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황제와의 대면
짝짝짝……!
한 박자 늦게 박수가 터져 나오자, 수신호위는 곧바로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소. 역시 그대의 반탄강기는 명불허전이요.”
“알고 계셨습니까, 폐하.”
“날 너무 물로 보지 마시오. 이래 봬도 소싯적에 무공을 익힌 몸이오. 지금이야 초식까지 다 잊어버렸지만, 그렇다고 보는 눈까지 흐리멍텅한 건 아니오. 내공도 꾸준히 익혔고…….”
수신호위의 마음속에 찬바람이 일었다.
은연중 황제를 깔보는 마음을 가졌는데, 자칫 그 마음이 드러났다면 출세에 지장이 생길 뻔했다.
“폐하, 그럼 다음 비무를 준비하겠습니다.”
“후후, 볼만한 시합이 될 것 같군. 하나 무리하지는 마시오. 당신은 나의 수신호위이니까. 나도 죽음을 초개같이 느끼는 무인의 숙명 뭐 그딴 거 들어서 알고 있는데, 그건 황궁에서 통용되지 않소.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소?”
“그럼요. 황제 폐하를 호위하는 일이 제 숙명입니다.”
강호의 무인이 수신호위의 말을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바로 그때 주성진이 대기실에서 나타났다.
비록 운기조식은 짧았지만, 그럭저럭 만족한 주성진은 걸어오면서 내내 수신호위의 무공을 생각했다.
‘음, 수신호위의 성명절기가 반탄강기인 모양이군… 내기를 유형화하는 것에서 한 단계 진일보한 경지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네, 붙어 봐야 알 것 같아…….’
주성진의 내공은 공청 석유의 공능에 힘입어 불어났다,
그렇다고 해도 평소 내공의 7할 수준이었다.
‘해보자고, 그래도 마비산 때문에 성과는 있었어, 내 내공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고. 게다가 기연까지 얻었으니 말해서 뭐해, 하하…….’
여전히 5할의 내공이 마비산으로 인해 묶여 있었지만, 공청석유의 공능이 어느 정도 이를 상쇄해 주었다.
그렇기에 만일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면 주성진의 내공은 전인미답의 경지로 치달을 수 있었다.
황제에게 다가간 주성진이 고개를 숙였다.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적당히 하여라. 본인이나 상대를 크게 다치게 하는 것은 나에 대한 불충이니라. 알겠느냐.”
황제는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위인이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이거지. 뭐 그런다고 해도 언젠가 꽃은 시든다고…….’
주성진은 속으로 뇌까리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부족함을 알면 곧바로 비무를 포기하겠습니다.”
“하하. 그렇다고 시시하게 지면 재미없지…….”
“헤헤, 바로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폐하!”
한편 주성진이 나타난 순간부터 수신호위는 계속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음, 만만치 않은 자로구나. 한데 좀 이상한데, 보이는 얼굴이 다가 아닌 것 같아…….’
순간 반로환동을 떠올렸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반로환동의 고수에게 느껴진다는 세월의 무게가 도드라지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주성진과 수신호위가 맞부딪쳤다.
그들은 형식적인 인사를 끝내자마자 바로 비무에 돌입했다.
사실 서로 간에 궁금한 게 많았지만, 주절주절 대화하기에는 지켜보는 눈들이 너무나 많았다.
촤라라락!
수신호위 몸에서 예의 회색빛 강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와 주성진을 덮쳐 간다.
이에 질세라 주성진도 전신을 푸른 강기로 둘러싸고는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쿠와아앙!
엄청난 굉음이 비무대와 연무장을 휩쓸고 퍼져 나갔다.
‘으음!’
‘음!’
두 사람은 잠시 공격을 멈추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비무대에 깔린 단단한 청석이 들썩이며 뿌연 먼지가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하등의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수신호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주성진의 공격을 무산시켰지만, 적잖은 충격을 받은 탓이다.
‘세상에 이런 자가 존재했다니. 소문보다 더한 자구나!’
마치 굴러오는 거대한 바위를 맨몸으로 받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황궁에서 내로라하는 상대들과 붙어 져 본 적이 없는 그였다.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비록 붙어보진 않았지만, 동창의 제독이나 금의위 수장도 한 수 아래로 본 나인데…….”
주성진의 기파에 피부가 저릿저릿했다.
수신호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음, 표정에 변화가 없군. 그렇다는 건 나보다 충격을 덜 받았다는 건데… 설마 호신강기를 익혔나?’
반탄강기는 의지로 펼치는 거였지만, 호신강기는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위험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펼쳐지는 거였다.
사실 그의 말처럼 주성진은 호신강기의 덕을 보고 있었다.
거기에 상대만큼 정교한 반탄강기를 펼치지는 못했지만, 힘은 앞서 있었다.
점점 주성진의 존재감이 커지자, 수신호위는 이를 앙다물고 전의를 불태웠다.
‘오랜만이군, 이런 기분은…….’
성인이 된 이후 주성진이 그의 앞을 가로막은 첫 번째 벽이었다.
하나 아무리 두렵다고 그 벽을 회피한다면 자신의 출세는 보장받지 못할 것이었다.
‘저 벽을 내 손으로 무너뜨리겠다.’
쿠우우!
수신호위가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리자, 그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나며 공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막강한 내공과 외기가 동조하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야합!”
기합을 내지른 수신호위가 주성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쿠콰콰!
반탄강기가 그의 몸을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주성진은 물러서지 않고 상대를 향해 달려갔다.
좀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주성진이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곧장 부딪힌 그의 주먹에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으음!”
“음!”
꽝, 꽝……!
공전절후한 대결이 계속 이어졌다.
수신호위의 회색빛 강기가 세상을 파괴할 듯 기세를 떨치면 그에 대항하는 주성진의 두 주먹에서 찬연한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격돌에 비무대 바닥에 깔린 청석이 금이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묵묵히 절정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순간.
쾅!
주성진의 일격에 수신호위 몸이 저만치 밀려갔다.
쿵, 쿵, 쿵, 쿵……!
그가 밀린 자리에는 금이 간 청석이 기어이 부서져 버렸다.
하지만 주성진도 편치 않았다.
주먹이 깨질 듯 고통을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음, 상당히 아프군! 내 힘이 강해질수록 상대의 반탄강기도 강해지고 있어. 마치 이화접목의 묘리처럼 말이야.’
주성진은 염두를 굴렸다.
‘음, 이렇게 하다간 끝도 없겠는데. 보통의 무공으로는 저자의 반탄강기를 뚫을 수 없어.’
순간 공주와 눈이 마주쳤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이 왜 그것밖에 안 되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불현듯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좋아, 보여 주지. 이 주성진의 진정한 모습을…….’
주성진은 공력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우웅!
순간 대기가 공명을 일으키더니 그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헉!’
주성진을 향해 달려들던 수신호위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위험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하나 이미 충돌을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었다.
쿠와앙!
수신호위의 가슴에 주성진의 주먹이 작렬했다.
수신호위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훌훌 뒤로 날아갔다.
이제까지 그를 완벽하게 보호해 주던 반탄강기가 위태롭게 출렁였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군 수신호위가 경악했다.
‘이럴 수가! 반탄강기가 뚫렸어!’
주성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속전속결!’
팟!
청석을 박찬 주성진은 간신히 일어난 수신호위에게 주먹을 내질렀다.
쾅!
크윽!
주성지의 주먹에 직격당한 수신호위의 허리가 활처럼 굽어지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입가에 한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쿨럭!”
“후우!”
한참을 기혈을 다스린 후에야 수신호위는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졌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오. 그대의 엄청난 내공에 경의를 표하오. 허허.”
주성진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마치 내공 때문에 진 것처럼 말하는군. 이봐요, 아저씨. 그게 다가 아니라고…….’
* * *
“마셔보게! 서역에서 건너온 포도주인데 술맛이 달콤하고 향긋해! 거기에다 안주도 별반 필요 없으니 얼마나 먹기 좋은가. 하하.”
“네, 폐하.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이봐. 격식을 갖추지 말라고. 그러면 오히려 내가 불편해.”
주성진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셨다.
황제의 호언장담대로 그 맛이 일품이었다.
“폐하. 이 술을 마시니 갑자기 포도를 재배하고 싶어졌습니다.”
“후후.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토양과 기후가 맞는지 잘 따져봐야 해. 원래 포도의 원산지는 중원이 아니거든…….”
“네. 그 점 명심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서역에서 전문가를 구해오겠습니다.”
황제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일상에서 벗어나 아들뻘 같은 이와 대화를 나눈다는 게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어때, 여기가…….”
지금 황제와 주성진이 있는 곳은 주성진이 동창과 금의위 무사와 일전을 벌인 인공 호수에 거대한 바위 위였다.
그들은 수행자 없이 간이 의자와 탁자를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네, 아주 좋습니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자연의 정취를 한껏 즐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아무렴… 실은 내가 가끔 혼자 자작하는 곳이기도 하지…….”
주성진은 여태 황제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그런 일면을 보자, 그가 측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풍요 속의 빈곤인가… 절대자의 고독인가…….’
그 순간 황제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황제가 되면 좋을 것 같지?”
“그게…….”
“솔직하게 말해 보게, 오늘 이 자리에서 자네가 어떤 말을 해도 불이익을 주지는 않을 것이네. 내 맹세하지. 설령 자네가 나에게 욕을 해도 좋아. 뺨을 때린다면 기꺼이 맞을 용의도 있고…….”
황제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조심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주성진은 황제가 파격적으로 나오자 오히려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감히 말씀드리면 좋은 점이 나쁜 점보다는 많을 것 같습니다.”
“후후, 처음엔 모든 게 좋을 거라 생각했지. 내 말 한마디만 세상을 뒤바꿀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야. 하지만 조금 지나고 보니 엄청난 중압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어. 그중에서 가장 큰 부담은 선대 황제께서 이루어 놓은 치적을 나 스스로 망치진 않을까, 그게 제일 두렵더라고.”
“…….”
“만일 두렵지 않았다면 인생 참 편하게 살 수도 있는데… 밤낮으로 술과 향음에 빠져서 말이야. 뭐 정치야 대신들과 환관들이 하면 되는 것이고…….”
주성진은 그가 신나게 놀고는 싶은데 일련의 책임감 때문에 힘들어한다고 느꼈다.
‘뭐 따지고 보면 황제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지…….’
“폐하, 저도 때로는 모든 걸 벗어던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고 나면 그 생각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저 멀리 사라지고 없더라고요.”
“그래? 자네도 욕심이 많은 것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상단을 계속 키우고 싶은 욕망이 가득합니다.”
순간 황제가 잔을 부딪쳐왔다.
“건배하자고!”
“네… 폐하.”
황제가 술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주성진이 뒤따랐다.
아무래도 황제보다 먼저 술잔을 내려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요즘 골치 아픈 게 많아. 내 밑에서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너무 많아졌어. 언제부터인지 나의 권력이 약해지고 내 주변의 권력이 세졌다는 말이지. 하다못해 내 마누라들까지도 권력을 탐하고 있으니…….”
“…….”
“그래서 전격적으로 공주를 국정에 참여시켰지, 믿을 만한 건 피붙이밖에 없더라고, 난 공주가 황태자가 장성할 때까지 계속 내 곁에 있었으면 하네, 그래서 주변의 늑대와 이리들을 견제하고 제어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지…….”
주성진은 황제가 주변에 하소연할 때가 없어 많이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황제가 흔히들 말하는 성군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려웠다.
‘무능한 황제는 아니지. 하지만 성군은 아니야. 제멋대로 하는 습성도 있고 공주를 자신의 권력 유지에 이용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