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주술독에 중독되다 (1)
"주 상단주님, 어떤가요?"
"정말 대단한 작품이군요. 한데 저 선들은 금박을 입힌 것 같은데요."
"네. 자개함의 고급스러움을 더하기 위해 금으로 선을 만들었답니다. 자 그러면 좀 더 자세히 자개함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저도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언제든지요. 음, 주 상단주님이 자개함을 처음 봤을 때는 아름답다는 생각밖에 안 드셨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을 거예요. 아무리 자개함이 귀중하다 해도 비급에는 못 미쳤을 텐데, 저희가 계속 열쇠 타령만 하고 있으니 말이죠……."
주성진은 그녀가 말한 대로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자개함의 뼈대는 목재였다.
그 위에 옻칠하고 조개껍데기로 멋스러움을 더했다고 해도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고수가 날카로운 검으로 자개함을 베어 버린다면 충분히 그 속의 비급을 꺼내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설마 자개함이 너무 소중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무슨 곡절이 숨어 있는 겁니까?"
"네, 사실 자개함은 단순히 목재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목재 속에 만년 한철이 들어가 있어요. 저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인데 당시 저희 선조를 너무 좋아했던 장인이 자발적으로 만년 한철을 집어넣었던 거예요."
"……."
"제 생각에 장인은 자개함이 절대 파괴되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마치 난공불락의 성처럼 말이죠."
주성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대단하군요. 뭐 사랑의 힘이라고 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장인의 노력은 정말 후대의 본보기가 되는군요. 이제 한 가지 의문은 풀렸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부른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루주는 차를 마시며 목을 축축하게 적신 후 입을 열었다.
"주 상단주님은 소문처럼 이기어검의 고수시지요?"
주성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호호,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더욱 감개무량합니다. 음, 주 상단주님! 제가 아는 한 이기어검의 고수는 몸속 기운을 외부로 무한하게 뻗을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주성진은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절대로 무한한 건 아닙니다. 유효거리라는 게 존재합니다."
"음, 궁극에는 무한하다고 들었는데……."
"네?"
주성진은 그녀의 말이 순간 이해되지 않았다.
만일 그녀의 말이 옳다면 지금껏 자신이 아는 이기어검의 지식이 잘못된 거였다.
그 순간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그 부분을 논쟁하려는 건 아니니까 넘어갈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주 상단주님이 이기어검의 고수라는 겁니다. 그렇다는 건, 기의 유형화를 완성한 것이고 이는 본인의 기운을 이용해 그 어떤 것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 내기를 이용해 무엇이든지 만든다고! 음, 그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게, 어쩌면 실용적이지 아닐 수는 있어요. 가령 검이 없어서 기를 단단히 뭉쳐 기검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게 얼마니 쓸모가 있겠어요. 기검을 만들 노력이면 다른 무공과 초식을 전개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죠……."
주성진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순간 생각해 봤다.
기를 뭉쳐 무기를 만든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주제였다.
하나 주성진은 루주의 말과 달리 실용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아니야,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기를 유형화해서 무기를 만든다는 건, 아주 획기적인 생각이라고!'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게 있었다.
'가만, 굳이 무기가 검이나 도일 필요는 없잖아. 만일 기운으로 암기로 만든다면 괜찮겠는데… 일반적으로 뛰어난 암기는 만들기도 까다로울뿐더러 일일이 나중에 회수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으니까 말이야.'
주성진은 암기를 자신의 기운으로 대체하려는 생각을 퍼뜩 떠올린 거였다.
그러다 화살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맞아, 이기어시! 그런 게 있다고 들었어! 전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잘하면 가능하겠는데…….'
이기어시는 자신의 기운으로 화살을 대체하는 무공이었다.
주성진은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그저 허황한 생각이라고 느꼈을 뿐, 더는 갚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물론 그 당시는 자신의 무공이 일정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였다.
공력도 지금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고…….
만일 지금의 상황에서 이기어시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주성진의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보자, 공력 제어를 정교하게 해서 기운의 소모를 줄인다면 나중에 괜찮은 무기로 활용할 수 있겠어.'
그렇게 주성진이 이기어시에 대한 생각으로 흐뭇해하고 있을 때, 루주의 고운 음성이 고막을 때렸다.
"주 상단주님, 제 이야기 듣고 계신 거죠? 자꾸 웃으시는군요."
"아. 죄송합니다. 이야기를 계속하십시오, 하하."
"네, 기로 도나 검을 만드는 건 실용적이지 않지만 아주 유용한 사용법이 있답니다. 그건 바로 열쇠를 만드는 거랍니다."
주성진은 눈을 깜빡였다.
'열쇠라고, 뭐 가능은 한데…….'
"주 상단주님. 그러니까 제 말은 자물쇠의 구멍에 기운을 불어넣어 열쇠를 만드는 거랍니다. 마치 거푸집을 이용해 쇳물로 검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지요."
주성진은 그녀의 말에 무릎을 쳤다.
탁!
'허, 그거 기발한 발상이로군, 만일 그녀의 말대로 된다면 이 세상의 금고라는 금고는 모조리 열 수 있다는 건데, 이 기회에 의로운 도둑이 되어볼까. 하하하.'
그녀가 비유한 쇳물이 기였고. 열쇠 구멍은 거푸집이었다.
"루주님, 제가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어리석네요, 하하."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주 상단주님이 필요를 못 느껴서 그런 겁니다. 반대로 저희는 필사적으로 매달렸고요. 다만 그 방법만 생각한 건 아닙니다. 약물로 신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시도했어요, 솔직히 시간이 좀 더 주어졌다면 성공했을 거예요, 휴, 그래서 너무너무 아쉬워요, 그게……."
"음, 약물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군요. 하루아침에 연구한 것은 아닐 것이고… 가만, 혹 지금껏 못 만든 게 돈 때문입니까?"
루주의 얼굴에 슬픈 미소가 얼핏 그려졌다.
"가히 천문학적인 금액이라 볼 수 있어요. 달리 말해, 부르는 게 값이랍니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서……."
"그게 뭡니까?"
"바로 공청석유랍니다."
공청석유는 주성진 자신도 구하려고 했던 영약이었다.
물론 본인이 필요했던 건 아니고 그걸 구해서 강설현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던 거였다.
"아. 공청석유!"
"네, 공청석유, 해서 저희는 돈을 벌기 위해 기원을 차렸던 것입니다. 물론 다른 목적도 있었지만……."
"그게 무슨 말씀인지? 다른 이유가 있다고요?"
주성진은 아차 했다.
그러면서 급히 손을 흔든다.
사실 어렴풋이 떠오른 게 있었다.
"거북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왜 죄송하다는 말씀인가요? 저희는 아무렇지 않아요. 솔직히 종족 보호를 위해서 그런 거랍니다. 여자 혼자 아이를 낳을 수는 없으니까요."
주성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 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이제 말씀은 다 드린 것 같고 주 상단주님의 결단만 남은 것 같은데, 저희에게 요구하는 걸 말해 보십시오."
"그전에 한 가지 더 질문해도 될까요?"
그녀가 고개를 끄떡인다.
"말씀하십시오."
"저… 모든 분이 미인이라고 들었는데, 그것도 유전인가요?"
"글쎄요. 유전은 유전이긴 한데 그건 선택에 달린 것 같군요. 태어나는 아이가 미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호호."
주성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참… 나도 당연한 것을 물었네, 상대 남자도 미남이어야 되겠지…….'
"헤헤, 그렇군요. 그럼 루주님이 먼저 조건을 말해 보십시오."
순간 갑자기 그녀가 고개를 깊숙이 숙인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반드시 들어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제발요."
주성진은 그녀가 무리한 부탁을 할까 봐 우려되긴 했다.
그래도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잘 알기에 웬만하면 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합리적인 선에서…….'
"일단 말씀해 보십시오."
"저희는 장사를 배우고 싶습니다, 해서 주 상단주님 밑에서 10년간 일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무사가 아니라 장사꾼입니다. 만일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무보수로 일을 하겠습니다. 직책은 최하 말단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녀가 열변을 통하자 주성진은 그녀의 진심을 온몸으로 느꼈다.
"알겠습니다. 그러겠습니다. 하하."
주성진은 자개함을 바라보다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이기어검을 펼치려는 기수식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 이상한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머리가 뱅글뱅글 돌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이 소리는…….'
쿵! 쿵! 쿵! 쿵!
급히 고개를 돌리니 루주를 포함한 네 여인이 짚단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단 한 여인만 제외하고…….
"호호호……."
'사갈 같이 웃는 저년은 총무단의 송조아!'
주성진은 그녀를 노려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범인이 너냐?"
"주술독에 중독되고도 용케 버티는군. 하지만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주술독?"
주성진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빌어먹을, 주술독은 또 뭐야… 설마 주술로 만든 독이란 말인가…….'
"호호, 이 방에서만 통용되는 독이지. 하나 그 효과는 여느 그 어떤 독보다 뛰어나지. 가히 고금 최강이라고! 누구도 벗어날 수 없고 누구도 해독할 수 없다. 오직 나만이 해독할 수 있지."
"너는 누구냐?"
"누구긴 총무단의 송조아. 보고도 모르느냐?"
"아니야. 넌 송조아가 아니야."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호호. 죽어서 염라대왕께 물어봐라, 내가 누군지…….'
그녀의 눈이 차갑게 변한다고 생각한 순간.
엄청난 기운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기세는 과히 죽음을 연상시키는 힘이 있었다.
'으윽, 지독하군. 피부가 갈가리 찢어지는 듯하다.'
주성진은 엄청난 고통 속에 무력하기만 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무저갱 속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음, 이거 혹시 의형살인이란 거 아닐까?'
하필 그때, 살의를 머금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절대 고수의 권능이 떠오른다.
'제길…….'
눈을 감고 버티고는 있지만, 혼백이 달아날 지경이다.
주성진은 산산이 흩트려지는 정신 줄을 억지로 붙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호호호. 어때?"
'헉! 유령인가? 언제 그녀가 나에게 다가왔단 말인가?'
주성진은 전혀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성진의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등 뒤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을 받으며 비명을 토한 것이다.
"으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