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향시를 치르다 (3)
한편, 주성진은 고뇌에 휩싸여 있었다.
‘음, 금전소비대차 계약서를 회수하지 못하면 허사인데 어찌한단 말인가…….’
순간 공포에 질려 다시 도망쳐 온 여인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래, 내가 그녀를 평생 보살펴 줄 수도 없고, 이참에 본거지에 쳐들어가서 계약서를 빼 오자. 여인의 부모가 빌린 돈은 협상해서 적당한 선에서 내가 대신 갚는 것으로 하고…….’
주성진은 뒷수습은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쓰러진 자 하나를 앞세워 그들 본거지를 가 보기로 했다.
순간 판단으로는 객잔과 가까운 거리에 있을 것 같았다.
채 반 각도 걸리지 않아, 그들 본거지에 도착한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다 도망갔나?’
주성진은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그리곤 감각을 넓히며 기척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설령 어딘가 숨어 있다 하더라도 초고수가 아닌 이상은 숨소리를 숨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아무리 미약한 숨소리라도 주성진의 청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주성진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그러면 그렇지…….’
건물 가장 안쪽에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주성진은 천천히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꽝……!
막 건물 안쪽에 도착할 무렵, 천장이 무너지며 복면을 뒤집어쓴 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단검을 매섭게 휘두르며 주성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음, 좀 전에 상대하던 자들과 천양지차야, 가만 저들이 왜 복면을 쓰고 있는 것이지?’
주성진은 의문을 잠시 미루고 그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여 그들의 예봉을 피한 후에 오다가 길에서 주운 막대기를 좌우로 휘둘렀다.
싸악…….
주성진은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주성진을 노리던 적들의 단검은 허공을 찔렀고, 주성진의 막대기가 복면인들의 어깨를 강타했다.
퍽퍽……!
“음…….”
꽈다당…….
깔끔하고 간결했다.
주성진은 정제된 동작으로 막대를 휘둘렀는데, 내딛는 일보 하나 하나에 강력한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주성진은 복면인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내지른 비명이 아주 짧은 것으로 보아 저들은 살수들이 분명해. 꽤 아플 텐데도 아픔을 참고 있다고! 필시 혹독하게 훈련받았을 테지. 어릴 때부터…….’
복면인을 모두 때려눕힌 순간, 또다시 천장에서 단검을 쥔 이들이 나타났다.
수는 넷이었다.
‘조금 더 강해 보이는데… 그래 봤자, 오십보백보겠지만…….’
주성진은 여유롭게 손을 움직였다.
퍼버벅……!
살수들은 이렇다 할 공격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날아가 처박혔다.
쿵……!
사실 그들은 일류급 살수들이었지만 주성진의 손놀림 앞에선 그러한 것조차 무의미했다.
주성진은 뻥 뚫린 천장을 바라보다 땅을 힘껏 박찼다.
휙!
가볍게 이 층에 착지한 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데, 가만…….’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주성진은 막대에 진기를 주입했다.
그리곤 벽을 갈랐다,
스걱……!
벽이 손쉽게 갈라지며 숨겨진 거실이 나타났다.
그리고 또다시 미닫이문이 보인다.
주성진은 미닫이문을 열었다.
드르륵!
그곳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홀로 느긋하게 술을 마시던 사내는 당장 얻어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야. 두목인가?’
“당신이 전주라는 사람이오?”
사내는 말없이 주성진을 바라본 후에 다시 한번 술을 따라 마셨다.
주성진은 그가 악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의 대담함을 높이 평가했다.
‘음, 제법 강단이 있는 자구나, 공포에도 태연할 수 있다는 건 그런 상황을 헤치고 살아왔다는 의미일 거야.’
주성진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환영하오. 술 한 잔 드시겠소?”
주성진은 아무렇지 않게 그를 마주 보고 의자에 앉았다.
막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으나 사내는 감히 손을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손을 쓸 생각이 없었다.
사내가 잔을 주성진 앞에 내려놓았다.
쪼르르!
“백 년 묵힌 고량주요.”
어느새 가득 담긴 술을 본 주성진은 거침없이 잔을 기울였다.
독이 들어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설사 그렇다 해도 충분히 대처할 자신이 있었다.
‘으음, 좋은 술이군. 돈으로 따진다면 꽤 비싼 술이야.’
마셔본 고량주는 맛의 깊이가 있고 부드러웠다.
“어떻소?”
그가 또다시 입을 열자 주성진은 그를 바라보았다,
“세월의 무게가 제대로 들어간 술이었소. 다만 아쉽소,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본바탕을 버리지 못하니…….”
사내는 주성진이 자신을 비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사람 아니겠소, 하하.”
“복면한 자들은 그대의 수하요?”
“아니요, 내가 고용했소이다. 난 늘 살해 위협에 살고 있으니까.”
“내가 무섭지 않소?”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왜 무섭지 않겠소? 참고 있을 뿐이오.”
“뭐, 긴말하지 않겠소. 부관주라는 자가 오늘 불미스러운 일을 벌이려고 해서 내가 손 좀 봐주었소이다.”
주성진은 사내를 관주로 단정하며 오늘 벌어진 일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자, 내가 여인의 부모를 대신해서 빚을 갚겠소. 단 원금만이오. 이자는 나를 죽이려 했기 때문에 제하겠소. 내 목숨값이 그 정도는 나갈 테니까.”
“그대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겠소, 대신 내 부탁을 들어주시오.”
주성진은 어이가 없었다.
“부탁을 들어달라고?”
“그렇소. 나는 이 세계에서 조용히 은퇴하고 싶소이다. 그러니 도와주시오.”
“내가 도와줄 게 뭐가 있겠소? 그냥 깨끗이 손 털고 낙향하면 그만이지.”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이다. 난 늘 동창의 감시를 받고 있소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북경의 흑도들은 모두 동창의 감시를 받고 있소이다. 그들에게 있어 우리는 훌륭한 돈벌이 수단이외다. 우리가 번 돈의 7할을 꿀꺽하니까…….”
“음, 그러면 살수들을 고용한 이유는 뭐요? 혹 동창의 눈 밖에 난 것이오?”
“술 때문에 내가 동창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소이다. 직접 빚은 다른 술은 넘겨주더라도 방금 그대가 마신 술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소……!”
“혹 동창에서 그대의 양조장을 넘보고 있소?”
그가 고개를 끄떡인다.
“그렇소. 동창 놈들이 술 공장을 넘기라고 종용하고 있소이다. 난 시간을 끌면서 귀한 명주를 안전한 곳에 빼돌리려 하고 있고…….”
“그럼 부탁이라는 게 내가 동창을 위협을 막아달라는 것이오?”
“아니요, 어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할 수 있겠소. 그건 아니고 당분간 여기 계셔주셨으면 하오. 그러니까 나를 죽이고 여기를 차지한 것처럼 가장해서 말이오.”
주성진은 그의 말이 일면 이해가 되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동창의 추적을 받는 자는 죽어도 동창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말은 당신의 이권은 모두 내게 넘긴다고 봐도 되겠소?”
“물론이오, 원하면 자필 서명까지 해드리리다.”
“그러면 그대의 부하들은?”
관주는 손을 흔들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그들은 각자 제 갈길 갈 테니까. 만일 이 자리를 노린다면 그대의 무공으로 제압하면 되고…….”
“그렇게 하다가 내가 동창의 표적이 될 수 있지 않겠소?”
“그대의 무공이라면 며칠을 버틸 것 같은데, 안 그렇소? 검호상인 나리?”
주성진은 순간 아차 싶었다.
‘이런 역용을 하지 않았구나. 저자가 전에 나의 용모파기를 보았었구나.’
주성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뭐. 나야 흑도를 징치한 것으로 하면 되니까. 그러면 동창에서 딴지를 걸지 못할 것이야. 하여간 동창 놈들 뒤가 참 구린 놈들이군. 마음 같아선 확 조져놓고 싶은데…….’
전에 그들에게 뺏긴 도자기가 떠오른다.
‘나쁜 놈들!’
“알았소. 그렇게 합시다.”
“고맙소이다. 답례로 100년 묵은 고량주 열 병을 드리겠소. 내가 마시려고 가져온 것인데…….”
“하여간 여기를 떠나고 나서는 마음을 곱게 쓰시오. 그래야 하나뿐인 인생, 오래 오래 살 것이오.”
“…….”
* * *
와글와글!
북경성 내 웅장한 관청 안으로 문사 복을 입은 문인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모두가 거인이 되고자 모인 이들이다.
나이의 구별은 없었다.
이제 앳된 얼굴의 십 대 중반의 소년부터 중늙은이로 불릴만한 사람까지…….
개중에 어색한 듯 주변을 둘러보는 주성진도 끼어 있었다.
‘하. 내가 결국 회시를 보게 될 줄이야… 합격자의 수가 정해지지 않아 다행이야. 아니면 저들에게 미안할 뻔했잖아.’
주성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 눈빛들이 초롱초롱한 게 만만치 않겠어. 그래도 떨어지면 안 되겠지…….’
주성진은 최고점수로 합격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턱걸이로 붙으면 만족이었다.
그 순간 수염이 멋들어진 관리가 나타났다,
“모두 입장하시오!”
주성진은 과거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전에 자격증과 간단한 몸수색을 받았다.
모두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였다.
지정된 장소에 앉아 준비해 온 지필묵과 붓을 내려놓은 주성진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점점 머릿속이 맑아지고 있었다.
‘좋았어. 한 번 해보는 거야.’
잠시 후 커다란 징 소리와 함께 강단에 선 시험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시험장 곳곳에 울러 펴졌다.
“그럼 1회차 시험을 시작하겠소!”
순간 과거 시험장 곳곳에 배치된 시험관들의 눈이 번득이기 시작했다.
시험 도중 부정행위를 한 자를 가려내기 위해서였다.
시험이 시작되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다 발각되면 곧바로 낙제였다.
사실 주성진이 마음만 먹는다면 옆 사람의 답안지를 훔쳐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쳇, 옛사람의 문체를 모방해야 한다니, 그것 참 마음에 들지 않는군.’
주성진이 과거 시험을 준비하면서 느낀 가장 큰 불만이 바로 그거였다.
그저 자유롭게 답안을 작성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정해진 격식에 맞춰서 답안을 작성하지 않으면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었다.
‘무공에서도 그와 비슷한 게 있지, 곧이곧대로 초식을 고집하는 것…….’
주성진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방금 붙여진 시험문제를 보기 위해서였다.
‘1회차 시험 결과가 가장 중요하다, 이거지…….’
주성진은 단숨에 문제를 읽어내려 가면 보일락 말락 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사서오경을 통째로 외운 보람이 있구나. 그럼 써 내려갈까.’
주성진은 일필휘지로 단숨에 백지를 채워 나갔다.
시간이 흐르고 2회차 시험이 시작되었다.
2회차 시험은 율령과 제도 위주였다.
하지만 통째로 육령과 제도를 외운 주성진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시험이 시작되었다.
3회차는 경사 시무책에 관한 것으로 어떤 상황에 주어졌을 때 가장 적절한 대응을 묻는 시험으로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후후, 사이비 족집게 과외 덕을 보는구나. 내 생각과 조금 다르지만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선 어쩔 순 없지…….’
주성진은 과거 추앙받던 자들이 한 행위에 빗대어 답안을 적어 나갔다.
‘야호! 다 끝났다… 하하.’
주성진은 답안지를 후다닥 제출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시험장을 떠났다.
‘자, 어디로 갈까? 바람도 쐴 겸, 일단 외곽으로 나가자, 성안은 답답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