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반로환동한 인물을 만나다
성문을 빠져나온 주성진은 인적 없는 곳으로 접어들자 곧장 경공을 펼쳤다.
하지만 한껏 해방감을 느낀 것도 잠시, 자신을 따라오는 인영 때문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성진은 상대가 자신을 추적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쳐가기를 기원해 보지만, 뒤따라오는 자는 주성진의 기대를 가볍게 저버렸다.
‘음, 속도에서 나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어, 더구나 여유롭게 웃고 있잖아…….’
상대는 30대로 보였는데 여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은 상이었다.
주성진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에게 볼일이 있습니까?”
“그럼. 볼일이 있으니 따라왔지, 미쳤다고 할 일도 없이 따라왔겠어?”
주성진은 그의 말투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나보다 연배가 높다 하더라도 말본새가 좀 아니군.’
“그래요?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거죠?”
“너의 정체에 궁금증이 생겼지? 엄청난 속도로 경공을 펼쳤는데 하마터면 널 놓칠 뻔했어.”
“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답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는다.
“야, 너! 환생했다가 나에게 유세 뜨는 거냐? 나도 살 만큼 살았거든…….”
주성진은 뜨악했다.
‘내가 환생한 걸 알아차렸어! 그럼 반로환동의 고수……?’
주성진이 한동안 말이 없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거기 입 놔두고 뭐해? 말을 해야지 말을…….”
“네 맞습니다. 한데 댁은 누구십니까?”
“나? 한때는 황제의 근위대장이었고 지금은 은퇴한 지 오래되었어.”
주성진은 그가 황제의 호위무사였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저… 그럼 어느 분의 근위대장이셨는지?”
“주원장이야… 그와는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어. 그를 보러 가야 하는데 하늘이 자꾸 오지 말라는군. 하하.”
“하! 그러시군요. 저는 주성진이라고 합니다.”
“난 동벽태라고 한다. 한데 진짜로 몇 살이야?”
“환생하기 전에 38세였고, 환생하고 나니 20년이 더 흘렀더라고요.”
동벽태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듯 주성진의 이모조모를 살핀다.
“언제 환생했지?”
“대략 4년 전입니다. 지금의 몸을 주고 떠난 친구가 당시 18세였습니다.”
“그럼 지금 나이가 22살이라는 거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혹 나이를 여쭤 봐도 될까요?”
“후후, 대략 백오십 살, 뭐 그 정도…….”
“아, 그러시군요.”
주성진은 그의 나이를 짐작했기에 그리 놀라지는 않았다.
“아 참, 내가 반로환동한 건 어떻게 알았지?
“그야 누군가에 들었습니다. 반로환동은 못했지만, 그에 근접한 분이었죠. 아마 연배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후후, 재밌군, 나랑 나이가 비슷한 자가 더 있다는 말이지…….”
주성진은 그가 반로환동한 고수를 아는지 궁금했다.
“혹 반로환동한 고수를 더 아십니까?”
“내가 알기는 2명이야, 그들과 한 십 년 같이 지냈었지, 한데 그것도 지겹더라고… 그래서 뿔뿔이 흩어졌어. 대략 30년 전에 말이야.”
“저 그러시면 언제 반로환동하신 겁니까?”
동벽태는 빙그레 웃었다.
“후후, 이봐, 그러지 말고 무예를 한번 겨뤄 보는 게 어때? 그러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든지 말든지 하자고.”
“제가 상대가 되겠습니까?”
“내 몸이 후끈 달아온 걸 보니 상대가 되겠는데… 사실 그래서 한 판 붙자고 말하는 거야.”
“그럼 그걸 알고 저를 따라오신 겁니까?”
동벽태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지, 아까 뭔가가 훅 지나가는데 내 가슴이 울렁거리더라고, 그래서 추적한 거야.”
“솔직히 그때 전혀 낌새를 못 느꼈습니다. 그것만 봐도 제가 하수인 걸 알겠네요.”
“뭐 일단 알겠고, 너는 수중에 무기가 없냐?”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북경에서는 무기를 들고 다니면 안 된다고 해서…….”
“그래? 그럼 나뭇가지라고 하나 꺾던가? 맨손으로는 어림도 없을 걸…….”
“어르신은요?”
동벽태가 손을 흔들었다.
“그걸 미리 알려주면 안 되지… 하하. 자! 그럼 시작할까. 구질구질하게 길게 끌지 말고 짧고 굵게 끝내자고…….”
“네, 알겠습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다.
단단한 나뭇가지를 상대하게 겨눈 주성진은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아니 저건 뭐야…….’
동벽태의 등 뒤에서 자줏빛의 검이 불쑥 솟아오른 거였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진검은 아니었다.
마치 몸의 일부분인양 고고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 기형검인가?’
주성진이 말한 기형검은 진기로 만든 검을 지칭하는 거였다.
주성진은 본인의 생각이 맞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기형검을 자신에게 겨누지 않는 건 먼저 공격하라는 의미로 해석했다.
‘음, 만일 내가 공격한다면 가차 없이 쳐내겠지.’
주성진은 상당한 부담을 느꼈다.
그래도 빨리 공격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존재 자체로 자신의 공간이 허물어질 게 자명했다.
‘점점 그의 기운이 세지고 있어, 어둠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주성진은 지면에 발자국을 남기며 미끄러지듯 앞으로 쏘아졌다.
’어디 한번 어울려 보자고!‘
파앗……!
엄청난 빠르기에 주성진의 잔영이 길게 꼬리를 이루었다. 마친 한줄기 강렬한 뇌전이 동벽태를 내려치는 것 같았다.
꽈지직!
한데도 막혔다.
동벽태가 뽑아 든 자줏빛 검이 주성진의 푸른 빛 검을 거칠게 쳐낸 거였다.
주성진은 물러서지 않고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파파파밧!
어지간한 고수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엄청난 격돌이 순식간에 오갔다.
카카각!
검의 날카로운 기운이 지면을 난도질당하고,
끼이잉, 끼이잉!
대기가 마구잡이로 찢겨 나가며 구슬픈 비명을 토해냈다.
‘저 녀석이…….’
동벽태는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주성진의 공격으로 인해 자신의 공간벽이 헐거워지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제공권이 여지없이 축소되는 느낌이었다.
‘내 공간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이거지…….’
사실 동벽태가 상상한 그림은 그게 아니었다.
주성진이 자신의 영역에서 굼벵이처럼 느려질 줄 알았다.
마치 휘몰아치는 태풍에 힘겹게 버티는 가련한 어부처럼…….
그리고 주성진이 허우적거릴 때 힘을 풀어 그의 숨통을 틔워 주고, 멋지게 승부를 가리려고 했던 거였다.
‘음, 저 녀석의 내공이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조금씩 수세에 몰리는 느낌이 들자 동벽태는 내공을 더욱 끌어 올렸다.
만일, 이 상태가 계속되면, 채 백 초가 지나기 전에 자신의 검이 먼저 무너질 것 같았다.
‘내가 이걸 쓸 줄이야…….’
고개를 살짝 저은 동벽태가 돌연 짧은 기합을 흘렸다.
“야핫!”
동시에 그의 몸에서 자줏빛 기운이 짙어지며 또 다른 검 한 자루가 그의 등 뒤로 솟구쳤다.
주성진은 위험을 느끼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뭐야 두 자루잖아!’
순간 동벽태의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솟구쳤다.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주성진의 몸을 노리고 날아든다.
빠지직……!
“음…….”
‘밀렸다!’
짧은 신음을 흘린 주성진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치며 상대의 검을 쳐내고 있었다.
주성진에 수세에 몰리자 동벽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후후, 그러면 그렇지…….’
돌연 주성진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잖아…….’
주성진은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최선을 다해 보는 거다. 그리고 이건 나에게 절호의 기회야. 언제 어디서 또 다른 반로환동의 고수를 만날지도 모르잖아.’
주성진의 기파가 구름같이 몰려오자 동벽태는 침음을 삼켰다.
‘이런, 도대체 저 녀석의 한계가 어디까지인 거야… 엇!’
주성진의 검이 그의 손을 떠난 것이다,
지금 주성진은 이기어검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전에 펼쳤던 이기어검과 지금 선보이려는 이기어검은 판이하였다.
전에 펼쳐진 이기어검이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절초로서의 의미가 있다면 지금 펼치려는 이기어검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기어검의 진가는 무한한 자유스러움이었다.
하나 지금의 상태는 상대가 강력한 기파로서 방어벽을 쳐놓은 상태이기에 비유하자면 물을 헤치고 유영하는 것이 아니라 꽁꽁 얼을 얼음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
순간 동벽태는 아껴두었던 자신의 모든 것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거였다.
‘저 녀석이 이기어검을 펼치는구나! 만일 내 공간벽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이는 큰일…….’
이기어검이 벼락같이 몰아치자 동벽태는 바빠졌다.
자신의 우려대로 주성진의 이기어검은 거리낌이 없었다.
‘제길, 공간벽이 허물어졌어…….’
카카카칵!
검과 검이 부닥친다.
그 사이에서.
“야합!”
동벽태의 깊은 숨결이 내뿜어진다.
‘너, 죽었어!’
별안간 그의 몸 위로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순간.
어찌 된 일인지 주성진은 왼 어깨를 부여잡고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가고 말았다.
‘으으윽!’
‘쿵!’
튕겨 난 주성진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급한 대로 손을 짚어 큰 부상은 면했지만, 손목이 시큰둥했다.
가까스로 통증을 참고 일어난 주성진은 왼손을 펼쳐보고서는 그제야 피가 흐른 것을 알 수 있었다.
왼쪽 어깨에 상처가 난 거였다.
‘제길,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급히 이기어검으로 방어했건만, 이미 늦어 버렸어. 다행히 호신강기가 발동해서 이 정도 상처로 그친 거야.’
“괜찮나? 이게 잘 제어가 안 돼서 말이야. 그래도 겨냥을 어깻죽지로 했어, 죽지 말라고…….”
주성진은 패배의 아픔을 곱씹으며 동벽태를 바라보았다.
“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닙니다. 그것보다 오히려 엉덩뼈가 부러질 뻔했습니다.”
“허허, 엄살은… 한데 내가 생각한 것보다 상처가 적은데, 혹 극상의 호신강기를 익혔나?”
“극상의 호신강기는 잘 모르겠고, 호신강기를 터득한 건 사실입니다.”
동벽태는 주성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 아무튼 저 친구는 극상의 호신강기를 익혔어. 본인이야 모른다고 하지만… 이것 참 모순이군. 무형검은 무엇이든 뚫을 수 있고, 극상의 호신강기는 무엇이든 방어할 수 있다고 하잖아.’
동벽태는 두 무공의 승패는 결국 익힌 자의 능력과 숙련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후후. 자네 대단하군…….”
주성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봤자 저는 패배자일 뿐입니다.”
“패배자는 무슨… 장강후랑추전랑이라고 아나?”
“그야 장강의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는 뜻 아닙니까?”
동벽태는 고개를 끄떡였다.
“조만간 자네는 나를 추월할 수 있을 것이야. 그때까지 내가 살았을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고 싶군.”
주성진은 그가 펼친 무공이 심검이라고 확신했다.
“제가 심검을 터득할 수 있을까요?”
“내가 보기엔 그 경지에 살짝 걸치고 있는 것 같군, 20년 이내 완벽한 심검을 구사할 수 있을 거야.”
주성진는 20년이라는 기간을 생각해 보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이었다.
분명한 건 심검을 터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벽태 같은 인물을 또 만나면 그때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거였다.
‘음. 욕심 같지만, 기간을 당길 방법은 없을까……?’
“저, 심검을 터득하는 특별한 비결이 있겠습니까?”
“후후, 조바심내지 말게, 서둘렀다간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야. 내 생각에 자네의 호신강기는 대단히 훌륭해. 솔직히 나보다 뛰어난 것 같아.”
“그러니까 우선은 호신강기를 좀 더 갈고 닦으란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