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습격
이야기를 마무리하려던 곽천일은 불현듯 서욱이 두려워졌다.
'설마, 형님이 딴마음 품는 건 아니겠지. 요동살수문의 자객들을 모용세가 몰래 휘주에 잠입시킨 솜씨라면… 물론 그들 모두를 표사로 위장했다고 하지만.'
자신의 주변에도 서욱에 충성하는 자가 없다는 보장이 없었다.
'음, 나도 방비를 해야겠군, 만약 모용세가가 철수하면 모든 무력을 그가 손에 쥐게 될 테니까. 그러면 난 또 허수아비 상단주 노릇이나 할 지도 몰라.'
곽천일은 1년 전 우연히 음식점에서 만났던 인물이 떠올랐다.
'만박통지 감철군! 그래, 그자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했겠다.'
곽천일은 감철군이 건네준 연락처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 그와 접촉해보자.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 ? ? * ? ? *
한편 다시 일행들에게 돌아간 주성진은 주변에서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고 마셨다.
여차하면 내공으로 주독을 날릴 생각이었기에 뒷일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잠시 후, 소피를 보러 기원 마당에 나온 주성진은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이거 너무 많이 마셨군, 취했나 봐.'
그때였다.
쉬익!
들릴 듯 말 듯한 파공성이 주성진의 귓전을 스쳐 지나간다. 하마터면 악기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에 묻혀 못 들을 뻔했다.
주성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몇 번의 경험으로 이런 유의 파공성은 몹시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암기다. 암기가 틀림없어!'
주성진은 본능적으로 한 손을 휘저었다.
파박!
마치 눈앞을 날아가는 벌레를 낚아채는 것 같은 손짓이었다.
'음, 쇳조각은 아닌 것 같은데…….'
손바닥을 펴 본 주성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이 잡아챈 것이 고작 나뭇잎 한 개였다.
그의 눈이 마당 한쪽에서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는 은행나무에 머물렀다.
은행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거대했다.
'그렇단 말이지…….'
5장이 넘는 마당을 가로질러 작고 가벼운 은행나무를 암기처럼 쏘아낼 수 있다는 건 보통의 내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주성진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날 죽이려고 날린 것이야. 만약 무방비 상태였다면 내 심장을 파고 들었겠지, 물론 호신강기가 막아냈겠지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어떤 놈이… 왜?'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 하진 않았을 거였다.
쐐애액!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다시 무엇인가가 쏘아져 왔다.
주성진은 또다시 손을 휘저었다. 그의 손바닥에는 2개의 은행나무 잎이 쥐어져 있었다.
'이씨, 가만히 안 둔다.'
주성진이 은행나무를 노려본 순간 나무의 가지 하나가 가볍게 흔들렸고 어둠 속으로 한 인영이 도망치고 있었다.
언뜻 본 뒷모습은 흑색 무복을 입은 작고 아담한 인물이었다.
땅을 박찬 주성진이 단숨에 은행나무의 가지 위에 올라섰다.
'가만, 만약 습격한 자가 혼자 온 게 아니라면…….'
주성진은 촌각을 다투는 순간이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 만일 내가 여기를 벗어난 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주성진은 곧바로 네 사람을 떠올렸다.
'그들이 따라온 걸 눈감아주고 있었는데 오히려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그들은 바로 양일동과 염옥매와 강국영과 양은지였다.
그들은 기원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바로 근처 음식점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병장기 소리나 비명이 들린다면 곧바로 뛰쳐나올 것이었다.
'그래, 우리 측에 고수들이 즐비하니 문제없을 거야. 게다가 역산도와 왕천유 그리고 무공이 뛰어난 접객당주도 있으니…….'
생각을 끝낸 주성진은 맹렬하게 흑의인을 쫓아갔다.
쉬이익!
귓전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그리고 곧장 주변의 경물이 빠르게 밀려 지나간다.
흑의인은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고 있었다. 주성진은 조금씩 흑의인과 거리가 단축되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음, 뒷모습이 남자는 아닌 것 같아. 여자가 분명해.'
쫓고 쫓기는 그들은 순식간에 대로변을 벗어나 인적이 드문 논밭으로 향했다.
그 순간 흑의인이 속도를 높인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진다.
'어라!'
흑의인은 무성하게 자란 벼 위를 스치듯 날아가고 있었는데, 가느다란 벼 위를 치달리면서도
조금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고, 빨랐다.
그 놀라운 경공 솜씨에 절로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나도 분발해야겠는데…….'
얼마나 그렇게 달렸을까, 논밭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에 이르렀을 때 흑의인이 돌연 신형을 멈추었다.
단숨에 거리를 3장으로 좁힌 주성진은 경공을 멈추고 흑의인을 주시했다.
그 순간 흑의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역시, 여자군…….'
활동하기 편하도록 몸에 착 달라붙는 옷을 입어서 그런지 들어가고 나온 몸매의 곡선이 여실히 드러났다.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검의 손잡이 끝이 그녀의 어깨너머로 삐죽이 솟아 나왔고, 거기에 매달린 푸른 수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흑의인은 주성진을 쏘는 듯한 눈길로 뚫어지게 바라보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두건을 천천히 벗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녀의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본 주성진은 미모에 혹하기보다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정체를 드러낸 거지? 설마 날 유혹하려고?'
곧바로 주성진은 자신의 어이없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그녀의 얼굴은 교태가 뚝뚝 묻어나는 모습이 아니라 차가웠다.
순간 주성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뒤로 그림자 하나가 더 생긴 탓이다.
'멈춘 이유가 있었군… 일행이 있었어.'
순간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데 중원어가 아니다.
"꼬리를 달고 오다니, 네 녀석! 또 쓸데없이 단독 행동을 한 모양이구나. 누가 너더러 살행에 참여하라고 했어!"
"죄송해요. 전 단지 1조의 짐을 들어주고 싶었어요. 호기심에 1조보다 먼저 가서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저놈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기방에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한 방 먹여주려고 했는데, 그게……."
"쯧쯧, 사부님이 막내 너를 너무 버릇없이 키웠어. 돌아가면 반드시 이 일에 응당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너와 나는 그저 참관인으로 여기에 온 것뿐이야."
"흥!"
그녀의 콧방귀 끼는 소리가 주성진의 귀에까지 들렸다.
사실 주성진은 그들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그는 전생에 만주어를 익혔었다.
"그러는 사형은 참관인이 되어서 왜 1조를 따라가지 않고 여기에 있는 거예요. 아무리 1조 조장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지만, 사형도 사부님의 명을 어긴 거나 진배없다고요."
"이 녀석이! 막 출발하려고 하는 참이었다."
"언성 높이지 마세요. 어쨌든 제가 저놈을 여기로 유인해왔잖아요. 합심해서 저놈을 죽이자고요."
"시끄럽다. 저놈 따위는 내 혼자로도 충분해!"
그녀가 고개를 흔든다.
"저놈은 저의 적엽비화를 아무렇지 않게 막았다고요. 그러니 사형 혼자로는 벅찰 것이에요."
"너는 나의 참모습을 보지 못해 모른다. 똑똑히 보고 배워라."
주성진은 그들이 구사한 만주어를 알아듣고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제발 일행들이 무사해야 할 텐데, 물론 그들의 실력을 믿지만…….'
그렇다고 서둘러 기원으로 돌아가기도 늦은 감이 들었다. 정황상 일이 벌써 벌어졌을 테니까.
'에이, 할 수 없다. 저것들이나 처리하자.'
주성진은 그들을 노려보며 가볍게 검을 뽑아 들었다. 달빛이 그의 맑은 검신에 부딪쳐 쨍, 하
고 튕겨 나가는 것 같았다.
"자자, 헛소리들 지껄이지 말고 시작하지."
주성진이 만주어로 말하자 사형이라는 자가 흠칫한다.
"우리 말을 알아들은 것이냐?"
"하하, 그렇다니까. 어디 알량한 너의 실력을 볼까."
"네놈은 누구냐?"
주성진은 기가 찬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는 네놈은 누구냐?"
"나는 혈랑이다."
"혈랑 좋아하시네. 그러면 난 푸른 늑대 청랑이다."
화가 잔뜩 난 그가 주성진을 죽일 듯 노려본다.
주성진은 잘 몰랐지만, 그는 자신의 별호에 상당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혈랑은 천천히 검을 뽑아 두 손으로 굳세게 움켜쥐고 가슴 앞에 세웠다.
바야흐로 일촉즉발의 대치가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 잔뜩 노려보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싸아악!
밤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조금 전에도, 또 그전에도 바람은 끊이지 않고 불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비로소 느끼고 있었다.
그대로 나무가 되어 뿌리를 내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싸아악!
한데 단순히 대치중은 아닌 모양이었다.
혈랑의 이마에 조금씩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저놈은 나보다 강할지 모른다. 점점 기세가 강해지고 있어!'
혈랑은 점점 더 무겁게 덮여오는 중압감을 잊기 위해 애썼다.
그 순간 주성진이 천천히, 아주 조금씩 움직이자 혈랑의 긴장감은 극에 달하고 말았다.
이때, 주성진은 단 한 번의 부딪침으로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지만.
보통 서로를 탐색하며 온몸의 기운을 칼끝에 모아 두었다가 일시에 들이치는 싸움은 영 싱겁게 끝나기 마련이다.
어떤 면에서 그 치열함이 수많은 초식과 수법을 구사하여 쉴 틈 없이 부딪치는 난전보다 강렬할 수 있었다.
만일 관전자가 있다면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매 순간이 피를 말리고 뼈를 쪼개는 듯한 초조함과 고통의 연속일 것이다.
단번에 삶과 죽음으로 나뉘기 때문이었다.
두 번의 기회는 없고 오직 한 번의 부딪침으로 모든 게 끝이었다.
바로 그 순간.
파바박!
전혀 움직이지 않던 혈랑이 그자리에서 갑자기 꺼지더니 돌연 주성진의 눈앞으로 들이닥쳤다.
'빠르군…….'
주성진은 곧장 자신의 검에 내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휘리릭!
누가 먼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혈랑의 검과 주성진의 거의 동시에 뻗고 내리쳐졌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섬광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카카카캉!
쌓아놓은 폭죽이 한꺼번에 터진다면 그런 소리가 날 것이다. 쇠와 쇠가 부딪친 것이라고
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높고 강렬한 충격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혈랑은 숨이 막혔다.
'으억!'
그는 자신의 초식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단순한 일격필살의 수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아무런 변식도 없고, 눈을 어지럽히는 허초도 배제한 채 모든 내력을 검에 불어넣은 패도적인 수법이었다.
어쩌면 기습을 일삼는 살수들에 어울리지 않은 수법이기도 했다.
짜짜작!
관전하는 여인의 눈에 휘둥그레졌다.
그의 사형의 검이 산산이 부서져 날리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럴 수가! 사형의 검은 명검인데.'
상대의 검의 명검이면 주성진의 검도 명검이었다. 결국, 주성진의 내려치는 힘에 견디지 못하고 상대의 검이 박살나고 말았다.
그리고 한 줄기 파란빛이 곧장 혈랑의 어깨 속으로 파고들었다.
"크아악!"
쿵!
땅이 죽은 혈랑의 피로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