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향시를 치르다 (1)
주성진은 육선문이 관리하는 안전 가옥에서 공주를 다시 만났다.
‘음…….’
만나는 순간, 그녀의 화사하고 아름다운 옥용이 눈에서 떠나질 않았다.
지난 두 번의 만남에서 어딘가 초조하고 불안한 모습을 본 주성진으로서는 오늘의 모습이야말로 공주의 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야 원, 공주에 대한 불만이 눈 녹듯이 사라지려고 하네…….’
저도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자, 주성진은 자신의 마음을 강하게 부정해 보았다.
‘아냐. 공주의 미모 때문이 아니야, 내가 기분이 좋아서 그래. 비록 미완성이지만 천뇌자가 남긴 비급을 손에 넣을 수 있었잖아…….’
주성진은 하루속히 시간이 되면 천뇌자가 남긴 미완성의 무공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걸로 무공을 더 높이 끌어 올리려는 측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무당파의 시조 장삼봉처럼 남들이 우러러보는 무학 종사가 되고 싶었다.
무학이 상승함에 따라 주성진의 목표도 점점 다양해지고 원대해지고 있었다.
‘후후후…….’
주성진이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순간, 공주가 입을 열었다.
“주 상단주, 고생 많았어요, 덕분에 한시름 놓게 되었어요.”
“하늘이 도와서 무사히 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어려운 고비가 여러 번 있었거든요…….”
주성진은 공주에게 자신의 노고를 강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그래야 돌아오는 것도 클 테니까…….
“미안해요, 어려운 일을 부탁해서… 주 상단주를 그리 보내고 나서, 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답니다. 매일 밤 궁내 법당에 가서 주 상단주의 무사 귀환을 빌었어요.”
주성진은 그녀의 말이 진실일까 가늠해봤다.
‘음, 아직은 모르겠는데…….’
“아, 그러셨군요. 공주님이 저를 위해 빌어주시다니 이거 삼생의 영광입니다. 저, 하온데 공주님! 하면 그들의 요구조건을 모두 다 수용하시는 건가요?”
공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네, 아버님의 윤허가 떨어졌어요. 아, 그리고 다시 한번 주 상단주께 감사드려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그녀는 주성진이 천뇌옥에서 태어나고 자란 두 아이를 거둬들인 것을 언급하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친동생 둘이 생겼다고 생각하려고요. 그건 그렇고요. 공주님! 좀 너무 하셨습니다. 저에게 미리 자초지종을 알려주지 않으시고…….”
돌연 공주가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자 주성진이 급히 일어나 만류한다.
“공주님, 그러시지 마세요.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말 미안해요. 진실을 다 말하면 주 상단주가 거절할까 봐 두려워서요. 사실 그 일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거든요. 아시잖아요. 아버님의 신임을 잃지 않아야 제가 복수할 수 있다는 것을… 흑흑.”
공주는 지난번 암살당할 뻔한 일까지 거론하면서 주성진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주성진은 내심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녀의 연기 표정이 압권이었다.
‘휴, 내가 졌다, 불여우가 따로 없어. 음, 그렇게 권력이 좋은 건가…….’
“제가 괜한 말을 드려서 공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전까지 울음을 터트릴 것 같던 그녀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감돈다.
“아니에요, 호호. 음… 이제 제가 주 상단주께 선물을 드려야 할 차례군요. 원하는 게 있으면 주저 말고 뭐든 다 말해 보세요. 제 능력이 닿는 한 해결해 드릴 테니…….”
주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후후, 능력이 닿는 한이라… 철통같이 방어하는군. 그럼 간밤에 고민했던 것을 이야기해 볼까. 뭐 사실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 외는 달리 거창한 게 없더라고. 사천상단은 이미 내 수중에 있고, 휘주상단도 조만간 내 손 안에 들어올 것이고, 조선 사신단 합류도 그다지 문제 될 게 없을 것 같고…….’
주성진이 저리 생각한 건 이미 사천상단을 수중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사천 상단의 주 수입원은 뭐니 뭐니 해도 차나 소금의 전매권, 그리고 곡물 군납권이었다.
이는 전체 수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사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부연하면 관과 거래를 한다는 건 상단의 명성과 대중들의 신뢰가 동시에 올라가는 걸 의미했다.
그러니 상단의 이름값만으로 손쉽게 장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신규로 진입하는 게 힘들지, 기존 이권을 유지하는 건 큰 실책을 범하지 않는 한 관례상 계속 이어지는 게 불문율이었다.
만일 신생 상단인 구주상단 만으로 그러한 이권을 수중에 넣으려 한다면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을 거였다.
그 과정에서 피, 땀, 눈물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고…….
“공주님! 그저 지금처럼 계속 저를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주가 깜짝 놀란다.
”뭐라고요? 응원해 달라고요?“
공주는 주성진이 금전적인 사례를 요구할 거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주성진과 타협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응원을 해 달라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원래 예상과 다르게 상대가 반응하면 놀라고 당황하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주성진은 공주의 놀라는 표정을 세세히 살피며 힘차게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거 돈을 달라는 말보다 무서운 말이군요. 호호.”
주성진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공주님. 그저 말 그대로 따뜻한 응원이면 족합니다.”
“따뜻한 응원이란 말이죠… 호호호.”
공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주성진, 네가 무덤을 팠어. 자고로 따뜻한 응원이란 살을 섞어야 제맛이거든.’
공주는 주성진을 부마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주성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음, 문제는 그가 나와 결혼할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 내가 상인이나 무인과는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 뭐 그의 마음을 얻는 건 천천히 진행하면 되고, 시간이 많으니까…….’
주성진은 화제를 바꾸었다.
“저… 공주님, 황궁 무림대회는 어떻게 되었나요?”
“한 달 후에 다시 하기로 했어요. 사실 무림대회가 다시 열리는 건 전적으로 주 상단주의 공이 커요. 우환거리를 해결해 주었으니까요.”
“아. 네…….”
순간 공주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주 상단주! 긴히 할 말이 있어요.”
“아, 네. 말씀하십시오.”
주성진은 바짝 긴장했다.
‘저 여우가 또 뭘 말하려는 걸까…….’
“내가 보기에 주 상단주는 무예와 상술 외에도 학문에도 일가견이 있어 보여요…….”
주성진은 잠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강하게 긍정하고 있었다.
‘그럼, 전생에서 학자가 되고픈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고, 여건이 그리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공부는 열심히 했어…….’
“아, 아닙니다. 그저 모자람 없이 글을 읽을 수준입니다, 하하.”
“호호. 그런가요…? 그러면 하나 물어보죠. 무공이나 장사도 머리가 똑똑하면 유리하겠지요?”
“네. 그렇습니다만, 아,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한답니다…….”
공주가 눈을 흘긴다.
“뭐예요? 자기 자랑하는 건가요?”
“아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한데 갑자기 학문은?”
“그게 말이죠. 소위 학문을 익힌 자들이 상인이나 무인을 업신여기는 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내 말에 동의하시죠?”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주 상단주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주고 싶어요. 따뜻한 응원이야 당연한 거고…….”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하하.”
사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다.
하지만 예의상 주성진은 그렇게 답변했다.
“호호호!”
공주는 빙그레 웃었다.
주성진이 점점 자신이 의도하는 바에 빠져들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 상단주, 그래도 사람의 도리가 그런 건 아니죠.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있어요.”
“아, 네…….”
주성진은 최대한 반응을 자제하려고 했다.
섣불리 기대감을 표출하면 사람이 좀 경망스러워 보일 것 같아서였다.
“보름 후에 북경에서 향시가 열려요. 하북성 주관의…….”
향시는 3년에 한 번 각 성의 주관으로 열리며, 합격한 자는 거인으로 불린다.
거인은 나라의 보조를 받을 수 있고 지방 현령이나 현승이라는 하위직 관직을 제수받을 수 있었다.
물론 더 열심히 공부해서 회시, 전시에 통과하면 진사의 칭호를 받고 중앙 관직의 높은 직위에 다가갈 수 있었다.
주성진은 순간 눈을 깜빡거렸다.
‘향시? 갑자기 여기서 향시가 왜 나오는 거야? 음… 내게 학문이 어쩌고저쩌고 한 게 향시와 관련이 있는 건가?’
주성진은 공주가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심하자. 그녀의 의도에 말려들지 말아야 해!’
“아, 그런가요? 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주 상단주에게 제 권한으로 기회를 주려고요.”
“기회요? 그게 혹 향시와 관련이 있습니까?”
공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호호. 바로 맞추었어요. 내가 주상단주에게 향시를 치르게 해주겠어요.”
주성진은 순간 할 말을 잊었다.
‘나보고 향시를 보라고? 그럼 현시, 부시, 원시를 건너뛰게 해준다는 것인가?’
현시, 부시, 원시는 향시를 치르기 전 치르는 과거제도였다.
보통 원시에 합격한 자를 생원이나 수재라고 불렀는데 생원만 되어도 대단한 인재였다.
“공주님, 얼떨떨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군요.”
“왜요, 싫은가요? 주 상단주라면 충분히 향시에 합격할 것 같은데요. 뭣하면 제가 좋은 스승을 붙여 줄 수도 있어요. 일종의 족집게 과외 같은 것이지요. 호호.”
주성진은 내심 열심히 주판을 튕겼다.
‘음, 분명 공주에게 무슨 의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싫지 않단 말이야. 거인이라는 칭호를 받으면 남들이 날 장사꾼이니 무식한 무인이니 하며 얕잡아 보진 못할 거야…….’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공주님, 대신 떨어지면 큰 망신이니 좋은 스승을 붙여 주십시오. 시간이 촉박하지만 남은 기간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호호. 알겠어요. 사실 걱정이 안 되는 게, 그대처럼 무공이 아주 높은 경지에 다다르면 그냥 살짝 지나친 것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러니 대과 급제면 몰라도 향시 정도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죠.”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그녀의 말을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긴 합니다. 공주님.”
“나도 남자로 태어나서 과거를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공주님, 공주님은 남들이 우러러보는 황제 폐하의 천금이십니다.”
공주가 눈을 흘겼다.
“그래서 뭔가요? 헛소리 그만하고 공주로 태어난 걸 영광으로 알아라, 그런 말인가요?”
“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성진은 마땅한 변명거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제길, 괜히 말했다가 혹만 붙였네…….’
“알았어요. 한데 다음부터는 말을 가려서 하세요. 남녀평등의 세상이면 모를까, 지금의 시대는 아무리 공주라고 한들 그저 여자라고요. 자칫 머나먼 오랑캐 땅에 시집갈 수도 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공주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