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황궁무림대회 (2)
육선문의 연무장을 나온 주성진은 객잔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얼마 전까지 백주관의 무리가 있던 곳으로 주성진이 임시로 머무는 곳이었다.
백주관은 북경의 흑도 무리 중 하나로 얼마 전 관주가 주성진에게 모든 걸 넘기고 떠난 바로 그곳이었다.
주성진은 그날 이후 객잔을 나와 백주관을 거처로 삼았다.
여러 사람의 눈이 쏠려 있는 객잔 보다는 홀로 조용히 지내기에는 백주관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주변에 맛있는 음식점이 널려 있어서, 가서 사 먹거나 음식을 손쉽게 배달시킬 수 있었다.
주성진은 주문한 음식으로 저녁 식사를 한 후,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시간이 좀 남았군…….’
그는 오늘 천년 사찰 계태사에서 동벽태를 다시 만나기로 한 거였다.
계태사는 동벽태가 왕년에 자주 가던 사찰로 그 당시 주지 스님과 호형호제로 친하게 지냈다고 하였다.
‘야밤에 절이라 운치 있겠어, 탑돌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후후, 그건 그렇고 오늘 만나면 저번에 물어보지 못한 것을 반드시 물어봐야겠어.’
주성진은 지난번 만남에서 동벽태가 고주망태가 되는 바람에 그의 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주성진이 물어보려는 건 그가 언제 반로환동했느냐 하는 거였다.
거기에 덤으로 반로환동의 비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주성이 그렇게 다짐까지 하면서까지 물어보려는 건 그 자신도 반로환동하고 싶다는 욕망이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로환동하려면 일단은 오래 살아야 한다고! 그건 진리야!’
한데 그 순간 주성진은 뇌리에 검선 기세옥이 떠올랐다.
반로환동한 동벽태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가 생각난 거였다.
‘잘 지내고 계시겠지, 뭐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음 그나저나, 검선 어르신이 깜짝 놀랄 것 같은데, 내가 심검의 고수를 만났다고 하면…….’
전에 검선 기세옥은 주성진에게 심검은 궁극의 검이라서 하늘의 신선이나 가능한 검이라고 단언했었다.
하지만 그의 단언은 여지없이 깨져버린 거였다.
‘후후, 나도 심검의 그림자를 밟고 있다는 걸 알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주성진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돌연 인기척이 들렸다.
‘뭐지? 누가 여기를? 흑도 패들이 다시 돌아왔나? 에이 귀찮은데…….’
주성진은 투덜거리며 2층에서 1층으로 빠르게 내려왔다.
그 순간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탕탕!
“관주 거기 있느냐?”
주성진은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어디선가에서 분명 들어본 목소리인데…….’
주성진은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누구지? 누구야…? 아 그래 그놈! 첩형 주자홍이다.’
주성진은 동창에서 찾아올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장홍이 방문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거야 원, 여기서 또다시 만나다니…….’
순간 그동안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동료들에게 빼앗긴 도자기가 생각난 거였다.
‘도둑놈 새끼들! 가만! 그럼 저놈이 여기 관주의 술도가를 꿀꺽하려던 장본인인가 본데, 으음, 또 뭐야…….’
주성진의 귀가 쫑긋거린다.
‘제길 한 명 더 있었잖아…….’
주장홍이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음, 도둑고양이처럼 제대로 기척을 숨길 줄 아는 놈이다. 누굴까, 혹 그때 본 놈일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주성진이 등불을 들고 문을 열었다.
순간 등불에 비친 주성진의 얼굴을 본 주장홍이 기겁하며 놀란다.
“헉, 아니, 당신은……?”
주장홍은 곧바로 주성진을 알아보았다.
사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었다.
동창에 복귀한 후 주성진에 대해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장홍이 놀라자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선배 왜 그리십니까?”
주장홍은 주성진에게 눈을 떼지 않은 상태에서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러자 방금 말을 한 자도 똑같이 주성진을 보며 깜짝 놀란다.
“엇,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주성진은 그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저놈이었군… 한데 환관 자식은 보이지 않네, 흐흐…….’
“아이구, 안녕하시오, 이렇게 다시 뵙소이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시오 하하.”
주성진이 넉살 좋게 그들에게 말하자, 두 사람은 영문을 몰라 어찌할 줄 모른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곳은 그들이 아는 백주관의 본거지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주성진이 그때와 달리 그들에게 공대하지 않았다는 것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후에 주장홍이 입을 열었다.
“크음, 그럼 들어가겠소이다.”
거실로 들어온 그들은 몇 번 와 본 장소지만 오늘따라 아주 낯설었다.
관주를 포함한 흑도 무리는 온데간데없고 주성진이 떡하니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길,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주장홍은 고개를 흔들더니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정식으로 인사하겠소. 동창 첩형 주장홍이라 하외다.”
“반갑소, 동창 첩형 강현수라 하외다.”
주성진은 그들의 인사에 화답했다.
“사천 상단의 상단주 주성진이라 하오.”
주성진은 일부러 구주 상단을 빼고 사천 상단의 상단주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래야 좀 더 권위가 있어 보일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주성진의 명성은 널리 알려져서, 동창 첩형인 주장홍이나 강현수가 함부로 주성진을 대할 순 없었다.
그들은 주성진을 공주가 아끼고 있고, 육선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성진이 언제부턴가 제독 태감의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잘 인지하고 있었다.
주장홍은 주성진이 안내한 자리에 앉으며 바로 얼마 전 제독 태감과 나눈 대화를 회상했다.
동창 제독 태감은 줄여서 제독 또는 태독이라 불리는 인물로 야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제군들, 오늘 정기 회의를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부연하겠다. 만일 내가 한 말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너희 첩형 다섯의 목숨은 그날부로 사라질 것이다.”
“…….”
“이번 황궁 무림대회에 끝나고 나서 주성진을 제거할 것이다. 더는 그가 공주 곁에 맴도는 꼴을 못 보겠어. 그러니 각자 좋은 방법을 생각해 보도록! 명심할 것은 우리가 전면에 나서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야. 알겠나!”
“네, 네…….”
회상을 마친 주장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주 상단주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소이다.”
“아, 그렇소이까? 실은 내가 여길 접수했소이다. 관주라는 자한테서 일체의 권리를 양도받았소이다.”
주장홍이나 강현수는 혹시나 했는데 주성진의 이야기를 듣고 머리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제길, 저놈이 다 된밥이 재를 뿌렸구나…….’
‘빌어먹을, 말년을 편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저놈 때문에…….’
둘은 주성진을 씹어 먹고 싶었다.
“이거 그대의 수완이 대단하구려, 부럽소이다. 하하… 실은 우리는 지나가는 길에 여기 들렸소이다. 흑도 무리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우리의 임무라서 말이오…….”
주성진은 속으로 양껏 그를 비웃었다.
‘웃기고 있네…….’
그러면서 주성진은 순간 떠오른 생각을 그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황궁 무림대회가 끝날 때까지 여기서 죽 머물려고 하오.”
그러자 강현수가 끼어들었다.
“훌륭한 객잔도 많은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
“뭐, 때론 혼자가 편할 때도 있소이다…….”
강현수의 속이 바짝 탔다. 그들이 진정으로 노리는 건 양조장의 백 년 묵은 고량주였다.
“혹 관주는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오?”
“그는 죽었소. 나와 계약을 끝내고 여길 나서는 순간 누군가의 기습을 받았소이다. 내가 뒤늦게 달려갔지만 이미 그들은 사라지고 없었소. 만일 내가 볼일만 보지 않았더라면 그를 살릴 수 있었는데…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관주애게 지급한 돈도 그때 없어졌소이다.”
“내가 알기로는 주 상단주의 무공이 상당하다던데…….”
주성진은 그의 의도를 알면서도 능청맞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말이오, 내가 하필 그때 설사가 나서리… 솔직히 기습한 자들을 조금은 추적했소이다. 하나 얼마 못 가서 흔적을 놓치고 말았소… 변명 같지만 기습한 자는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소이다. 내 생각으로는 전문 살수가 아닐지 모르겠소…….”
“음, 그럼 관주의 시체는 어떻게 했소이까?”
“시체는 내가 직접 으슥한 곳에 가서 화장했소이다. 내가 사실 양강 지력을 펼칠 줄 알기에 아주 수월했소이다.”
강현수는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물어보자고!’
“시체를 태운 곳을 알 수 있소?”
“알려 줄 수는 있지만 왜 그리 꼬치꼬치 묻는지 물어봐도 되겠소?”
“일단 그대가 양강 지력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소이다. 다만 말이오, 그대의 일 처리가 상당히 문제가 많소이다. 죽은 자는 으레 관청에 신고해야 하는 법이오.”
주성진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도 무림의 일원, 무림의 방식으로 처리했소이다. 뭐. 그게 문제가 된다면 조사를 받을 용의는 있소. 다만 나도 할 말이 있는데, 내 입이 무정하다고 탓하지 마시길…….”
“그게 무슨 말이오?”
“여차하면 공주님에게 도자기에 관해 말할까 하오. 그래서 말인데 웬만하면 서로 눈감아 주는 게 좋지 않겠소?”
강현수가 말하려는 순간, 주장홍이 그를 살짝 밀쳤다.
“하하하. 알겠소, 그건 그렇게 넘어갑시다. 그러면 혹시 양조장도 인수했소이까?”
“비교적 저렴하게 인수했소이다. 관주를 통해서 제조 비법까지 얻었으니, 후일 양조 사업을 해 볼까 생각 중이오.”
주장홍은 주성진이 나중에 말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백년 묵은 고량주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잠깐, 저렴하게 인수했다고 했소이까? 내가 알기론 비싼 술도 많이 있을 텐데…….”
“비싼 술? 아 백 년 묵은 고량주를 말하는 것이오? 그거라면 내가 선물로 5병을 받긴 받았는데…….”
주장홍은 언뜻 주성진이 말한 바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오, 선물로 받다니…….”
“아. 그게 마지막이라고 했소이다. 나머진 이미 다 팔았다고 하던데…….”
주장홍은 화가나 미칠 것 같았다.
‘관주 놈이 다 팔아 치웠다고?! 적어도 은자 10만 냥을 호가할 텐데… 그러면 그 돈의 행방은……?’
“그러니까 백 년 묵은 고량주가 양조장에 없다는 말이오?”
“그렇소. 한데 표정이 왜 그러시오? 어디 안 좋으시오?
주장홍은 떨떠름한 표정을 재빠르게 지웠다.
“아, 아니요. 음, 우리는 이만 가 보겠소이다. 아직 할 일이 남아서…….”
“그러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이다. 그럼 황궁 무림대회에서 뵙겠소이다.”
“뭐, 그럽시다.”
두 사람은 후다닥 건물에서 빠져나와서는 대화하기 시작했다.
“선배. 저놈의 말을 믿소이까? 아주 혀에 기름칠한 것이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소.”
강현수의 말에 주장홍이 얼굴을 찡그렸다.
“잘 모르겠어. 긴가민가해. 다만 너와 나도 구린 것이 있으니, 이 일을 확대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