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강을동을 만나다
바로 이때, 손뼉 치는 소리가 들렸다.
짝! 짝! 짝……!
주성진은 중년의 인물에게 손을 흔들었다.
"아아, 그러지 마십시오."
"아니외다, 충분히 칭찬받을 일을 하였소이다. 소위 육선문의 포쾌란 것이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하는데 대단한 일을 한 거요, 박수를 받아 마땅하외다."
주성진은 중년인의 입에서 육선문이 거론되자 두 눈을 치켜들었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나 급히 고개를 돌리니 왕천유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중년인이 육선문의 고위 간부라는 말인데. 왕천유와 깊은 관계이기도 하고.'
순간 왕천유가 입을 열었다.
"스승님, 아니 순회사자님 안녕하십니까?"
"이 몸은 안녕 못하시다, 네놈의 꼬락서니를 보니까."
"죄송합니다. 하지만 동창과는 엮이지 말라는 명이 있어서……."
순회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왕천유, 내가 처음부터 봤거든, 저 상인이 나서려는 걸 내가 말렸지. 먼저 나서지는 못할망정… 쯧쯧."
"순회사자님, 저 그게 말입니다, 음식값 시비는 흔히 있는 일이라……."
"그렇다고 힘없는 노점상을 내버려 둬! 내가 너에게 그렇게 가르쳤나?"
왕천유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주성진이 나섰다.
"저, 제가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시오, 아 그전에 우리 어디 가서 통성명이나 합시다, 바쁘지 않다면……."
"아, 네, 그러시지요."
잠시 후 인근 음식점에 자리 잡은 통성명을 마쳤다.
순회사자는 강을동이라는 인물이었고, 왕천유는 역산도를 제외한 그들 부하 모두를 먼저 북경으로 보냈다.
왕천유가 순회사자 강을동을 바라보았다.
"저… 최근 무림 상황에 밝지 못한 것을 보니 어디에 다녀왔습니까?"
"다녀오긴 무슨… 황궁 깊숙한 곳에 있었지. 공주마마의 명으로 황궁 내 서고의 책들을 새롭게 분류하고 낡은 것은 보수하고 뭐 그랬다……."
"하하, 그거 중노동이나 다름없는데. 저처럼 적당히 학문을 배웠으면 그런 곳에 불려가지도 않았을 텐데, 안 그렇습니까? 스승님!"
강을동은 왕천유의 농담에 빙그레 웃는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소싯적에 너무 공부를 열심히 했어, 하하."
그러면서 강을동은 대화의 화살을 주성진에게 돌렸다.
"주 상단주! 그대는 학문을 어디까지 익혔소? 내 생각에 높은 경지까지 익힌 것 같은데……."
"아, 뭐 장사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익혔습니다, 하하."
"장사에 지장이 없을 정도라… 너무 겸양하는 것 아니오?"
"아, 아닙니다, 순회사자님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지요."
강을동은 의자를 바싹 당겨 앉았다.
"나중에 진지하게 학문을 논해 보기로 하고, 그 전에 궁금한 게 참 많소이다. 우선 공주님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한번 해 보고 싶은데?"
주성진은 내심 깜짝 놀랐다.
'뭐야. 내 표정을 읽었나?'
주성진은 그가 공주를 언급했을 때 살짝 놀라긴 했었다.
"음, 아직은 말하기 조심스럽습니다."
"뭐야, 그럼 안면이 있다는 말이네. 긴가민가했었는데……."
"저의 표정을 읽으셨습니까?"
강을동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사실 내 취미가 그림인데 특히 초상화를 잘 그린다오. 그래서 자랑은 아니지만, 인물의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희로애락을 대강 짐작할 수 있소이다, 하하."
"아, 그러시군요, 대단하십니다. 한데 황궁 서고를 정리하는데 왜 불려 가셨는지요? 황궁엔 한림원 학사도 많은데 말입니다, 황궁 무고라면 모를까……."
황궁에서는 일반 서적과 별개로 무서는 따라 엄중히 관리하고 있었다.
"그게 무공을 익힌 자가 필요해서 그렇게 되었소. 책임자로 나뿐만 아니고 동창과 금의위에서도 각 한 명씩 차출되었지… 사실 공주가 그런 명령을 내린 건 한림원의 학사들이 제대로 분류하지 못한 책들이 많아서 그랬소이다. 쉽게 말하면 서고에 무공서가 다수 끼어 있었다는 말이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며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무공서적이 황궁으로 흘려 들어갔으면 저런 일이 벌어졌을까 생각했다.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까?"
"음, 많지… 이번에 황실 무공대회가 끝나면 그 문제로 논의가 있을 것이오. 한바탕 보물찾기가 시작될 수도……."
주성진은 그가 말을 흐렸지만,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한 모양이군…….'
이때 다시 강을동의 말이 이어졌다.
"주 상단주는 지금의 무림을 어떻게 보고 있으시오?"
"그게 음… 저는 일촉즉발, 살얼음판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마치 화산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면 주 상단주는 어떻게 처신할 것이오? 상황이 나쁜 쪽으로 흐른다면 말이오."
주성진은 강을동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듯이 무슨 의도가 있는지 엿보기 위해서였다.
"제가 처음 장사를 시작했을 때는 장사와 무림은 별개라고 생각하였지요. 한데 이거 점점 사업을 진행할수록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서로 간에 얽히고설킨 게 너무 많아요."
"음, 그게 그대가 무공을 익혀서 더 그런 건 아닌지……?"
"네, 그런 측면이 없진 않지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에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군요."
강을동은 고개를 끄떡였다.
"뭐, 대강은… 사실 내가 질문한 의도는 그대가 황궁의 일에도 개입할 의사가 있는지 하는 거였소. 한데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어쩌면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황궁도 어찌 보면 작은 무림과 같은 곳이거든……."
"무림의 축소판이라고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음모와 귀계, 뭐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순수하게 무공 측면만 봐도 황궁은 소무림이 맞소이다. 황궁에 무공을 익힌 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오, 심지어 공주님도 무공을 익히고 있으니까……."
주성진은 과거부터 궁금한 게 있었다.
"황제 폐하도 무공을 익히십니까?"
"하하. 그건 내가 답하기 어려운 문제요, 다만 내 생각에 관심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황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을 것 같소. 무공을 익힐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그렇지만 그것도 본인 의지에 달렸지 않나 싶소이다."
그 순간 주성진의 머릿속에 갑자기 든 생각이 있었다.
'예부터 주지육림에 빠진 황제가 많았었지. 그리고 대체로 그들은 단명하고… 만일 황제가 어릴 적부터 내공을 익히고 무공을 익혔다면 다른 걸 몰라도 장수는 할 수 있었을 거야. 그렇다는 건 주변의 음모로 황제가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펼치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데…….'
애써 떠오른 생각을 지운 주성진이 강을동을 바라보았다.
"저도 순회사자님의 말에 동의합니다. 그건 그렇고 순회사자님은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음, 명을 받긴 했소, 그렇다고 시일이 촉박한 건 아니고. 일종의 휴가인 셈이지……."
그러면서 돌연, 강을동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하, 그래서 뭘 할까 고민했었는데 이젠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당분간 그대를 따라다니면 되니까……."
주성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인지? 그 말씀은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신다는 겁니까?"
"솔직히 황궁무림대회에 관심이 없었는데 그대 때문에 관심이 생겼소, 그대는 그저 참관하러 온 것 같지만. 내 생각에 그런 식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소, 그대를 알아보는 이들도 있을 것 같고, 특히 공주마마……."
"그건 저도 각오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참관하지 않는다면 뭘 한다는 말인가요?"
강을동은 반짝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그야,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그러시오? 당연히 무공 시합이지. 아마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동창 제독이 그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 같소이다."
"저는 동창 제독과 엮인 일이 없는데요. 일면식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대의 눈은 동창의 간부급 인물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소이다. 안 그렇소?"
주성진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야, 저 사람? 이건 관상을 좀 안다는 수준이 아니야. 필시 눈빛을 읽는 무공을 익힌 게 틀림없어. 그게 뭔지 알 수는 없지만…….'
주성진은 공력을 일으키며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허허. 그렇다고 기세를 드러내면 어떡하오? 좀 많이 불편하외다."
"하하, 이제는 제 마음을 훔쳐 가지 못할 겁니다. 제가 내공으로 차단했거든요."
"내가 독심술을 익혔다고 보는 것 같소이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네. 일종의 독심술 같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니 그걸 간파하는 무공이 필시 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은 넓으니까요."
사실 그렇다고 주성진이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허허. 이거 그만 들키고 말았소이다. 그렇소, 난 상대의 눈동자를 읽는 법을 배웠소이다. 다만 이게 오롯이 무공은 아니오. 일종의 주술도 포함되어 있소이다."
"주술이라고요?"
"왜 그리 놀라시오?"
각종 주술과 강시술 그리고 결계나 진법은 최근 주성진의 관심사였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초능력, 일종의 염력 같은 것도 있었다.
주성진의 무공 수위가 높아지다 보니 위와 같은 부분의 경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과거에는 초자연적인 것으로 치부해 버렸으나 지금은 무공의 일부로 간주해 적극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해서 강을동의 말은 주성진의 관심을 차지하기에 충분했다.
"헤헤, 그게 최근 저의 관심사라서 말이죠."
"하하, 역시 그대는 특이한 사람이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귀신의 존재를 믿으시오?"
주성진은 곧바로 고개를 끄떡였다.
'환생한 내가 귀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면 말이 되지 않지.'
"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무공이 좀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가면 따로 신내림이나 주술을 배우지 않아도 귀신의 존재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을동은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저자. 처음 보는 순간 대단한 자라고 생각은 했지만, 지금 보니 내 상상을 뛰어넘는구나. 도대체 저자의 정체가 뭐지? 혹 신분을 속인 반로환동의 고수?'
강을동은 반로환동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반인반선, 또는 반인반신으로 보았다.
'음, 신에 가까이 다가선 게 틀림없어. 처음부터 저 친구의 무공은 측량하기 힘들었다고.'
그는 애초에 주성진은 본 순간 자신이 익힌 특수한 기예로 주성진의 무공 수준을 간파하려 했었다.
하지만 무공이 높다는 것만 감지했지, 주성진의 참모습을 온전히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었다.
사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주성진 본인조차도 자신의 무공 실력을 잘 모르고 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소? 그대는 반로환동한 고수요?"
주성진은 자신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본능적으로 누가 듣고 있는지를 보려 한 거였다.
이러한 행동의 이면에는 늘 찔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반로환동한 건 아니지만 환생한 건 틀림없으니까.
"아이, 농담도 찰지게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