 갑자기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다.
“이봐, 뭐라? 말을 거두어 달라고! 자네 목숨이 몇 개가 되나 보지……?”
“네, 그게 무슨?”
“감히 황제인 나의 말을 철회해 달라는 건 나에 대한 불충이지. 대역죄에 해당한다고!”
주성진은 황제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아까는 불이익을 주지 않는다며…….’
“폐하.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했습니다.”
“뭘 실언하였는가?”
주성진은 등에서 담이 삐죽삐죽 솟아 나왔다.
“그게. 겸손한 게 미덕이라고 배워서 폐하께 그리 말씀을 드렸지만 실은 저도 제가 적당히 잘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황제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하하하.”
“이 사람, 자네에게는 농담도 못 하겠군.”
주성진은 가슴을 쓸어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왠지 허탈한 마음이 든다.
“농담이셨군요, 폐하, 전 그런 줄도 모르고…….”
“허허. 그나저나 간이 그리 적어서 어떻게 쓰나. 장차 공주를 그대에게 보내려고 하는데 철회할 수도 없고… 명색이 황제인 내가 타인의 모범을 보여야 하니 말이야.”
주성진은 황제의 말장난에 망연자실했다.
‘제기랄, 말이야 방귀야. 그냥 철회해도 됩니다.’
”…….”
“내 요즘 자네가 혁혁한 공훈을 세운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냥 넘어가지, 대신 공주는 10년 후에 데려가게. 날 보필해야 하니까 그전에는 곤란해. 뭐 그전에 어쩔 수 없이 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허락하겠네. 단, 정식 부인 자리는 용납할 수 없다는 걸 명심하게나 하하.”
주성진은 저도 모르게 포도주를 벌컥 마셨다.
‘완전히 당했다!’
꿀꺽꿀꺽!
“하하, 목이 마르는가? 그러면 물을 마셔야지, 술을 마시는 것보단…….”
“폐하. 제가 말씀 좀 드려도 되나요?”
황제가 돌연 하품을 하더니 손을 내저었다.
“아, 갑자기 피곤이 몰려오는군, 이야기는 다음에 듣는 거로 하고 딱 한 가지만 말하지. 농담 아니니까 헛되이 듣지 말고 반드시 귀담아 듣게나!”
주성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떡인다.
“네, 폐하…….”
한편으론 황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몹시 궁금했다.
‘황제는 내게 뭘 이야기 하고 싶은 걸까? 이거 도통 감이 잡히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