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황궁무림대회 (7)
주성진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역용을 풀지 않기로 했다.
“미안하오. 역용한 건 사실인데 지금은 풀 수가 없소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참모습을 공개하겠소.”
“흥,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필요 없어요, 그만 가 봐요.”
그래도 그녀가 반말은 하지 않았다.
‘뭐야,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야…….’
“키 큰 소저, 나중에 인연이 되면 봅시다, 그럼 안녕히…….”
주성진이 떠나려 하자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저 사람!’
그녀는 설마하니 주성진이 바로 떠날 줄은 몰랐다.
‘흥, 그냥은 못 보내지!
왠지 그녀는 그의 신경을 박박 긁고 싶었다.
아마도 자신의 미모에 동하지 않는 주성진의 태도에 빈정이 상한 것이리라.
“나에게 볼일이 남았소?”
“나더러 키가 크다고 말한 건 모욕이에요. 우리 동네에선 평범한 축에도 못 낀다고요.”
주성진은 그녀가 북방 출신인 건 진작에 눈치챘다.
그녀의 큰 눈, 흰 얼굴에 오뚝한 코가 전형적인 중원인과 달랐다.
아마도 그녀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서역의 피가 섞였는지도 몰랐다.
“이보시오, 소저! 괜한 시비 걸지 말고 비키시오. 키가 크다는 말이 어째서 모욕이라는 말이오? 칭찬이지…….”
“나에겐 모욕이에요.”
“그럼 나더러 어찌하라는 말이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미안한 짓을 했으나 돈으로 대신 사죄하세요.”
주성진은 어이가 없었다.
“얼굴이 아주 두꺼운데…….”
“이봐요. 그거 내가 부끄러움도 모른다는 말인가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강도도 아니고 지금 뭐 하는 짓이오? 돈을 달라니. 나한테 돈을 맡겨 놨소?”
“당신은 무공 수련 중인 나를 건드렸고, 거기에 모욕까지 했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보상받을 만하지 않나요?”
“하하. 나 원 참… 무공 수련을 길가에서 하는 사람이 어딨소?”
그녀가 쌍심지를 켰다.
“여기가 무슨 길가란 말인가요?”
주성진은 지지 않고 응수했다.
“산길은 길이 아니요? 여기도 엄연한 길이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날 다짜고짜 공격했구려… 그걸 깜박하고 있었네.”
“그래서요?”
“그래서는 뭘 그래서요? 내가 오히려 당신에게 사죄를 받아야겠소.”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렸다.
토라진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이런… 내가 무슨 생각을…….’
“절대로 사죄할 수 없어요.”
“그러면 그 대신 자초지종이나 들어 봅시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고, 당신의 정체는 뭐요?”
주성진은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반면 그녀는 거꾸로 주성진의 화술에 자신이 말려드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흥, 당신은 정체를 밝히지도 않는데, 나만 다 공개하라는 건가요?”
“내 말은 사죄 대신 밝히라는 거요.”
“그러면 당신도 사죄 대신에 모든 걸 밝혀요. 그래야 공평한 건 아닌가요.”
주성진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하하. 어쩌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지…….’
“그래, 좋소이다. 밝힙시다.”
“거짓말하기 없기에요.”
“자. 이러면 되겠소?”
주성진은 자신의 역용을 풀었다.
“어머 잘생겼네…….”
“고맙소.”
“이봐요, 지금 막 당신이 누군지 감이 왔어요.”
주성진은 그녀의 저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자. 나는 신분을 거의 밝힌 셈이고 당신은 누구요?”
“호호. 재신을 만났는데 사실대로 말해야죠.”
“난 이윤을 추구하는 상인이요. 이유 없이 아무에게 퍼 주지 않소이다.”
그녀는 주성진의 말에 배시시 웃는다.
그녀의 박속같은 치아가 가지런히 드러났다.
“호호, 사람이 참 간사한가 봐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이젠 기분이 나쁘지 않아요.”
“음…….”
그녀가 손을 가지런히 모아 포권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전 배한나. 올해 21세이고, 5년 전에 독립해서 낭인회에 들어갔어요.”
“출신이 어딘지 물어봐도 되겠소?”
“빙룡가 출신이에요.”
빙룡가는 마교의 주축 가문의 하나로 지금은 총무련의 일원이었다.
‘역시 거침없는 게 정파는 아닌 것 같았어…….’
“흑룡가가 아니라서 다행이오.”
흑룡가는 총무련에 반기를 들고 지금 무림을 어지럽히는 세력 중 하나였다.
“왜, 그들과 한판 불었나요?”
“그렇소이다. 아 참, 빙룡가는 북해 빙궁과 사촌지간이라던데 그 말이 사실이오?”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중원 땅이 넓다고 하지만 북방 설원의 크기는 중원의 몇 배라고요. 거기서 북해는 지극히 작은 동네에 불과해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대의 말이 일리가 있소이다. 그럼 혹시 강국영, 양은지 그 두 사람을 알고 계시오?”
“강 오빠와 양 언니를 안다고요?”
“그렇소. 지금은 내 휘하에 있소이다. 물론 계약 기간 동안이지만…….”
베한나는 얼굴이 환해졌다.
“호호, 세상 좁네요. 그대와 내가 이렇게 엮이다니. 그 두 분과는 여러 번 같이 작전을 나간 적이 있어요. 그 덕분에 친해졌고요.”
“내가 알기론 여섯 단계만 거치면 세상 대부분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고 하더이다. 하하.”
“어머 그런가요? 신기하네… 실은 말이에요, 저는 의뢰를 받고 누구를 추적하고 있었어요. 한데 여기 근처에서 그만 종적을 놓치고 말았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데, 그때 인기척을 듣고서는 급히 은둔술을 펼친 거예요.”
주성진은 손을 빙빙 돌렸다.
“이거, 이거, 그러면 좀 전 무공 수련 중이라고 말한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구려.”
“아니죠.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은 연습처럼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러니 저는 실전으로 무공 수련 중이었다고요.”
궤변 같지만 맞는 말 같기도 하다.
“알겠소. 한데 나를 알아보자 마자 좋아한 건 뭐요?”
“주 상단주니까요. 최근에 사천 상단까지 손에 넣은 기린아. 뭐 이 정도 충분하지 않나요. 저는 추적에 실패했기에 보수를 받을 수 없어요. 그래서 돈이 궁했는데…….”
“음, 계약금을 받지 않았소? 보통은 5할 정도 미리 받는다고 들었는데…….”
베한나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맞는데, 이번 경우는 경쟁이 치열했어요. 저와 같은 낭인이 무려 열 명이나 지원했거든요. 할 수 없이 제가 파격 조건을 내세운 거고…….”
“누구를 추적하고 있는지 궁금한데 물어볼 수는 없고…….”
그녀의 표정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호호. 물어보세요, 누가 의뢰했는지는 밝힐 순 없지만 그 정도는 말해 줄 수 있어요.”
“공짜요?”
“에이 당연히 공짜는 아니죠. 파격적으로 은자 1냥만 내세요.”
주성진은 미소지었다.
“좋소, 누구를 추적하고 있었소? 그리고 왜?
“독심호리에요, 검은 살쾡이라고도 불리는 작자예요, 그놈에게 의뢰가 붙은 건 놈을 붙잡아 취할 게 있기 때문이에요. 아주 간절히…….”
“음, 취할 것이라. 그게 뭘꼬?”
주성진은 사실 독심호리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뭘 취하려고 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녀가 주성진을 쳐다보며 눈을 살짝 깜박였다.
“은자 한 냥 더!”
“좋소, 하하, 그 정도야…….”
“그건요.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거예요. 잠을 잘 때도요.”
주성진은 목걸이 아니면 반지라고 생각했다.
“목걸이요?”
그녀가 고개를 흔든다.
“그럼 반지요?”
“그것도 아니에요.”
주성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귀걸이요?”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뭐요?”
그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호호호, 호호호…….”
“죄송해요, 웃음이 터져 나오네요, 그건 바로 그의 목이에요. 그의 수급을 소금에 절여서 가져가야 한다고요.”
주성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허, 목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다… 그나저나 남의 목숨을 앗는 게 저리 웃을 일인가, 아니, 마교 출신이라 그런 건가?’
주성진은 낭인과 살수의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물론 낭인이 의뢰받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낭인과 살수의 차이가 뭐라 생각하시오?”
배한나는 주성진이 왜 물어보는지 곧바로 감을 잡았다.
“호호. 불쾌했나 봐요. 제가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인다니까…….”
“그건 아니요. 다만 낭인이 선량한 사람을 죽인다면 살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
“음, 지금 생각해보니 좀 모호한 구석이 없지 않네요. 다만 낭인회 소속의 낭인만큼은 선량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아요. 그리고 기습 공격도 제한을 걸어 두었어요. 하나는 전쟁이나 전투 시, 그리고 또 하나는 상대가 악인인 경우에 한해서요.”
주성진은 더는 이문제로 그녀와 왈가왈부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말은 지극히 주관적이었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밤새워 논쟁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가령 악인의 기준이라는 것도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누구는 소매치기를 악인이라 할 것이고 누구는 악인까지는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음 알겠소이다, 내 말이 불쾌했다면 사죄하겠소.”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누가 그러던데 주 상단주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무림 생리를 잘 모른다고 하더군요, 호호.”
주성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하오문에서 그런 것까지 조사했단 말인가, 나에 대해서…….’
주성진은 그녀와 말을 더 나누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이것 참… 소저, 오늘 이야기 즐거웠소, 다음에 인연이 되면 꼭 다시 만납시다.”
주성진이 주머니에서 은자를 꺼냈다.
그녀에게 은자를 주고 떠나려는 거였다.
“잠깐만요. 혹시 저에게 의뢰할 것이 없나요?”
“글쎄… 지금은 딱히 의뢰할 것 없는 것 같소만…….”
“호호, 이거 아쉽네요…….”
주성진은 곧바로 떠나려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만…….’
문득 그녀가 추적하는 자가 본인처럼 만리장성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북쪽에서 내려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소저, 어느 방향에서 왔소?”
“그야 그대가 온 방향과 같아요.”
주성진의 예상 그대로였다.
“소저, 추적하는 자의 생김새를 알려 줄 수 있겠소? 혹 내가 발견하면 그대에게 알려 주겠소, 물론 공짜로 말이오.”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정말인가요?”
“아, 아니요. 내가 그대를 고용하겠소. 대신 난 장기 계약을 원하오.”
주성진은 덜컥 말을 꺼냈다.
‘에이 모르겠다, 내 마음이 가는 곳으로, 모르는 여자랑 엮이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그녀는 멍하니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주성진이 말을 바꾸자 순간적으로 사고가 정지된 것이다.
“내가 그자를 발견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그를 제압해야 해야 하는 것을…….”
“어머, 저는 그대가 놈을 제압해 준다고 이해하고 있었네요, 호호.”
“이거 큰 오해가 생길 뻔했었군. 난 발견하면 이라고 했는데 댁은 제압하는 거로 인식했구려. 허허.”
그녀가 배시시 웃었다.
“호호, 그냥 제가 바라는 쪽으로 이해한 거죠, 호호호.”
“아니요, 정황상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겠소이다. 자, 그건 그렇고 나의 요청을 수락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