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황궁무림대회 (13)
주성진은 앞의 두 무인을 보며 황궁에 경공에 능한 자가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되었다.
한편 주성진 앞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두 사람이 경공을 펼치면서 전음을 주고받았다.
경공 중에 전음을 펼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단순히 경공에만 조예가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봐 강 무관, 이번 시합, 나에게 양보하지? 그리해 주면 나중에 백배, 천배로 보답할 테니까.
―등 첩형, 그러지 말고 네가 양보해라. 내가 백배, 천배로 보답할 테니까.
두 사람은 평소에도 아는 사이였고 상당히 높은 지위였다.
―강 무관, 그러면 우리 합작하면 어때? 주 뭐시기는 외부인이잖아. 설마 그가 1등 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좋아. 먼저 주성진을 탈락시키자고! 대신 중간에 배신하지 말아라.
―두말하면 잔소리지.
―안 되겠다. 하늘에 맹세해라. 너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만일 제가 배신하면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수만 년 동안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됐냐? 그럼, 너도 해!
―이하 동문입니다…….
한데 뒤따르던 주성진은 그들이 전음을 펼치는 걸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느덧 그들 셋은 인공 호수 주변에 빠르게 도착했다.
놀랍게도 인공 호수 주변엔 황궁의 궁녀들과 환관, 그리고 관리들이 시합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웅성웅성!
아마도 그들은 황제의 허락을 받고 나온 모양이었다.
주성진은 그들을 보며 중얼거린다.
‘이거, 구경꾼들이 많이 늘었군. 하긴 특별 비무대의 관람석은 너무 작았어…….’
이내 주성진의 눈이 구경꾼을 지나 인공 호수와 그 앞에 정박한 쪽배에 닿았다.
‘인공 호수가 제법 커서 확실히 쪽배를 타면 유리하겠어. 보자, 바위까지 거리가 어림잡아도 장강을 건너가는 만큼의 폭이네. 그리고 바위와 누각이 그리 멀지 않구나.’
주성진이 언급한 인공 호수 위 누각엔 지금 황제와 그 외 지체 높은 인사들이 구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주성진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무슨 함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먼저! 가까운 거리니 이형환위를 응용하자고.’
순간 주성진의 신형이 희미해지더니 쪽배를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쉬익!
이형환위의 묘리를 담았기에 속도는 이루 형언할 없이 빨랐다.
마치 화살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주변의 경물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하, 다 왔다.’
이어 날아가는 기세 그대로 쪽배로 올라탄 다음 삿대를 빠르게 저어 나갔다.
삭삭, 삭삭!
인공 호수 위에는 연꽃이 여러 군데에 군락을 이루고 있었고 주성진은 그사이를 쪽배를 타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한데 호수 가장자리에 거의 보이지 않던 연잎이, 중앙부로 갈수록 곳곳에 수북이 떨어진 채 부유하고 있었다.
하여 수많은 연잎이 쪽배가 일으킨 파동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무언가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물고기가 내는 소리는 아닌데, 뭐지?’
주성진이 홱 돌아보니 장검을 등에 멘 등 첩형이 놀랍게도 중간, 중간 연잎을 밟으며 추적해 오고 있었다.
‘이런!’
그리고 약간의 차이를 두고 조립식 장창을 펼쳐 든 강 무관이 마찬가지로 경공을 펼치며 쌩하니 따라왔다.
두 사람의 표표한 신법에 호수 주변의 구경꾼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터트렸다.
“와아아아!”
구경꾼들은 그들의 유령 같은 신법에 찬사를 보내는 동안 주성진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제길 떨어진 연잎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구나.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지…….’
사실 그 두 사람은 연잎을 지렛대 삼아 껑충껑충 하늘로 솟구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거였다.
‘작전 변경이다. 제일 나중에 간다.’
주성진은 쪽배의 속도를 조금 줄였다. 어차피 최고 속도를 내도 따라 잡힐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주성진이 쪽배의 속도를 늦췄다고 하지만, 그건 경공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여전히 속도는 빨랐다.
두 사람은 주성진이 불현듯 속도를 늦추자 잠시 고민하더니 또다시 전음을 주고받았다.
―강 무관, 저자가 속도를 늦추는데 어떡하지? 뭔가 꿍꿍이가 잇는 것 같아.
강 무관이 잠시 생각하더니 전음을 펼쳤다.
―등 첩형, 그러면 우리가 재빨리 먼저 가서 기다리자, 좋은 자리를 선점해서 주성진이 상륙할 때, 틈을 주지 말고 곧바로 공격하는 거야!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하여간 주성진 저자는 우리 예상을 번번이 뛰어넘는구먼. 쪽배를 먼저 선점할 때고 그랬고, 지금 또 속도를 늦추다니 말이야.
―무공에 자신이 있어서 저러는 거야. 우리뿐만 아니라 호수 어딘가의 있을 함정도 무시하는 거라고.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거야. 은근히 신경 쓰이네, 그려!
―강 무관, 내 생각에 함정은 아마 화살을 우리 셋 중 누군가가 손에 쥐었을 때 발동할 것 같아, 그때가 가장 허술할 때거든. 모든 신경이 화살에 꽂혀 있기 때문에… 안 그래?
―음,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군. 그나저나 등 첩형, 주성진을 물리쳤다고 가정하고 그다음엔 어떡하지? 그걸 여태 이야기하지 않았군.
―그러고 보니 그렇군. 음… 강 무관, 그전에 어떤 함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협심해서 함정을 먼저 물리치자고! 그런 연후에 우리끼리 가위바위보로 승부를 정하자고! 우리끼리 피 터지게 싸우다간 둘 다 시간 초과로 실격될지도 모를 일이야!
―그래 좋아. 나도 찬성이야. 뭐 최종 결과는 운에 맡겨 보지 뭐! 그런데 등 첩형, 주성진을 이길 비장의 수가 있나? 아무래도 무공 실력은 우리가 모자란 것 같아서 말이야.
―강 무관, 이거 왜 이래? 당신도 뭔가를 준비했을 거 아냐?
―음, 동창이 준비했다면 신선폐가 틀림없을 것 같군… 하하.
―흥, 이거 업자끼리 왜 이래. 당신도 군자산을 가지고 왔잖아…….
―하하, 절묘하다 절묘해! 이거 오십보백보로군. 아무튼 주성진 저 친구가 안 됐어. 잘나가다 나무에서 떨어지게 되었으니…….
―이번 경공 시합의 규칙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세세하게 읽어 봤으면 마비산을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걸 알았겠지… 하지만 누가 그걸 꼼꼼하게 읽어 봤겠어, 나도 처음엔 지나쳤는데 나중에 제독님이 말씀해 주시더라고.
―나도 너와 상황이 비슷해. 극독을 사용하면 안 되겠지만. 마비산은 산공독이니까 괜찮다고 하시더라고.
군자산이나 신선폐 둘 다 일시적으로 내공을 사용하게 못 하는 산공독의 일종이었다.
그 둘은 워낙 효험이 뛰어나 극렬 마비산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사용하는 방법은 먹는 것에 탈 수도 있고, 공중에 터트려 상대가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 순식간에 중독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군자산이나 신선폐는 극소량만으로도 상대의 몸속에 들어가면 내공이 흩어지고 마비되었다.
하지만 만들기가 워낙 까다롭고 어렵기 때문에, 천금을 주고도 쉽게 구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널찍한 바위에 도착한 직후, 주성진이 예닐곱 번 정도 미친 듯이 삿대를 찍어 대자 쪽배는 어느새 연못 중앙의 바위 앞까지 미끄러져 갔다.
배가 바위에 닿은 직후 신법을 펼친 주성진은 두 사람이 사이로 우뚝 섰다.
바로 그 순간 한줄기 강하고 억센 기운이 주성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쐐애액!
‘음, 창이로군.’
주성진은 상대의 날카로운 공격에 얼굴을 찡그렸다.
‘제길 먼저 내가 공격할 걸…….’
상대의 기세는 묵직하고 빠르기는 번개와도 같았다.
‘이런, 동창 녀석도 신경 써야 하는데…….’
그 순간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내 검을 사용하자. 그래서 기회를 보다 상대의 무기를 잘라 버리는 거야.’
주성진은 여태 황궁 무림대회에서 자신의 보검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흔하디흔한 청강검을 무기로 삼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보검을 사용하기로 했다.
당당히 보검을 쓴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항은 아니었다.
만일 치사하게 검에 대해 해명을 하라고 한다면 떳떳하게 거금을 들여서 샀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내 돈 주고 내가 샀다는데 누가 뭐라 할 거야. 다른 누구보다 황제는 내 심정을 잘 이해할 것이야. 그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좋은 걸 구 할 수 있으니까…….’
사실 실제로 비싸게 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주성진은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강 무관은 짧은 순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무시해 버렸다.
무인 중에 쌍검을 찬 이들이 간혹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긴 거였다.
챙! 챙! 챙!
창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굉음과 함께 묵직한 공기의 파장이 전해졌다.
강 무관은 자신의 공격이 쉽게 막히자 콧잔등을 찡그렸다.
‘역시 주성진은 명불허전이군.’
현란한 데다 위력적이기까지 한 주성진의 검법에 강무관은 그를 감히 경시할 생각을 못 했다.
이에 내공을 최고조로 끌어올려 변화무쌍한 창술로 대응하였다.
한데 초수가 진행될수록 강 무관은 주성진이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음, 등 첩형의 공격을 의식하는 것 같은데, 그나저나 등 첩형은 뭐 하는 거야. 설마 날 배신하고 화살을 찾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바로 그때였다.
꽝!
굉음과 함께 강 무관의 창이 바깥으로 크게 튕겨 나가며 그의 신형이 술 취한 사람처럼 크게 휘청거렸다.
‘으윽, 방심했어…….’
그 순간 주성진은 방향을 틀었고 자신에게 날아오는 한줄기 강맹한 기운을 향해 검을 날렸다.
훅 들어오는 검날에는 시퍼런 기운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등 첩형의 기습이 제법인데, 옆구리가 서늘하구나…….’
지금 등 첩형은 이빨을 악다물고 가슴 속에서 들끓어 오른 살기를 몸 밖으로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기습이지만 여하튼 주성진을 실력으로 이겨 보기 위해서였다.
‘한번 해보자!’
“야합!”
주성진이 갑자기 기합을 토해 냈다.
두 눈은 강렬한 정광을 들어냈고, 그와 함께 검 역시 차가운 한광을 뿜어냈다.
츠츠츠츠츠츠!
주성진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지는 듯하다가 다시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 잠깐 사이에 주성진은 일장의 거리를 좁혀 처음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등 첩형은 하염없이 밀려나는 중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성진이 자신을 겨냥해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마치 수십 개의 검날이 동시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검세가 철벽이 되어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묘한 압박감에 정신없이 물러서야만 했던 등 첩형은 어느새 실력으로 이겨 보겠다는 의욕을 잃고 초라한 눈빛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할 수 없군. 신선폐를 쓸 수밖에……!’
등 첩형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치익!
그리곤 아주 자연스럽게 검을 아래로 늘어뜨리더니 바위에 스치듯 긁고는 위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반대편의 강 무관의 눈빛이 번뜩였다.
‘할 수 없군, 나도 군자산을 쓸 준비를 하자고!’
바위에 무기를 긁는 것은, 사실 두 사람의 약속된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