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드러나는 음모 (2)
그러자 낭인회의 강국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당주님, 저희 얼굴에 금칠하시는군요.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세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네 분의 도움이 어디 가는 건 아니죠, 하하."
접객당주의 말을 받아 주성진이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저도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주성진은 일목요연하게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을 이야기하며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흥미로운 표정도 있었고, 접객 당주처럼 진심으로 분노하는 이들도 섞여 있었다.
분노한 이들 중에는 왕천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천유는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우리를 죽이고 나서 그 죄를 모용세가에 뒤집어씌우려 했다는 거네. 맞소이까?"
"그렇소이다. 아마 그렇게 해서 휘주상단을 완전히 차지하려 했던 모양이오. 껍데기가 아닌 완전체로……."
"한번 더 확인하겠소. 그대가 자칭한 두 사람은 상단주인 곽천일과 표국의 총국주인 서욱 두 사람이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이번 일을 우리에게 유리하게 역이용해야겠소이다."
"어떻게 말이오?"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주성진은 자신이 생각한 바를 피력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곽천일과 서욱 그자들이 생각한 데로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소. 이 일은 왕 형과 역 형의 역할이 중요한데, 두 분께서 살수들이 모용세가의 무공을 썼다고 보고해 주셔야겠소이다. 그들이 실제로 모용세가의 무공을 쓰지 않았지만……."
주성진이 확인한 바로는 살수들이 모용세가의 무공을 쓰지 않았다.
아마도 역으로 기습당해 그런 경황이 없었던 같았다.
왕천유는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게 하겠소. 음, 그놈들을 물리치기 바빠서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자들의 무공이 좀 생소하게 보였소이다. 아마 북방 무공이라 그런 것 같소이다."
"그럴 것이오. 두 사람이 보고한 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모용세가에서 난리가 날 것이오. 한데 그들 입장이 참 난처할 것이오. 자칫 휘주상가를 차지한 일이 만천하에 공개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쓸 수는 없으니 뭐라도 할 것이오."
"……."
"필시 모용세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곽천일과 서욱을 의심할 것이오. 해서 그들을 다그쳐서 내막을 알려고 하겠지. 동시에 휘주상가에서 깨끗이 손을 뗄 것이고."
주성진은 말을 하면서 어찌할 줄 모르는 곽천일과 서욱을 떠올렸다.
그 순간 뭔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잠깐, 아니지. 내가 생각이 너무 앞선 것 같은데… 오늘 일이 곽천일과 서욱의 귀에 들어가면 분명 가만있진 않을 것이야. 필시 무슨 대책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싶은데…….'
몇 번을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았다.
주성진은 좌중을 돌아보았다.
"아, 내가 너무 일방적으로 모용세가의 입장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방금 생각한 바를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주성진의 생각에 고개를 끄떡인다.
'됐고. 이건 여기서 일단락하자. 그럼 계속 이야기해 볼까…….'
주성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왕천유를 바라보았다.
"결국 곽천일과 서욱은 줄행랑칠 수밖에 없을 것이오. 그러면 자연스럽게 휘주상가를 피 흘리지 않고 장악할 수 있소이다. 하나 매사에 시기와 절차라는 게 있으니 이 일이 당장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소이다."
"……."
"아마도 석 달 정도 후에, 그대들이 보고한다고 해도……."
사실 주성진은 곽천일과 서욱을 순순히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복수를 종결지어야 하니까.
왕천유가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맞소이다. 내가 당장 윗선에 오늘 일을 보고한다고 해도 빨라야 그 정도 시간이 걸릴 것 같소이다. 한데 그건 그렇고 정말 모용세가가 순순히 발을 빼겠소?"
"만일 그리 안 한다면 내게 방법이 있소이다. 모용세가가 휘주상가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무림 대다수가 알고 있으니, 나는 총무련에 이 문제를 재차 부각하도록 하겠소이다. 가뜩이나 요즘 무림 정세가 어지러운데 총무련은 나라와 척을 지는 건 원하지 않을 것이오."
"……."
"총무련에서는 모용세가에 빨리 손을 떼라고 종용하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것이오. 물론 나는 그전에 모용세가가 자발적으로 철수한다고 생각하지만……."
왕천유가 주성진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본다.
"하하. 주 상단주, 언제 총무련에도 검은 마수를 뻗쳤소이까?"
"허허, 검은 마수라니. 오다가다 총무련의 주요 인사와 인연을 쌓은 것뿐이오."
"그게 그거지. 내가 아버지를 통해 좀 인맥을 넓혀 주려 했는데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소이다."
주성진이 급히 손을 흔든다.
하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왕 형, 왜 그러시오. 한번 내뱉은 말은 철석같이 지켜야지. 남아 일언 중천금 아니겠소?"
"남아 일언 중천금이라는 말은 이제 옛말이오. 남아 일언 오줌보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하더이다. 그게 다 요즘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지, 허허."
"그게 혹 돼지 오줌보가 터진다는 말이오?"
왕천유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소, 약속은 언제나 깨지기 위해 있다는 말이외다. 우리 또한 그럴 것 아니오? 휘주상단의 상단주가 우리를 회유해 사건을 덮으려 한다면 들어주는 측 하다가……."
"이거 왕 형과 역 형을 신뢰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 미안하구려. 조금이라도 그런 마음이 덜 들게 곽천일과 서욱이 우리에게 나타나면 내가 대표로 나서겠소. 뭐 그리한다면 직접적으로는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지. 그대들이 아니고."
"뭐, 그렇다는 말이오. 어쨌거나 요즘은 신뢰를 쌓기 힘든 세상이지 않소. 세상이 점점 음모가 판치는 무림과 비슷하게 되어 가는 것 같소이다."
그 순간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접객당주가 입을 열었다.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로 휘주상단 전체가 시끌벅적할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요. 덩달아 접객 당주님도 바빠지시겠네요.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을 테니까."
"뭐 저도 거짓말쟁이가 되어야겠지요. 그건 그렇고 목격자 중에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자칫 제가 무공을 익힌 게 탄로 날지도 모르니까요."
주성진은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다.
"밤이라 잘 알아보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요? 그나저나 곽천일과 서욱 그놈들 아주 괘씸하군요. 저를 죽이려 했으니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니 앙갚음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다음날 점심 무렵.
휘주객잔의 별관에는 남녀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하하하……."
"호호호……."
다름 아닌 그들은 주성진과 그 일행들이었다.
그들은 푸짐하게 차려진 술상 앞에서 모두 즐거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때 낭인회의 강국영이 주성진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 고급 요리를 먹는군요. 앞으로 일이 없어도 종종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냥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편히 드십시오."
강국영이 일이라고 말한 건 오늘 자리가 순수하게 식사만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혹여나 곽천일과 서욱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즐거운 식사 자리가 퇴색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주성진은 고개를 돌려 양일동을 바라보았다.
"고맙습니다. 내공 금제법을 알려주셔서."
"아, 아닙니다. 제가 마침 알고 있는 거였으니까요. 그나저나 그 여자 살수 정말 미인이더군요. 살아생전에 그런 미인은 처음 보았습니다."
주성진이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왕천유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염옥매가 그 이야기를 듣고 서는 쌍심지를 켰다.
"흥, 살아생전에 처음 본다고?"
양일동이 급히 손을 흔든다.
'이크, 할 말, 못 할 말을 가렸어야 했는데… 내가 술이 좀 들어갔나 보다.'
"염 누님, 그게 아니고요. 제가 본 여자 살수 중에 최고의 미인이라는 뜻입니다."
"동생이 여자 살수를 본 적이 있기나 해?"
"그럼요. 딱 한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좀 전에……."
염옥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달려오자 양일동이 혀를 살짝 내밀고는 도망간다.
"뭐라고! 거기 안 서!"
주성진은 빙긋 웃었다.
'양일동 저 친구도 의외로 재미있는 친구군…….'
바로 그 순간 주성진의 맞은편에 있던 양은지가 입을 열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발그스름했다.
"주 상단주님, 제가 미욱한 솜씨지만 암기술을 펼쳐 보이겠습니다. 술만 마시면 재미없으니까요. 어때요? 한번 보시겠어요?"
주성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암기술을 펼치겠다고 하니 그런 거였다.
이때, 그녀의 동료 강국영이 소리쳤다.
"주 상단주님, 양은지의 말을 곧아 곧이곧대로 듣지 마십시오. 뭔가 꿍꿍이가 있어서 저러는 겁니다."
양은지가 표독스러운 모습으로 강국영을 째려보았다.
"야. 너 그렇게 나올래?"
"얼씨구, 반말이네. 내가 오빠야."
"그깟 몇 달 먼저 태어난 걸 가지고……."
두 사람의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주성진이 입을 열었다.
"양 소저, 암기술을 펼쳐 보세요."
"네. 제가 열심히 익히고 있는 건데, 보시고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 정도 깜냥이 되지 못하는데… 어쨌든 보고 말씀드리지요."
잠시 후, 별채 마당으로 나온 일행들의 시선이 양은지에게 쏠렸다.
양은지는 크게 심호흡하더니 발을 땅에 찍고 위로 올라갔다.
쉭!
빠르게 위로 솟구친 그녀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팽이처럼 회전하는 그녀의 손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은 순식간에 36개로 나뉘고 있었다.
'뭐야, 저건 비도 아닌가? 품속에 저 많은 비도를 숨기고 있었다니…….'
쇄애액!
공중에서 수많은 비도가 쏟아져 내린다.
타다닥!
땅바닥에 무서운 속도로 비도가 틀어박혔다.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특수 제작된 얇은 비도가 땅바닥에 빽빽하게 채워진 모습은 보는 이들에게 섬뜩한 느낌까지 들게 했다.
만약 그녀가 펼쳤던 비도가 누군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설사 피한다고 해도 36개의 암기 모두를 피할 순 없을 것이고.
양은지는 천천히 옷자락을 정리하며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사망비라는 암기술입니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36개의 암기를 펼쳐 내는 것이죠. 호호."
주성진은 그녀의 솜씨를 인정했다.
회전력과 빠른 손놀림,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내공.
부연하자면 몸이 회전하는 그 짧은 틈 사이에 36개의 암기를 완벽하게 조종하고, 상대의 움직임까지 완벽히 읽어 내야 하는 고난도의 기술이었다.
양은지가 주성진을 보며 고운 입술을 움직였다.
"한번 해 보시겠어요?"
"뭘 말이요?"
"비도를 넘겨드릴 테니 암기술을 펼쳐달라는 겁니다."
주성진은 아까 강국영이 한 말이 생각났다.
'의도가 있다더니 나더러 암기술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나. 한데 왜 암기술일까? 본인의 것과 비교해 보고 싶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