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드러나는 음모 (1)
주성진은 겁에 질려 오돌오돌 떨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음, 도망치지 않네. 도망을 쳐야 고민할 것도 없이 단숨에 처리할 텐데 말이야. 그래, 그렇다면 자초지종이나 들어 보자.'
"이봐, 살수들은 일에 실패하면 독단을 깨물고 자결한다던데, 왜 그리 서 있는 거지?"
주성진의 이죽거림에 그녀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그녀는 만주어 대신 중원어로 답했다.
아마 그게 더 나을 것 같았던 모양이었다.
"중원어를 잘 하는 군?"
그녀가 황급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네. 어릴 적부터 배웠습니다."
"이름과 소속을 대봐."
"이름은 혈요. 요동살수문 소속입니다."
주성진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이름이 뭐 저따위야. 죽은 놈도 그렇고…….'
"누가 우릴 죽이라고 사주했지?"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죽긴 싫었다.
"휘주상단의 서욱입니다. 저희는 표사로 위장해 잠입해 있었습니다."
주성진은 그녀로부터 서욱의 이름을 듣자 갑자기 꾹 눌러 놓았던 원한이 하늘 높이 치솟는 걸 느꼈다.
'또 그놈이군. 그나저나 이거 상황이 복잡한데…….'
"언제부터 잠입해 있었던 거지?"
"그게 대략 3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고 했는데 오늘 갑자기 연락이 왔습니다. 기원에 있는 육선문의 포쾌들을 습격하라고요. 한데 특이한 건 기습하면서 모용세가의 무공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 죽이지 말고 일부는 살려 두라는 말도 했습니다……."
주성진은 그녀의 말에서 오늘 일이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살수 놈들이 3개월 전 잠입한 건 우리 때문은 아니라는 것인데, 도대체 왜? 가만 모용세가의 무공을 쓰라고 했다고 했지. 그렇다면 모용세가의 무공을 익혔다는 말인데… 도대체 어떻게?'
"모용세가의 무공을 익힌 것이냐?"
"네, 과거 저희 살수문에 모용세가의 중견 고수가 합류한 적이 있었지요. 그래서 그를 통해서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게 대대로 전해진 것이고요."
"허허, 그자는 죄를 지은 배신자 분명하겠군, 내 말이 틀렸나?"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럴 수도… 죄송하지만, 과거의 일이라 자세한 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거의 60년 전 일이라서……."
"음, 알겠고. 그럼 몇 명이 출동한 거지? 아까 들으니 1조라고 하던데."
주성진은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내심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칫 그들이 죽거나 다치기라도 한다면 그 원인의 일부는 본인 탓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항복한 살수를 추격하느라 자리를 이탈했기 때문이었다.
"1조는 스무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습을 한다지만 전통적인 암살 방법은 아니고 정공법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리 어딘가 숨어 있다가 공격한다든지 아니면 독을 몰래 탄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정면으로 붙겠다는 말이군. 그럼 무공 수준은 어떻게 되지?"
"조원은 특급 살수이고 조장과 부조장은 초특급 살수입니다."
보통 특급 살수는 일류 무사의 무공 수준을, 그리고 초특급 살수는 그 이상을 의미했다.
하지만 정면 승부가 아닌 기습을 일삼는 무리가 바로 살수이기에 단순히 무공 수준을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조장과 부조장의 무공은 어떤 수준이지? 당신과 비교해서 말이야."
"저보다 조금 낮은 수준이지만, 그들은 전문 살수들이라 비교하기가 뭐……."
"그러면 당신은 전문 살수가 아닌가?"
그녀는 숙였던 얼굴을 들어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세는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저, 그게 저희는 사부님의 제자입니다. 사부님은 요동살수문의 문주시고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현장에 투입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물론 그렇다고 살수 기예를 익히지 않는 건 아니고요."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장에 투입되지 않는 이들이 왜 살수단에 포함되어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그러면 왜 여기에 나타난 것이지? 문주 밑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저희는 따로 명을 받은 게 있습니다. 중원에서 거점을 마련하라는……."
"죽은 혈랑이라는 자가 참관인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녀가 얼른 고개를 끄떡였다.
"아, 네.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현장을 참관하라고 사부께서 명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직접 감독하는 것은 아니고요. 그냥 경험 삼아 구경하라는 거였습니다."
"그 참, 문주의 제자들이라면 누구보다 먼저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 부하들이 따를 터인데……."
주성진의 비아냥에 잠시 말문이 막힌 그녀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게 저희는 후일 요동살수문을 이끌어 나가야 하기에 다치거나 죽으면 곤란합니다. 과거에 그런 일이 있어 사부님이 아끼는 제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저희는 그 후에 사부님이 거둔 것이고요."
"음, 잘 이해는 되지 않지만 넘어가고, 제자가 당신과 죽은 그자 두 명인가?"
"아닙니다. 사부님의 친아들이 있습니다. 다만 나이가 저희보다 어립니다. 사부께서 늦은 나이에 낳아서요."
주성진은 그녀 사부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그대 사부의 나이가 어떻게 되지? 내 생각에 나이가 많을 것 같은데."
"네, 그렇습니다. 사부의 나이는 올해 일흔입니다."
주성진은 고개를 끄떡이다가 갑자기 그녀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공격한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봐. 그런데도 날 공격했단 말이네……."
"죄송합니다. 그저 우쭐한 마음에 사로잡혀서……."
"그런데 말이야. 아까도 언급했지만, 너무 쉽게 항복하는군. 분명 잡히면 어떻게 하라는 교육을 받았을 텐데 말이야."
그녀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답한다.
"막상 오늘 같은 처지가 되니 살고 싶어졌습니다."
주성진은 이 문제를 더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음… 그건 그렇고 당신의 사부는 지금 어디에 있지?"
"요동에 계십니다."
"거점을 알아보라고 한 것을 보면, 요동에 계속 있지는 않을 것 같고… 그럼 언제 중원으로 올 계획이지?"
"그게……."
주성진은 그녀가 망설이자 다그쳤다.
"빨리 말해! 살고 싶으면."
"시기는 잘 모르지만, 조만간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 인원을 모조리 데리고."
주성진은 내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갈수록 태산이군. 음… 그러면 마무리할까. 대강 이야기를 들었으니. 그나저나 저 여인을 어떻게 하지, 살려달라는데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풀어 주었다가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데…….'
주성진은 그녀의 생각을 물어보기로 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그녀는 미리 생각한 바를 주성진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살려달라고 했을 때부터 미리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저를 풀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다하겠습니다."
주성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고? 두고두고 신경 쓰일 텐데 말이야."
"저의 내공을 금제해도 좋고 만성 독약을 먹여도 좋습니다."
"그러면 단전을 폐하지 뭐,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 되겠네."
그녀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주성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말고 제가 말한 방법이 어떨까요? 단전을 폐하면 선천진기까지 손상을 입어 수명이 단축된다고 들었습니다."
주성진은 처음 듣는 소리였다.
'정말일까? 가만 그럴 수도 있겠는데…….'
"미안하지만, 내공을 금제하는 방법을 몰라, 그리고 내겐 만성 독약도 없고……."
그녀는 무위가 뛰어난 주성진이 내공을 금제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다.
'점혈하는 것과 비슷한데 그것을 모른다고?'
"저, 점혈법은 알고 계시지요?"
"그야 당연하지."
"내공을 금제하는 것도 점혈법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는 있지만 믿지 못할 테니, 다른 곳에서 알아보십시오. 대단히 어려운 기술은 아닙니다. 다만 강한 내공이 필요하긴 합니다."
주성진은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좋아. 내가 당분간 당신을 점혈해 놓겠어."
"살려 주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을 곧게 쓰라고, 당신 목숨이 중요하면 남의 목숨도 중요한 거야. 알겠어!"
"네……."
얼마 후 주성진은 그녀를 가까운 객잔에 놓아두고 빠르게 돌아갔다. 당연히 점혈을 해 두었다.
'다 왔군, 한데 깨끗하네…….'
주성진은 난장판이 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주변이 정돈되어 있어 놀랐다.
또한, 기원은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성업 중이었다.
'허허. 기원에서 새로 손님을 받은 모양이군. 간간이 이런 곳에서는 취객들이 난동을 부리거나, 칼부림이 나니까 만성이 되어 별로 개의치 않았는지도 모르지…….'
주성진이 나타나자 일행들이 반색했다.
그의 예상대로 기원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4인도 일행에 합류해 있었다.
주성진은 일행을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기다리게 해서… 그건 그렇고 살수들이 왔을 텐데……."
왕천유가 대표로 나섰다.
"모조리 황천으로 보냈소. 실은 접객 당주님이 미리 귀띔을 해주어서 일이 수월했소이다. 거기에 그대와 같이 일하는 분들이 가세해 주었고……."
그 순간 접객 당주가 끼어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저도 소변이 마려워 나왔는데 그때 주 상단주님이 누군가를 쫓는 것을 봤습니다. 그래서 다른 분들에게 알렸고, 그 후로는 쭉 경계 상태에 있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는 저를 습격한 자를 쫓다가 혹시 상대가 혼자가 아니면 어떡할까 잠시 걱정을 했습니다만, 접객 당주님과 저희 일행들의 무공을 믿었습니다."
접객 당주가 씩 웃는다.
"하하, 그런가요? 한데 습격자가 여자였습니까? 제가 언뜻 보니 뒷모습이 여자 같이 보였습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맞습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것, 육선문의 두 사람도 알아야 할 것 같으니 모든 걸 공개하도록 하지요. 그전에 여기서 벌어진 일을 좀 듣고 싶습니다."
"네, 말씀드리지요"
접객 당주가 주성진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있는 쪽으로 살수들이 접근해 왔고 그들이 기방으로 난입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 아, 그전에 기원의 악사에게 부탁해서 계속 악기를 연주하라고 해 두었지요."
"하하. 용의주도하게 일을 진행하셨군요."
"뭐,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주성진은 그 말을 듣고 계책을 생각한 이가 접객 당주임을 눈치챘다.
접객 당주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인원수는 저희가 열세지만 기습이 제대로 먹혔습니다. 놈들이 상당히 당황하더군요. 그 틈을 노려 놈들의 숫자를 쉽게 줄일 수 있었지요. 그러곤 난전이 벌어졌습니다. 잠시 후에 여기 계신 네 분이 저희를 도우려 나타나셨고, 다들 무공이 대단하셔서 쉽게 놈들을 잠재울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