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공주와의 재회
다음날, 북천문의 일을 해결한 주성진은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꼈다.
‘아, 잘 잤다. 그나저나 조자양도 곤히 잠을 잤을까 몰라…….’
지난밤 일의 결과는 조자양이 문주로 복귀하고 문주 행세를 한 문주의 이복동생과 원로원의 원주 두 사람의 추방으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그 외 가담한 인물들은 죄가 가볍고 본인들이 깊게 뉘우치고 있어서 추방만은 면했고.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일어난 주성진은 허기를 달래기 위해 허겁지겁 객잔에 딸린 음식점으로 향하다 왕천유를 만났다
반갑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하려는 주성진은 왕천유의 뒤에 면사를 쓴 여인을 발견하고 급히 손을 내렸다.
‘제길, 공주가 여기에 웬일이야.’
주성진은 면사를 쓴 여인을 보자마자 공주라는 걸 알아차리고 주변 시선을 의식해 전음으로 인사를 전했다.
―공주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어요. 어디 가려는 길인가요?
?아, 그게 식사하러 가는 길입니다.
?그럼 다녀오세요. 미안하지만 그대의 방에서 기다려도 되겠지요. 그대와 할 말이 있는데…….
?아… 네, 그럼요.
주성진은 왠지 불길한 마음을 지을 수 없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기에 공주와 왕천유을 자신의 방으로 안내하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한데 그 순간 왕천유의 전음이 귓전을 스친다.
?이거 참… 본대에 복귀하니까 그대에 대해 추가로 보고할 필요도 없었소. 윗분들이 그대의 최근 행적을 모조리 꿰차고 있었소이다. 아마 우리가 오고 있다는 걸 알고는 정보원을 파견한 모양이오. 그리고 이 일이 우리 쪽뿐만 아니라 황궁 구석구석에도 널리 알려진 모양이오.
?허허, 그렇소이까?
?후후, 그대가 유명 인사가 된 것이지. 그런데 오늘 아침 난데없이 공주가 육선문에 찾아오지 않았겠소. 그래서 내가 호위 겸 길잡이가 되어서 여기에 온 것이오.
?음, 그러면 단둘이 온 것이오?
?그렇소이다. 그리고 언뜻 들었는데 황궁 무림 대회가 연기가 될 수도 있었다고 하더이다.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 혹 무슨 일이 있소?
?음, 정확히는 잘 모르겠소. 다만 추측하건대 요즘 무림이 심상치 않으니까, 음…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소이다. 뭐, 한가롭게 황궁 무림 대회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지…….
잠시 후, 맞바람에 게 눈 감추듯 식사를 마친 주성진은 급히 공주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공주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들었다.
‘제길 부탁이라고 하니 거절할 수도 없고. 이거야 원 진퇴양난이구나… 이게 바로 물에 빠진 사람 구해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지 뭐야.’
주성진은 공주를 구해 준 일이 자신을 성가시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공주의 부탁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바보나 할 짓이었다.
부탁이 아니라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라 봐야 했다.
게다가 주성진은 홀로 강호를 주유하는 인물이 아니라 거대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는 그의 어깨 위에 많은 것이 놓여 있다는 걸 의미했다.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한적한 시골에 은거하기에는 짐이 너무나 무거웠다.
그렇지만 살짝 반항하는 의미로 공주 앞에 불경하게 인상을 찌푸린 주성진이었다.
“공주님,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대체 천뇌옥에 누가 있기에 폭동을 우려한다는 겁
니까?”
공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도 의심되는 자들이 많아서 잘 모르겠어요. 현장에서 그곳을 지키는 책임자에게 물어보세요. 좀 더 자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제 임무는 천뇌옥을 둘러보고 나서, 공주님께 직보하는 게 다인 게지요?”
“그래요. 무사히 일을 마치면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어요.”
주성진은 공주의 대답을 귓등으로 흘리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동시에 그의 눈에서 한 가닥 섬광이 떠올랐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지금 주성진은 좀 전 공주가 한 말을 되새김하고 있던 거였다.
‘이는 음모야. 세상에… 황궁에서 무림인을 잡아들였다니… 물론 8할은 직접 잡아들인 건 아니고 총무련을 통한 것이라 해도… 음, 난 황궁과 총무련이 그렇게 밀착되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구나. 이런 제길! 결국 나도 그 비밀은 안 장본인이 되어 버렸네. 앞으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어.’
사실 황궁에서 죄를 지은 무림인을 잡아들인 건 목적이 있어서였다.
유사시 그들을 이용하거니 그들의 무공을 엿보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리 할 수 있던 결정적 이유는 천뇌옥의 존재가 컸다.
천뇌옥은 원나라 시절 무림 고수를 가둔 천혜의 감옥이었다.
절대 탈출할 수 없다고 알려진.
당시 많은 무림인을 원나라가 죽이거나 가둔 이유는 이들이 원나라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몽골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움은 무림인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붙잡힌 무인 중 일부는 변심해서 몽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라가 바뀌었으면 천뇌옥을 폐쇄했어야 마땅하지. 대체 왜 존치해 놓은 거야!’
이틀 후.
주성진은 감찰관 자격을 행사할 수 있는 통행패를 받았다.
그리곤 곧장 지도 한 장을 받은 주성진은 그길로 천뇌옥으로 향했다.
천뇌옥은 북경과 하북성의 경계에 잇는 해타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해타산은 예로부터 경관이 수려하기로 소문난 산이라 주성진은 주변의 풍광을 음미하며 천뇌옥으로 이동했다.
‘저기군.’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자그마한 동굴이 바로 그 입구였다.
주성진은 굴 입구에 서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음, 드디어 왔구나. 가만… 그러고 보니 억울하게 끌려온 자들도 있을 것 같은데…….’
모를 일이다.
그 순간 파란 하늘의 끝, 그 아득한 곳에서 철새가 떼를 지어 날아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 왔다.
‘철새들은 자유롭게 창공을 휘젓고 다니는데, 갇힌 무림인들은 얼마나 답답할까…….’
주성진은 상념을 접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천뇌옥 안으로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물론 그전에 외곽을 지키던 금의위 군사들에게 통행패를 보여 준 건 주지의 사실이었다.
이내 주성진의 모습은 캄캄한 암흑 속으로 파묻혔다.
동굴은 어둡고 습했다.
동굴 속의 어둠을 헤쳐 들어가며 주성진은 무저갱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동굴 속에서 일렁이는 어둠은 야차의 숨결처럼 끈끈하고 칙칙한 느낌을 주어 더욱 숨이 막혔다.
더구나 소음이라곤 한 점도 없는 정적이 죽음을 연상케 했다.
주성진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정적과 어둠 속에서 보이지는 않으나 도처에 죽음을 위한 안배가 깔려있다는 것을.
그의 뒤에는 금의위 경비 무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이거 마치 죽음으로 가는 길 같군.’
뒤따르던 금의위 무사 중 통성명을 한 경비 조장이 주성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감찰관님, 이 길이야말로 지옥으로 향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길입니다. 지옥은 죽어서야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이곳은 살아 있는 채 지옥보다도 훨씬 무서운 삶을 살아야 하니까요.”
“그렇겠네요. 세상이 좁다고 날뛰는 무림인들이 밖으로 나갈 희망이 완전히 배제된 채, 죽을 때까지 이곳에 갇혀 살아야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여기를 지날 때 왜 횃불을 들지 않는 것입니까?”
경비 조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관례라고 하는데… 뭐 그냥 어둠에 익숙해지라는 뜻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뭐… 무릇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지요.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주성진이 맞장구를 쳐주자 경비 조장이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 감찰관님! 이 동굴 속에 깔린 죽음의 냄새를 느끼셨습니까?”
주성진은 담담히 대답했다.
“동굴 안으로 들어온 직후부터 드는 느낌에 무슨 안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말이죠.”
“역시 대단하십니다. 사실 저희가 걷고 있는 이 통로는 설령 신선이라 해도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안배가 깔려 있습니다.”
주성진은 빙그레 웃었다.
“신선조차 빠져나갈 수 없는 안배라… 이거 오싹한 데요. 하하.”
주성진이 잘 응대해 주자 무척 기분이 좋은 듯 경비 조장이 얼른 말을 이어 갔다.
“지금까지 저희가 걸어온 길은 대략 백여 장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주성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략 그쯤 될 것 같군요.”
“백여 장을 지나는 동안 이십 장 간격으로 다섯 개의 두꺼운 철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주성진은 본능적으로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동굴 천장 위에 뭔가 있을 줄은 알았지. 그것이 철문이라… 물론 그게 다는 아닐 것이고…….’
바로 그 순간 경비 조장의 말이 이어졌다.
“철문은 두께가 반장에 이르는 묵철로 만들어졌으며 기관이 발동하여 통로가 봉쇄되면 그 사이의 모든 공간에서 맹독을 지닌 독지네들이 쏟아져 내릴 것입니다.”
주성진은 순간 가슴이 섬뜩해졌다.
“하하, 치밀하군요. 그럼 어딘가에 독지네가 서식하고 있다는 말인데…….”
“그렇습니다.”
“안배가 그게 다는 아니겠죠?”
경비 조장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요. 감찰관님께 말씀드린 안배는 천뇌옥에 가해진 것 중, 겨우 일 할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아아. 그렇습니까? 이거 감사합니다. 친절히 알려 주어서요. 사실 자세한 내용은 현장에서 들으라는 말을 듣고 왔지만, 제가 물어보기 전에 말씀해 주시니 절로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네요, 하하.”
경비 조장이 손을 들었다.
“아닙니다. 감시관님.”
“역시 금의위 무사는 아무나 되지 못한다고 하던데 윤 조장님을 보니 잘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데 그건 그렇고 여기에서 계속 근무하는 건 아니죠?”
“네, 돌아가면서 근무합니다. 제 동료 중에는 황궁이나 전쟁터보다 여기가 났다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한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 같아요. 물론 외지에서 근무하면 녹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긴 하지만요.”
주성진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디.
“그것참 부럽군요, 난 무료 봉사나 다름없는데…….”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따로 받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알아서 악착같이 챙겨야 합니다. 그게 금전이 될지. 인맥이 될지, 또 다른 뭐가 될지 알 수는 없지만…….”
경비 조장은 눈을 껌뻑였다.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제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지요?”
“네. 제가 여기에 근무하느라 바깥 상황에 어두운 편입니다.”
“사실 저는 상인입니다. 일단은 그냥 그렇게만 알고 계십시오, 그건 그렇고 설치된 기관이 앞으로 쭉 이어지겠죠?”
경비 조장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앞으로 이백여 장을 더 가야 뇌옥을 지키는 자들의 처소가 나오는데 그곳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관과 진법이 거미줄처럼 설치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