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향시를 치르다 (2)
다음날 전직 한림원 학사라는 인물이 객실로 주성진을 찾아왔다.
척 봐도 전형적인 학자풍의 인물로 얼굴이 반듯하고 지혜롭게 생겼다.
객실에서 그와 인사를 나는 주성진은 비교적 젊어 보이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높게 쳐도 마흔 살은 넘지 않아 보였다.
‘한림원 학사라면 대과에 급제한 인물인데, 왜 일찍 관직을 그만둔 걸까…….’
“저, 방 학사님, 관복을 너무 일찍 벗은 것은 아닌지……?”
“후후, 내가 선배이니 말을 놓아도 되겠소?”
“그럼요. 스승으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방 학사는 주성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공주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인물이라지… 직업은 상인인데 무공을 익혔고…….’
사실 그는 지난밤 느닷없이 주성진을 가르치라는 통보를 받고 부랴부랴 주성진이 머문 객잔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회시, 전시를 준비하는 학사들을 훈육하는 인기 강사였다.
“솔직히 내가 북경제일서원의 선생이 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오. 아버님이 크나큰 빚을 져서 어쩔 수 없었소, 하루가 멀다고 사채업자들이 찾아와 괴롭히니…….”
주성진의 그의 부친이 도박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궁금하지만 차마 물어볼 수는 없다.
“하면 지금은 다 해결이 된 건가요?”
“아직 조금 남았소. 하나 이번 그대를 향시에 급제시키면 꽤 큰돈이 들어온다고 알고 있소이다.”
“하하. 제가 기필코 향시에 급제해야겠군요. 인 그렇습니까?”
방학사가 고개를 끄떡인다.
“잘 부탁하오. 부디 합격하길 간절히 기원하겠소이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음… 하면 내가 그대에게 질문을 좀 하겠소이다. 그대의 수준을 먼저 알아야 하니까…….”
잠시 후, 주성진은 그의 질문을 막힘없이 답했다.
“…입니다.”
“허허. 대단한 기억력이오. 실력이 출중하니 전혀 문제가 없겠소이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후후, 겸양의 말로 받아들이겠소. 자! 그러면 본격적인 공부는 내일부터 하기로 하고, 오늘은 나와 가볍게 문답이나 나누어 봅시다. 재미 삼아서…….”
주성진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향시와 관련이 있을 거야, 틀림없어…….’
* * *
“상인이라고 들었는데 무공을 왜 배운 거요?”
주성진은 예상 밖 질문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지금껏 그와 비슷한 질문을 수없이 받았기에 지겹기도 했다.
‘또 모범 답안을 말해야 하나…….’
“제가 형산파 출신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무공을 배워야지요.”
“음, 주변 환경 때문에 배웠다는 말이군. 그러면 상술은 어떻게 배웠소이까?”
“어릴 적부터 관심이 있었고. 본격적으로 상인이 되려고 결심한 건 형산파의 부흥을 위해섭니다. 물론 제 개인의 꿈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요.”
방 학사는 고개를 끄떡였다.
“후후, 문파를 위하는 그대의 마음가짐이 갸륵하오. 그러면 확대해서 나라를 위해서 그대가 할 일은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물론 상인이 처지에서 말이오.”
“그야, 우선은 나라에서 정해준 세금을 꼬박꼬박 내어야겠지요. 그리고 형편이 닿는 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결국은 나라를 위하는 길이니까요.”
“자, 방금 그대 입을 통해 세금이란 말이 나왔소이다. 세금의 항목은 누가 만드는 것이오?”
주성진은 방 학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이제부터는 시험과 관련이 있겠는데, 내가 그를 잠시 오해했었군…….’
“관련 세금은 관리들이 입안해야겠지요. 물론 결정은 황제 폐하가 하시겠지만…….”
“그렇소이다. 하면, 이 대목에서 뭐 느낀 게 있을 텐데……?”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관리들이 다방면에 지식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비단 세금뿐만 아니겠지요. 농사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야 할 것 같고…….”
방 학사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 말해 주었소. 무릇 관리가 되려면 이렇듯, 수많은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하오. 그리고 그 지식의 근간은 과거의 사례가 되겠고…….”
“네. 맞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래서 말인데, 내가 시험이 출제될 만한 사례, 오천 개를 정리했소이다. 아마 그 중에서 틀림없이 문제가 출제될 것이오.”
오천 개라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족집게라고 했는데…….’
“그걸 다 외우라는 말입니까?”
“왜 많소? 내가 보기에는 적은 것 같은데…….”
“향시용으로만 간추리면 안 될까요? 전 대과 그러니까 회시, 전시를 볼 사람이 아니라서요.”
방 학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까 본인 입으로 다방면의 지식이 많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소이까? 그러니 잔말 말고 외우시오. 만일 오천 개 밖에서 시험이 출제되면 그땐 내 목을 분질러도 좋소이다.”
주성진이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았다.
‘난 관리가 되려고 시험을 보는 게 아니오. 제길…….’
“알겠습니다. 열심히 외우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다지 그대에게 어렵지 않을 것이오, 그대는 상승 무공을 익혀서 기억력이 좋을 테니까…….”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감이 오고 있었다.
“혹 무공을 익혔습니까? 아니라면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시는지……?”
방 학사가 주성진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었다.
“하하, 가전 무공을 익혔소이다. 무공은 아버님께 배웠고…….”
“음, 무공을 익힌 걸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금침대볍으로 내공을 억제해서 그렇소이다.”
주성진은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렸다.
“아, 내공을 폐쇄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소이다. 언젠가 무공을 익힌 게 쓸모가 있었으면 좋겠소이다.”
“당연히 쓸모가 있지요. 사실 지금의 무림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매우 혼란스럽다고요.”
방 학사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나도 소문을 들었소. 일측촉발의 상황이라고…….”
한데 그 순간이었다.
“아아악!”
여인의 자지러지는 비명이었다.
“1층 음식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나 봅니다. 내려가 보겠습니다.”
“음… 웬만하면 못 본 척하고 그게 어렵다면 살상은 하지 마시오. 여기 북경에는 하다못해 흑도 불한당까지 권력과 손을 잡고 있으니 말이오.”
“알겠습니다.”
잠시 후, 주성진은 난관을 뛰어넘어 일 층으로 내려섰다.
상당히 높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내려서는 그의 모습은 마치 깃털을 연상하게 했다.
와아아!
주위에서 탄성이 일어났다.
고작해야 한 동작에 지나지 않지만 보통 사람들에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결코, 무공을 익히 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음을…….
주성진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주성진이 가까이 접근하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질을 터주었다.
‘뭐야, 여인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사람들은 구경만 했단 말인가…….’
주성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뺨을 맞아서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주성진이 다가가자 여인 가까이 있는 장한이 고개를 돌렸다.
“웬만하면 상관하지 말고 돌아가시지……?”
고개를 돌린 장한이 주성진을 향해 내뱉은 일성이었다.
“그대가 평화롭던 객잔의 분위기가 해쳤는데 그냥 돌아가라고? 게다가 힘없는 여인을 무차별 폭행까지 하고 말이야.”
비록 저음이지만 내공을 길러 내뱉은 한마디라 묵직했다.
“더 가까이 다가오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자초지종을 말해라, 내가 이해하면 돌아갈 테니까.”
“내가 내 시녀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말이야. 이년은 내 눈을 피해 다른 남자에게 추파를 던졌단 말이다.”
그 순간 여인의 뾰족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저는 시녀가 아니에요. 단지 부모님이 저 사람들에게 큰 빚을 졌어요, 그로 인해 오늘부터 제가 빚을 갚는 중이고요.”
그러자 장한이 소릴 질렀다.
“신체 포기각서를 쓰지 않았더냐? 그러니 넌 내 시녀가 맞다.”
주성진은 흑도패인 악덕 고리대금업자에게 그녀의 부모가 돈을 빌렸다는 걸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음, 비록 불법이지만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 나로서도 어쩔 수 없군…….’
주성진은 장한을 바라보았다.
“이봐, 저 여인의 부모가 갚아야 돈이 얼마야?”
“왜 네가 갚게? 그러면 열흘 후에 이야기하자고, 그전에는 안 돼!”
주성진은 장한이 시커먼 속내를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을 어찌해 보려고 저러는구나, 나쁜 놈이네. 안 되겠다.’
쉬이익!
순간 주성진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어느새 장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퍽!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가볍게 턱을 올려쳤다.
크아악!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장한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혼절하며 쓰러졌다.
그의 입에서 부글부글 게거품이 새어 나왔다.
‘때로는 법보다 무력이 앞서는 법이지…….’
주성진은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빚은 내가 갚을 테니 얼른 돌아가시오.”
“정말인가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저에게 어찌 그런 온정을 베푸시는지?”
“세상이 좀 더 아름다워져야 할 것 같아서 말이요. 얼른 가시오.”
그녀는 고개를 깊숙이 숙이곤 떠나갔다.
한데 그녀와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이 슬그머니 객잔을 나가는 걸 주성진은 간과했다.
주성진은 여전히 모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자.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식사하세요.”
사람들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데 그 직후 나갔던 여인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대인, 살려 주세요. 놈들이 와요.”
“놈들? 혹 기절한 자와 한패들 말이오?”
그녀가 고개를 끄떡이는 순간, 주성진은 빠르게 객잔을 나갔다.
혹여나 싸움이 일어난다 해도 바깥에서 싸우는 게 나았다.
자칫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객잔이나 손님에게 피해가 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주성진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수십의 흑도들이 달려오는 게 눈에 보였다.
“저놈이다, 저놈이 부전주님을 해코지했어!”
웬 놈 하나가 주성진에게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뭐야, 저놈. 앗! 그러고 보니 좀 전 안에 있었던 놈이구나.’
주성진이 주먹을 말아쥔 순간 흑도들이 들이닥쳤다.
퍽퍽!
추풍낙엽이다.
공격은커녕, 휘몰아치는 주성진의 주먹에 변변한 대응도 못 하고 부지기수로 쓰러졌다.
아아악……!
순식간에 삼십여 명이나 되었던 흑도들이 땅바닥에 드러누운 건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으으으…….”
“커억…….”
흑도들은 일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하나 제대로 서지 못하고 땅바닥을 박박 기며 신음을 흘렸다.
다만 죽은 이들은 없고 중상을 입을 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저자가…….”
뒤따라온 방 학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수야, 상상 이상의…….’
조금 전 그는 주성진의 손놀림을 눈으로 전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게 뜻하는 것은 그의 동체 시력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주성진의 주먹이 빨랐다는 것이었다.
‘하하. 사람이 어찌 저리 빠를 수가, 저 사람이 조금 전 나와 이야기 나눈 사람인 맞는 것인가?’
방 학사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와 여차하면 비무 한 번 해볼까 생각한 그였다.
하지만 자신 따윈 발끝에 닳을 수 없을 정도로 주성진은 아득히 높은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