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봉황루에 가다 (3)
일행이 기방으로 안내된 뒤, 주성진은 유소군을 따라 봉황루의 루주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늘 일체의 화대를 받지 않겠다고 말한 유소군의 말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을 왜 보려고 하는지가 몹시 궁금했다.
넌지시 물어봤지만, 유소군은 조개처럼 일을 꽉 다물고 있어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루주의 집무실에 들어가자 4명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주성진은 아름다운 여인들을 바라보다 철관음을 단숨에 후루룩 마셔 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주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사실 루주의 얼굴만 봐서는 그녀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오히려 주성진의 눈에는 유소군보다 더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엄연히 그녀는 4대 가인보다 한 배분 앞선 인물이었다.
"갈증이 심하셨던 모양입니다. 차를 좀 더 드릴까요?"
"아닙니다. 차 맛이 일품이군요."
"다행입니다. 차가 마음에 들었다고 하니까… 일행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의자를 당겨 앉았다.
"주 상단주님을 이 자리에 모신 건 모종의 부탁을 하기 위해서랍니다. 사실 저희에겐 말 못 할 병이 있는데 오랫동안 이를 치유하기 노력해 왔어요."
주성진은 생각난 게 있어서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음, 혹시 그 병이 햇볕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닌가요? 봉황루가 지하에 자리 잡은 것도 그렇고, 좀 전에 유 소저가 아니 정보 단주가 커다란 양산을 들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호호, 대단한 안목이십니다. 맞습니다. 저희는 햇볕을 몹시 싫어한답니다. 만일 따가운 햇볕이 눈 속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얼마 가지 않아 저희는 실명하게 된답니다."
주성진은 깜짝 놀라 루주를 바라보았다.
"그런 병이 있나요?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게 좀, 음… 일반인에게 없는 특별한 병입니다. 저희는 5세가 되면 곧바로 요음신공을 익혀야 하는데 그 병이 바로 요음신공의 부작용입니다."
주성진은 과거 요마가 익힌 내공이 요음마공이라는 것을 용케 기억해 냈다.
지독한 음기를 내뿜어 빙궁의 빙천설공과 함께 극음지공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내공심법이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빙천설공은 남녀구분 없이 익힐 수 있지만, 요음마공은 여인이나 환관처럼 양물을 거세한 자들만 익힐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름이 유사한 무공을 책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만……."
"요음마공이겠지요…? 호호, 그럼,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제부터 저도 요음신공을 요음마공이라 칭하겠습니다. 그게 세간에서 통용되는 이름이니까……."
"고맙습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제가 부담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머릿속에 박힌 이름을 쉽게 고치기가 어렵거든요. 하하. 그건 그렇고 제가 읽은 바에 의하면 요마의 독문심법인 요음마공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게 아니었군요……."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보시다시피 사실이 아니지요. 그래서 좀 놀라셨나요? 저희가 요마의 후예라는 게……."
"뭐, 놀랐다기보다는 솔직히 얼떨떨합니다. 전혀 인과관계가 없을 것 같던 마교가 최근에 부쩍 저와 친숙한 느낌이라서 말이죠……."
루주 진옥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숙하다고요?"
"아. 그게 친한 친구라는 뜻은 아닙니다. 언젠가부터 저의 가까운 곳에 있더라고요. 비근한 예로 암상이 있지 않습니까, 하하."
"암상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주성진은 대충 말하기로 했다.
아직 상대의 의중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 주성진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주가 입을 열었다.
"그랬었군요, 암상과 인연이 있다니……."
그녀가 말을 흐린다.
주성진은 봉황루와 암상이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중에 확인해 보고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자.'
그 순간 루주 진옥기가 요음신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주성진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귀를 쫑긋거리며 귀를 기울이든 주성진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문을 열었다.
"저… 아까 말씀하신 내용 중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음신공을 익히면 부작용이 생긴다고 하셨는데, 그럼 요음신공을 익히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요? 세상에는 무공을 익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저희도 잘 모르겠어요, 어릴 적부터 요음신공을 익히지 않으면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가지 않아 죽게 되거든요. 아마도 요음신공을 익히면서 신체에 변화가 생긴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게 유전이 되는 것 같아요."
"……."
"아,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을 솔직히 알려드리자면 저희가 아이를 낳으면 모두가 여아입니다. 남자는 태어나지 않아요."
주성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기하군요. 음, 말씀하신 것처럼 신체의 변화가 후대에 유전되는 게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이런 말 드리면 죄송하지만 결국 요음마공은 불완전한 내공심법 같군요."
진옥기가 고개를 끄떡였다.
"인정하겠습니다. 다만 요마 시조는 그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천마의 도움으로 자신이 만든 무공이 그런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그럼 요마는 부작용이 없었다는 말인가요?"
"네, 그리고 지금껏 조사한 결과로는 요마 시조는 완벽한 극음지체였습니다. 그래서 부작용이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후대는 그렇지 못했지요. 아마 지하에서 요마 사조가 이 사실을 알고 몹시 슬퍼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주성진은 새삼스럽게 봉황루의 여인들이 천마와 요마의 후예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그녀들이 신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하하. 이것 참, 직속 후예라는 말이지…….'
주성진이 잠깐 딴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진옥기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요마 사조 이전에도 이미 극음의 무공은 존재했습니다. 해서 요음마공이 완벽히 새로운 무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그 이전의 극음 무공들을 참고했을 테니까요."
"아.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요음마공의 부작용과 제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음, 좀 혼란스럽고 의아스러울 겁니다, 바로 말씀드리지요."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러시지요."
"저희가 주 상단주님께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요음마공의 부작용을 제거해 달라는 것입니다."
"네, 제가요? 어떻게……."
주성진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저희가 천마의 태양안을 익히게 해주시면 됩니다."
주성진은 눈살을 찌푸렸다.
천마의 태양안은 아주 고약한 무공으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상대의 눈을 멀게 한다는 무공 아닙니까?"
"정확히는 영원히 눈을 멀게 하는 게 아니고, 한동안입니다. 그리고 태양안은 공력이 2갑자 이상이어야 펼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천마신공을 익혀야 오롯이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답니다."
그녀는 주성진이 생각하는 태양안에 대해 조금이라도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한편, 주성진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떡이다가 돌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천마신공이 실전되었다고? 그거 좀 이상한데…….'
"저기, 천마신공이 정말로 실전되었나요? 제가 알기로는 아닌데……."
"전해져 내려온 천마신공은 천마가 죽고 난 뒤 그분이 남긴 일기장을 보고 재구성한 비급입니다. 천마 본인이 직접 만든 게 아닙니다."
"허허. 이거 새로이 알게 된 내용이 참 많군요. 그렇다면 저의 역할이 무엇인가요? 설마 저더러 천마의 태양안을 구해 달라는 건 아니겠죠……?"
루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네, 그렇습니다. 요지는 태양안을 구해 달라는 게 아니고 태양안을 익힐 수 있도록 장애물을 제거해 달라는 겁니다."
"장애물이 뭔가요?"
"그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건 주 상단주이라서 가능한 부탁입니다. 왜냐면 주 상단주님은 이기어검의 고수시니까요. 그런 이유로 어렵게 이 자리로 모신 거랍니다."
주성진은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음, 그렇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후 주성진은 그녀가 하는 말을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잘 들었습니다. 한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궁금해지는군요. 빨리 자개함을 보고 싶습니다만……."
그녀가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자개함을 보여 드릴 테니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하자고요."
"물론입니다. 그러고 말고요."
주성진은 그녀가 직접 자개함을 가지로 간 사이 그녀가 말 한 것을 다시 떠올렸다.
'하하, 자개함에 얽힌 사연이라…….'
태양안의 비급을 입수한 요마의 후예들은 태양안을 보관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장인에게 자개함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최고의 장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나전칠기 자개함을 만들어 주었다.
자개함을 받은 요마의 후예들은 곧장 비급을 자개함에 보관했고,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는 듯했다.
한데 후일 태양안을 보기 위해 자개함을 여는 순간, 요마의 후예들은 문제를 알아차렸다.
그건 바로 장인에게 받은 열쇠가 수수깡처럼 부서진 것이었다.
분명 처음엔 열쇠가 단단했었는데…….
사실 태양안을 구하고 나서 곧바로 누군가가 비급을 보고 익혔다면 문제될 소지가 없었다.
하지만 요마의 후예들은 모종의 일로 곧바로 태양안을 익힐 틈이 없었다.
어쨌든 문제를 안 그들은 장인을 찾아갔으나, 이미 장인은 서신을 남긴 채 종적을 감춘 후였다.
서신에는 구구절절 사랑의 배신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장인에게 의뢰를 맡긴 요마의 후예가 장인을 기만한 거였다.
요마의 후예는 장인을 유혹해 명품 자개함을 만들게 하고는 헌신짝처럼 장인을 버린 것이었다.
장인은 늦은 나이에 가정을 꾸릴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모든 게 수포가 되었고, 그 분노가 가짜 열쇠로 이어진 거였다.
만일 장인이 요마의 후예들은 절대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아픈 사랑의 상처는 남기지 않았을 터인데 그걸 몰랐던 거였다.
물론 사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자개함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조심스럽게 자개함을 받은 주성진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난 뒤 자개함을 열었다.
딸깍!
청명한 소리와 함께 입을 벌린 자개함.
그 순간 세월의 무게가 코끝을 부드럽게 찔러와 주성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음, 기분 좋은 냄새군. 전혀 역하지 않아…….'
다시 눈을 뜬 주성진이 자개함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헉! 대단하다!'
사실 자개함 속에는 또 하나의 자개함이 들어 있었고, 주성진은 세월의 무게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새것처럼 아름다운 자개함에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건 국보감이다. 어찌 이리 정교할 수가!'
자개함의 표면에는 아름다운 십장생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는데 곧바로 움직일 듯 그 생동감이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