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황궁무림대회 (6)
주성진은 한풀 기가 꺾인 관주를 바라보았다.
사실 그에게 있어 주성진은 지옥에서 온 염라 사자와 같았다.
“자, 선택해라,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증거를 내주면 살려 줄 것이오?”
“물론이다.”
관주는 부관주에게 고개를 돌려 고개를 끄떡였다.
부관주는 관주의 명을 알아들었는지 급히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부관주가 비밀 장부와 동창에서 온 서신을 가지러 갔소. 비밀 장부에는 동창으로 보낸 상납금의 액수와 함께 지급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소이다.”
“서신엔 동창의 직인이 찍혀 있느냐?”
“그렇지는 않소. 다만 필적은 동창의 첩형이 쓴 것이 틀림없소. 나중에 대조해 보면 알 것이오.”
주성진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소기의 성과를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아, 죽은 두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운반책이오. 오늘이 마침 상납금을 내는 날이라 내 직무실에 함께 있었소이다. 다만 그들이 나보다 뛰어난 무위를 가졌다는 건 오늘에야 처음 알았소이다.”
주성진은 죽은 자들의 무위 수준이라면 충분히 기세를 감출만한다고 여겼다.
“그렇군, 그 외 혹 동창에서 들려온 소식 같은 것은 없느냐?”
관주는 잠깐 생각하더니 눈을 빛냈다.
“특별한 소식은 없었소. 다만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자 중 일부가 산검산장 소속이라는 걸 알아냈소. 술집에서 우연한 기회에 그들끼리 하는 말을 엿들었소이다.”
“그럼, 죽은 운반책들도 산검산장 출신이오?”
“십중팔구 그렇소이다. 아, 그리고 산검산장은 북경 인근의 만리장성 너머에 있소이다. 내 생각에 산검산장을 조사하게 되면, 동창이 지금껏 해 왔던 추잡한 일들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을 것이오.”
주성진은 산검산장을 조사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흑도 놈들을 쑤시고 다니는 것보다 산검산장을 조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음 조금 더 생각해 보자.’
“고맙소, 알려 주어서. 그리고 그대들은 내일 날이 밝기 전까진 북경성을 빠져나가시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주 잘 알 거요.”
“그건 잘 알고 있소이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소. 어디 한적한 곳에 잠시 숨어서 지낼 것이오.”
그 순간 부관주가 건물에서 나와 비밀 장부와 서신을 주성진에게 건넸다.
주성진은 비밀 장부의 내용과 서신을 빠르게 읽어 보고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쉭……!
주성진이 떠나자마자 다리가 풀린 관주가 휘청거렸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그가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휴, 북경에서 영업은 오늘부로 끝이다. 지금껏 수고한 만큼 돈을 나누어 줄 테니, 각자 알아서 떠나라. 단 나를 따라오는 것은 말리지 않겠다.”
“관주님, 오늘 여기에 온 자가 누구일 것 같습니까?”
“모르겠다. 아마도 본모습은 아닐 것이다.”
부관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변장한 것 같지는 않던데요.”
“역용이라는 게 있다. 내공으로 얼굴을 변형하는 것이지. 내 생각에 그자는 역용을 한 게 틀림없다. 아마도 동창과 사이가 틀어진 내각 대학사 측에서 보낸 게 틀림없을 것이다.”
다음날 일찍 주성진은 육선문에 서찰을 보내, 오늘 방문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고는 곧바로 산검산장을 향해 떠났다.
만리장성을 정상적으로 통과하려면 신분을 밝히고 몸수색을 받아야 하기에 주성진은 몰래 장성을 넘기기로 했다.
‘음, 발각되면 큰일이야. 자칫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다고.’
만리장성을 무단으로 넘는 건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짐시 후, 북경성 외곽으로 나온 주성진은 다시 북쪽으로 내달렸다.
주변 경물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휙, 휙!
얼마 되지 않아 주성진은 이름 모를 야산의 능선을 타 넘고 있었다.
그다지 높진 않지만, 그 자락이 넓어서 크게 보이는 산이었다.
명승지의 유명한 산처럼 가파른 계곡이나 기암절벽은 드물었지만, 그런대로 수목이 울창하고 오색의 꽃들이 만발해서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마을 인근의 산들은 대부분 민둥산이 많은데 여긴 그렇지 않군. 더구나 수도 북경이 코앞인데도…….’
마을 인근의 산이 울창하지 못한 건 사람들이 땔감용으로 마구잡이로 벌채하기 때문이었다.
순간 지나가는 약초꾼이 있어 주성진은 그를 얼른 붙잡았다.
“실례합니다. 여기 산이 울창한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하하. 외지 분이신가 봅니다. 여기 근처가 황실의 전용 사냥터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길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자칫 사냥터로 들어갔다가 병사들에게 붙잡히면 치도곤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주성진은 약초꾼과 작별하고는 곧바로 발길을 재촉했다.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이자 주성진은 아무 그늘이라도 찾아 푹 쉬고 싶었지만, 그런 유혹을 힘겹게 뿌리쳤다.
‘안 돼! 갈 길이 멀다고!’
마음을 정한 주성진의 발걸음은 그 후 일말의 거침이 없었다.
아름다운 주변 경관이 보여도 애써 무시하며 걸었다.
‘가만 천뇌자의 미완성 무공 증에 양의심법 비슷한 게 있었는데… 한번 시도해 볼까. 밑져야 본전이잖아.’
주성진이 기억을 떠올린 건 분심술이었다.
분심술은 마음을 쪼개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인데, 수많은 장점 중에 주성진에게 와 닿은 것은 걸으면서 딴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럼 해 볼까. 분심술 5성 경지를 단숨에 정복해 보자고.’
그러면서 씩 웃는 주성진이었다.
주성진이 웃은 이유는 비록 동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천뇌자가 완벽주의자라는 것을 절절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후후, 분심술 8성이면 그럭저럭 충분한 거 아닌가? 그 정도면 미완성이라 볼 수 없지…….’
천뇌자가 목표로 한 분심술의 12성 단계에 도달하면 불 속을 걸으면서도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않는 경지였다.
또한, 두 가지 다른 내공심법을 동시에 운용하는 건 7성에 다다르면 시도할 수 있고, 가장 완벽하게 도달하려면 10성이면 충분했다.
시간이 흐르고 처음에 잘되지 않던 분심술이 점차 자리를 잡아간다.
주성진은 마음을 쪼갠 채 걷고 있었다.
‘후후, 잘하면 잠을 자면서도 운기조식을 할 수 있겠는데, 물론 당장은 어렵겠지만…….’
그가 방금 언급한 경지 역시 분심술 12성의 경지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서둘러 발길을 옮기던 주성진은 문득 야릇한 눈빛을 발하며 시선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집채만 한 바위 아래 그늘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언가 느껴졌다.
그는 무작정 걷고 있는 같이 보였지만, 분심술을 운용하고 있는 터라 주변 환경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그것도 매우 민감하게 감지되었고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바라본 바위 그늘에는 사람의 기척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도 좀처럼 감지하기 힘든 미세한 숨결이었다.
주성진은 걸음을 멈추고 바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 누구시오? 왜 기척을 숨기고 있는 것이오?”
기척의 주인공, 암중인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오히려 바위 그늘과 하나가 된 듯 미미하게 느껴지던 숨결마저 거짓말처럼 삼켜 버렸다.
상대는 주성진이 착각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은둔술을 익힌 고수가 분명해 보였다.
주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굉장한데… 귀식대법을 펼친 것인가? 음 아니야, 이건 다른 차원의 공부라고,’
주성진이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사물과 그리고 주변의 환경과 하나처럼 동화할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모름지기 상승의 공부를 익힌 무인이 각고의 수련을 통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 경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상대의 수법은 거의 완벽했다.
지금이 작은 모래 알갱이 하나라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밝은 대낮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정말이지 암중인의 능력은 능히 초일류 이상이라고 자부해도 좋을 정도였다.
하나 상대는 이미 한번 노출되었고, 주성진이 펼친 감각의 그물은 일단 감지된 표적을 놓칠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에이 그러지 말고 나오시죠? 뒤늦게 기척을 감추어 봤자 소용없어요.”
휘이익!
순간 바위 아래 그늘에서 거무스름한 그림자 하나가 비호처럼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와 그림자와의 사이, 족히 오장은 넘게 느껴지던 거리의 공간이 한순간에 압축되며 사라져 버렸다.
쉐애액!
‘뭐야, 저건!’
한 줄기 빛이 주성진을 노리고 있었다.
주성진은 급히 뒤로 물러났다.
순간, 섬뜩한 느낌과 함께 무엇인지 모를 병기에서 뿜어진 예기가 순식간에 그의 코앞을 할퀴고 지나갔다.
주성진은 상대의 무기가 작고 예리한 송곳 같은 것이라는 걸 간파하고 일단 추이를 보기 위해 서너 발짝 더 후퇴했다.
부지불식간에도 주성진은 단병을 사용하는 자의 장기는 접근전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곧, 날 따라붙겠군.’
아니나 다를까, 검은 그림자는 주성진의 예상대로 움직였다.
자신의 장기가 빠른 경공을 이용한 근접전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유령처럼 날렵한 움직임을 보이며 꽤 신랄하게 주성진을 압박해 들어왔다.
하나 경공과 접근전이라면, 주성진도 그 누구에게 뒤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흥, 어딜…….’
주성진은 냉소를 날리며 검은 그림자를 향해 나아갔다.
그러자 상대의 신형이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가 마치 등 뒤에서 누가 떠밀기라도 하듯이 맹렬하게 돌진해 왔다.
‘뭐야. 여자잖아.’
검은 그림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 차림의 복면 여인이었다.
꽉 조인 옷을 입고 있는지라 신체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주성진이 웃음을 머금자 복면 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순간 당황한 듯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은 듯 맹렬히 짓쳐들어왔다.
텅, 텅!
두 사람의 신형이 교차하며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기를 둘러싼 기와 기가 부딪친 결과였다.
하여 주성진은 부딪치는 소리를 통해 복면 여인이 최소 검기상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전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두 사람이 발산한 기세가 점점 더 강해지자, 둘이 움직이는 곳에는 강렬한 바람이 생겨났다.
너무나 빨라 희미해진 두 사람의 신형은 그야말로 빛과도 같았다.
순식간에 서너 합의 교환을 이루었으며, 끝났다 싶은 순간 다시 하나로 뒤엉켜 혼전을 벌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신법이 어찌나 빨랐던지, 어지간한 무인의 시력으로는 그들의 움직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뒤엉켰던 신형이 분리되며 누군가의 손에서 벗어난 검은 물체 하나가 허공 높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꽈아앙!
‘음…….’
복면 여인의 입술 어림에서 한줄기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와 주성진 사이 땅바닥에는 날카로운 한자 가량의 송곳 하나가 부르르 떨며 꽂혀 있었다. 그것이 격돌의 결과였다.
복면 여인 공격은 더할 나위 없이 매서웠지만, 주성진의 힘에 밀려 자신의 무기를 손에서 날려 버린 거였다.
주성진은 한동안 서서 복면 여인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거, 아는 체 좀 했기로서니 너무 한 거 아닙니까? 다짜고짜 공격하다니 말입니다.”
복면 여인은 대답 대신 신형을 옮겨 앞선 격돌로 놓쳐 버린 자신의 병기 집어 들더니, 신경질적으로 복면을 벗었다.
달덩이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햇살에 드러났다.
“흥, 그러게 조용히 길을 갈 것인지 아는 척은 왜 하는데…….”
“소저. 초면에 반말은 좀 심한 것 아닙니까? 보아하니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주성진은 역용을 한 상태라 대략 30대로 보였다.
“억울하면 말을 놓던가? 그리고 당신! 왠지 얼굴에 부조화가 느껴진다고!”
주성진의 가슴이 철렁했다.
‘음, 이번엔 내가 봐도 완벽하게 역용했는데… 그걸 알아봤다고?’
“뭐라는 거요?”
“비겁하게 서리… 난 내 얼굴을 완전히 노출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