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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상인-182화 (182/250)

182화 황궁무림대회 (8)

그녀가 얼른 얼굴에 맺힌 웃음기를 지웠다.

이럴 땐 진지해져야 한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요. 수락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당연히 수락해야죠. 이번에 제가 계약금을 받지 않은 게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요. 아니었으면 놈의 종적을 놓쳤다고 쉽게 포기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아마 드넓은 북녘 땅을 하릴없이 쑤시고 다녔겠지요.”

“장기로 그대와 계약을 맺자고 한 건, 내가 하는 일이 얼마 되지도 않아서 밖으로 새어 나가면 곤란하기 때문이요. 만약에 그대와의 단기 계약이 종료되고, 혹 당신이 나와 척을 진 놈과 계약하면 어떻게 되겠소이까?”

”…….”

“그러면 아주 곤란해지지 않겠소. 물론 확률적으로 그럴 가능성은 작지만…….”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음, 원래는 전 계약자의 일을 발설하면 안 되는데, 그대 말처럼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쉽지는 않겠네요, 인간은 갈대 같아서… 호호.”

“내 말이 그 말이요. 그러면 일단 계약 기간을 5년으로 합시다. 어떻소이까?”

“네, 좋아요. 저는 더 길어져도 상관없어요.”

“그러면 자동 갱신 조항을 넣어야겠소. 자, 그럼 지금 당장 계약서를 작성합시다. 상인은 항상 문방사우를 항상 지니고 다닌다오, 흐흐.”

배한나가 좋아서 손뼉을 친다.

짝짝짝!

“좋아요. 보수는 백지 위임할게요, 호호.”

“알았소이다. 내! 그대에게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

둘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주성진이 말리는데도 굳이 자신의 피로 이름을 적었다.

자신의 충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나…….

그녀는 자필 서명을 마치고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주 상단주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깍듯이 주성진에게 공대했다.

“이거, 나도 잘 부탁하오. 그러면 내가 지금 당면한 일을 말해주겠소. 사실 그대와 계약하게 된 계기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오.”

“그게 무슨……?”

“그대의 은둔술 말이오, 하하.”

그러면서 주성진은 지금 본인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말해 주기 시작했다.

“…이상이오.”

“잘 들었어요. 말을 중간에 끊지 않으려고 무진장 참았어요. 아무래도 제가 추적하는 놈과 산검산장이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요.”

주성진은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여긴 사람의 내왕이 적은 곳인데, 굳이 이 길로 갔다면 산검산장과 연관이 있을 확률이 높지…….’

“산검산장과 연관이 있단 말이오?”

“그놈이 동창의 끄나풀 노릇을 한다는 이야기가 한동안 시중에 나돌았어요.”

“아, 그렇소? 혹 그놈을 만나면 어떡하겠소? 잡을 것이오?”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주 상단주님의 작전이 우선이죠. 괜히 그놈을 잡으려 했다가 일을 그르치면 안 되니까요.”

“아마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오. 난 정공법을 택할 것이기에…….”

“안 돼요, 얼마나 많은 고수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너무 위험해요…….”

주성진은 씩 웃었다.

“날 걱정해 주는 건 고맙소이다. 그런데 소저. 성동격서라는 말이 있지 않소. 내가 소란을 피우는 사이 그대가 기밀 서류가 있는지 찾아보시오.”

“그러지 말고 같이 몰래 잠입해 보는 건 어떨까요?”

“글쎄, 그게 가능하겠소? 그곳은 용담호혈 같은 곳인데. 정상적으로 침투하기는 힘들 것이오. 아마도…….”

주성진이 원래 계획한 것도 정공법이었다.

당당하게 쳐들어가 그들을 제압하고 관련 증거를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다만 그녀의 도움이 있으면 일이 보다 수월해질 것 같아 고용한 거였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그녀 같은 인재는 쓸모가 많았다.

배한나는 주성진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내가 다른 놈은 몰라도 독심호리 그놈은 꼭 잡아 보겠소. 소저의 말을 들으니, 그놈은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되는 놈 같으니 말이요. 살인에 강도에 강간에, 거기에 사기까지…….”

배한나에 감격에 겨운 눈빛을 보였다.

포기하고 있었던 의뢰를 주성진의 도움으로 완수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만일 그리해 주신다면 성공 보수의 절반을 드릴게요, 호호.”

*     *     *

“하하하, 호호호…….”

산검산장의 널따란 마당에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척 봐도 무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농익은 여인들을 껴안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데 두 사람만 여인들을 옆에 두지 않고 기다란 탁자 끝 쪽에 앉아, 자석처럼 붙다시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독심호리 고마워, 오늘은 네 덕에 잔치를 열게 되었구나.”

“친구야, 그나저나 내일은 무슨 핑계로 술을 마실 건데……?”

“이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는 거야. 그냥 즐기라고…….”

독심호리는 오랜만에 들른 산검산장에 여전히 잘 적응되지 않았다.

자신처럼 바쁜 이들은 동창에 고용된 자 중 절반뿐이었다.

나머지 절반의 무인들은 일 년 내내 거의 붙박이처럼 산검산장에서 지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릴 적 친구도 그런 부류였다.

‘제길, 누구는 뼈 빠지게 고생하고 누구는 매일 술타령이라니…….’

마음 같아서는 동창과의 계약을 끝내고 싶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동창에서 주는 보수를 무시할 순 없었기에…….

‘제길 괜히 동창과 엮여서, 처음부터 엮이지 말아야 했는데…….’

독심호리는 불만을 접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친구, 동창에서 소식 없어?”

“독심호리. 왜? 내가 부러우냐? 맨날 놀고먹는 것 같아서……?”

“그래 이길용! 한데 너! 자꾸 독심호리라 그럴래?!”

이길용이 씩 웃는다.

“독심호리가 어때서? 나도 그럴듯한 별명이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긴… 나도 내 이름을 까먹을 것 같구나.”

“음, 이번 달에 출정 소식이 있을 것 같다. 오랜만에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지.”

독심호리는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무슨 일이야?”

“잘 모르겠어. 여기 인원 50명 전부 출동하는 거야. 그래서 각자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지…….”

“야, 그런데도 이리 술을 마시는 거야? 여기 상주 인원 전체가 출동하는 것으로 봐서는 위험한 작전인 것 같은데 말이야…….”

이길용이 술을 벌컥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다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태연한 척 술을 마시는 거야. 하지만 저녁에는 각자 무공 수련에 열심히 지. 나도 마찬가지고.”

“낮에 무공 수련하고 밤에 술을 마시든가 해야지, 거꾸로 되었군.”

“작전이 밤이 있는 모양이더라. 그래서 밤에 초식을 갈고 닦는 거지.”

독심호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동창의 무인처럼 집단 전술을 연마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거 혹시 화살받이로 쓰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독심호리는 자기 생각을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에이, 관두자, 확실하지도 않은 건데…….’

“그럼 여인들만 남는 거네?”

이길용이 고개를 저으며 작은 목소리가 말했다.

“너, 외부 일 좀 하더니, 성인군자인 척하네. 너나, 나나 나아가 여기 있는 놈들은 다 하나같이 죽어서 염라대왕에 불려갈 운명이라고!”

“뭐야, 악인은 지옥이라 이건가? 하긴 내가 네놈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였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저 여인들은 모두 죽을 거야.”

“죽인다고? 음, 저들은 죽은 전 황제의 궁녀들이니 마음대로 해도 되겠지…….”

원래는 궁 밖으로 내보낼 궁녀들인데 동창에서 데려간 거였다.

“자리를 비운 사이 여인들이 탈출하면 곤한 하잖아. 혹여나 외부에 소문이 나면 동창에게도 좋을 것 없고…….”

“나중에 심심하지 않겠어?”

“뭐 그러면 동창에서 새로 보충해 주겠지. 뭘 그런 거로 걱정이야, 하하.”

이길용이 술잔을 털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독심호리. 그건 그렇고 넌 언제 떠나나?”

“동창 첩형이 모레 온다고 했으니, 그에게 보고하고 곧바로 떠나야지.”

“후후, 새로운 일을 부여받겠군, 잘 해 봐라…….”

그 순간 산검산장에서 가장 큰 나무 위의 가지가 출렁이며, 무성한 잎사귀 사이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검은 인영은 바로 주성진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술판을 지켜보며 산검산장의 무인들이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는데, 특히나 관심 있게 엿듣고 있는 건 독심호리와 그의 동료였다.

배한나부터 독심호리의 인상 특징을 전해 받았기에 누가 누군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지금 주성진의 마음엔 살심이 들끓고 있었다.

‘모두 용서받지 못할 자로군…….’

거기에 추가로 알게 된 건, 장성 밖 외딴곳의 산검산장이 단순히 동창에 협력하는 무인들이 대기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동창에서 일을 지시하고 보고 받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구린 일을 많이 하기에 이런 궁벽진 곳에서…….’

주성진은 이제 움직일 때라고 생각했다.

휘리릭!

검은 인영이 비조처럼 하늘로 솟구쳤다가 땅에 살며시 안착했다.

“쯧쯧쯧, 대낮부터 술판이라니…….”

“누구?”

“누구냐……?”

느닷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술판을 벌이던 자들이 정신을 차렸다.

“하하하…….”

웃음소리가 파동을 일으키며 퍼져 나가자 그들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 순간 그들에게 나타난 주성진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문을 연다.

당연히 역용을 한 상태였다.

“내가 누구냐고? 음, 지나가는 과객이다. 다만 여행 중에 여비가 부족해서 중간에 보충하려는데 말이야.”

누가 들어도 강도질하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러자 가운데 탁자에서 술을 마시던 장한이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주성진의 2장 가까이에서 멈추어 섰다.

그는 술기운이 남아 얼굴이 벌거스름했지만, 단박에 하늘로 치솟아 주성진 앞에 나타난 걸 보면 무공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가 주성진을 보며 삿대질한다.

“야 이, 미친놈아.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온 거야?!”

“어디긴 어디야. 여행비를 두둑이 챙길 수 있는 곳이지, 하하.”

그 순간 장한의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쳤다.

“곽진아. 죽여 버려!”

“들었지. 미친놈아. 형님이 널 죽이란다.”

“마음대로 해라. 내 실력이 부족하면 내가 죽을 것이고, 네놈의 실력이 모자라면 반대로 네놈이 뒈질 것이다.”

주성진은 그 말을 끝으로 땅을 살짝 발로 박찼다.

그리곤 갈지자 보법을 밝으며 곽진이라 불리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쉬이익!

주성진이 휘두르는 박도가 단박에 대기를 갈라놓았다.

주성진이 박도를 든 건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도법도 틈틈이 익혔다.

그가 익힌 도법은 천뇌자의 미완성의 무공에 수록된 것이었다.

‘후후, 오늘을 위해 익힌 도법은 아니지만, 지금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군. 내 성격에 맞지 않지만, 오늘은 잔인한 도살자가 되어야겠어.’

곽진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 들었다.

‘제길 괜히 뛰어들었어!’

곽진는 주성진의 도초가 번뜩일 때마다 뒤로 연신 물러나기 바빴다.

주성진의 밋밋한 도초는 빠르기도 하였지만, 그 속에 힘이 가득 실려 있었다.

“으으!”

순간 뒤로 열 보를 물러선 곽진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뒤로 밀리다 보니 어느새 바로 전, 술잔을 기울였던 탁자까지 밀려 버린 거였다.

으득!

곽진은 이를 꽉 깨물었다.

동료들이 자신을 비웃을 생각을 하니 오기가 치솟았다.

‘고작 저런 놈에게 밀리다니… 분명 술 탓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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