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휘주상단 (3)
시간이 흘러 무사히 창고로 돌아온 주성진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행들과 합류했다.
왕천유가 주성진을 데리고 창고 구석으로 데려갔다. 그의 얼굴에 잔뜩 기대감이 묻어 있었다.
"간 일은 잘되었소?"
"그렇소. 생각보다 큰 어려움은 없었소이다. 숙소에는 다들 일하러 나갔는지 사람들이 없었소이다. 그 덕에 수월하게 영단을 찾을 수 있었소이다."
"잘되었소. 이거 그대 덕에 공력이 늘어나게 되었소이다. 하하."
왕천유가 기뻐하자 주성진이 손을 흔들었다.
"너무 티 내지 마시오. 당신 부하들이 보고 있소이다. 이 일은 당신과 역산도만 아는 일 아니오?"
"아, 그렇구나. 너무 기쁜 나머지……."
"그건 그렇고, 창고 천장을 봐주시오. 원상복구 한다고 하긴 했는데 어떻소이까?"
왕천유가 주성진이 내려온 천장을 자세히 바라본다.
"감쪽같소이다. 주 상단주가 도둑질에도 재능이 있는 것 같소이다. 마음먹으면 천장을 뚫고 아무 곳이나 출입할 수 있으니 말이오."
주성진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게, 내가 형산파에서 지붕 수리를 해본 게 많은 도움이 되었소이다. 그때 건물의 뼈대와 구조를 좀 터득했지……."
"하여튼 뭐가 되었던 언젠가는 아는 게 도움이 된다는 게 진리인 것 같소이다."
"그렇소이다. 그래, 일은 잘되어가오?"
왕천유는 고개를 끄떡였다.
"뭐 목록에 기재되어 있는 거랑 똑같소이다. 꼬투리를 잡을게 없소이다."
"하긴, 미리 통보했는데 저들이 감추려면 벌써 숨겼겠지…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오."
"그게 뭐요?"
주성진은 싱긋 웃었다.
"비밀 장부를 찾으면 되오."
"에이, 그걸 어떻게 찾소이까?"
"상인들을 붙잡아 겁박하면 되지. 하하."
왕천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제 되면 뒷일을 어찌 감당하겠소? 괜히 죄 없는 상인들을 문초했다고 상부의 질책이 따른 것인데……."
"하하. 그냥 그렇다는 거요. 그건 그렇고 빨리 일을 마무리합시다."
"안 그래도 그럴 작정이요.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그대 덕분에."
* ? ? * ? ? *
저녁이 되었다. 휘주상단이 마련한 연회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기원에서.
하하하, 호호호.
주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주성진은 슬그머니 접객 당주인 악일군의 옆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말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죠?"
악일군은 주성진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아, 네… 뵙기는 했는데 말을 나누지는 못했군요."
그 순간 주성진은 전음입밀을 펼쳤다.
―접객 당주님, 잠시 마당에 나가자 이야기 좀 하시죠. 긴히 드릴 말이 있으니까. 아 그렇게 긴장할 건 없습니다. 도움이 되면 되었지 절대로 나쁜 일은 아니랍니다.
악일군은 별안간 술이 확 깨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접대하는 처지라 술을 좀 마셨던 거였다.
악일군은 순간 망설이고 있었다. 전음을 펼칠지 말지를.
'이것 참, 전음을 펼치면 무공을 익혔다는 게 바로 표가 날 것인데 어떡하나… 뭐 형님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무공을 익혔다는 게 이미 탄로 났다고 하긴 하지만서도…….
그 순간 주성진의 전음이 이어졌다.
―무공을 익힌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저에게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절정 이상의 무위를 지닌 것 같습니다만…….
악일군은 주성진이 자신의 무위를 꿰뚫어 보자 경악에 휩싸였다. 돌연 주성진의 신분이 의심스러워졌다.
'저자의 정체가 도대체 뭐지? 육선문의 숨은 고수인가? 아니면 제 3자인가…? 만일 육선문 소속이 아니라면, 어찌 이번 감사에 합류했을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주성진은 그가 몹시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당주님, 걱정, 불안, 부정적 생각들은 늘 꼬리에 꼬리를 물지요. 그것들은 늘 우리를 생각만 하게 만들고 행동하지 못하게 만들죠. 주저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십시오. 긍정적으로 말이죠. 저는 좀 전에 말했다시피 도움이 되려고 하는 거지, 절대 해코지하려고 하는 게 아니랍니다.
주성진의 이야기를 들은 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
'그래, 그의 말이 맞아, 일단 부딪쳐 보자!'
―알겠습니다. 마당에 나가시죠.
마침내 그가 전음으로 답을 했다.
주성진은 빙그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왕천유와 역산도는 사전에 이야기를 들었기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마당에 나온 그들은 잠시 아름다운 정원을 걸었다.
주성진은 낮에 엿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여러 가지 작전을 구상했다.
무엇보다도 기뻤던 건 휘주상단을 접수하는 일이 빨리 찾아올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내부에 현재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었고, 자신이 노력한다면 정말로 나라에서 상단과 무림의 결탁을 경고하게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제를 움직이는 건 공주에게 부탁하면 될 것 같단 말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나라에서 그 일을 좋게 생각할 리 만무하니까.'
"대보름이군요. 오늘이."
주성진의 말에 악일군이 고개를 끄떡인다. 밤인데도 주변이 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습니다."
"실은 제가 역용을 하고 있습니다. 저의 본 얼굴을 보여드리지요."
주성진은 역용을 풀었다. 그러자 역용한 얼굴보다 표정이 밝고 젊은 얼굴이 나타났다.
'아, 잘생겼다. 아니, 저자는 용모파기의 그자……!'
악일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입을 뗐다.
"검호 상인, 주성진 상단주님이시군요. 이거 믿기지 않습니다. 주 상단주님을 뵙다니!"
"하하, 쑥스럽군요. 한데 용케 절 알아보시는군요."
"그게 얼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오문에 제가 끈이 좀 있어서……."
주성진은 그가 자신을 알아보았기에 이야기 꺼내기가 더욱 쉬울 것 같았다.
"제가 알기로는 휘주상단의 많은 상인이 상단의 집행부에 불만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모용세가의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성진은 낮에 엿들은 이야기로 그럴 듯하게 말을 꾸몄다. 이를 꿈에도 모르는 악일군은 목덜미를 부여잡고 쓰러질 판이었다.
'미치겠군. 저자가 휘주상단의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는 듯한데, 도대체 누가 발설한 거야. 자칫 모용세가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줄초상을 치를 수 있다고! 물론 나야 무공이 익혔으니 상대적으로 좀 나은 편이지만…….'
그는 주성진이 내막을 아는 것보다 부흥맹의 정체가 탄로 나는 게 더욱 두려웠다.
연판장을 돌려 비밀리에 가입한 부흥맹의 맹원들은 지금의 현 질서를 타파하기로 피로 맹세한 자들이었다.
그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야금야금 입지를 다져 세력을 계속 키울 작정이었다.
주성진은 악일군의 착잡한 표정을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유추해내었다.
'일단 안심을 시켜나야겠군.'
"접객 당주님, 모용세가의 일은 제가 휘주상단의 누군가로부터 들은 게 아니에요. 사실 말입니다. 휘주상단에 모용세가가 관여하고 있다는 건 무림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다 안다는 소리이지요."
"그러면 저희 상인들이 불만이 많다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야, 우연히 듣게 되었지요. 객잔 음식점에서 휘주상단의 상인들을 보았는데 그들이 현재의 집행부에 대해 불평불만을 쏟아내더라고요. 제 두 귀가 활짝 열려 있는데 어찌 안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악일군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웬만한 소리는 다 들을 수 있는데 하물며 저자는 나보다 고수 아닌가…….'
혼자 생각하다 불현듯 그는 주성진의 무공을 시험하고 싶어졌다.
'그래, 내 눈으로 저자가 고수인지 확인해봐야겠어. 혹 가짜일 수도 있으니까. 용모파기와 닮았다고 완전히 믿으면 안 되지…….'
"저, 주 상단주님. 제게 신세계를 보여주시지요. 제가 최근에 초고수를 접한 적이 없어서 말입니다. 사부가 계셨지만, 그분은 이 세상 분이 아니라서 말이죠."
"비무를 하자는 말입니까? 아니면 단순히 무공을 보여 달라는 말입니까?"
잠깐 생각한 악일군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친선 비무를 해보면 어떨까요?"
"지금 말입니까?"
"네, 잡다한 형식이나 불필요한 초식은 배제하고 짧게 굵게 겨루어 보시지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성진은 웃음을 참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자칫 웃음을 보인다면 상대가 그걸 비웃는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사실은 뭐 그런 면도 없진 않았지만.
'좀 전까지 무공을 모른다고 발뺌하더니 돌변해서 이젠 나와 비무를 하자고 하네. 그러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요. 음, 어디 넓은 공터가 있으면 좋을 텐데……."
"공터가 없으면 만들면 되지요. 지붕 위에서 대련은 어떻습니까? 나름 운치가 있을 것 같은데요."
주성진은 그에게서 지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오늘은 지붕과 인연이 많은 날이구나.'
"알겠습니다. 대신 비무 규칙을 한 가지 추가하지요. 지붕의 기와를 훼손하면 지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야 당연한 말씀입니다."
악일군은 상인이 아닌 무인으로서의 본능이 눈을 뜨자 돌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좋아, 기왕에 무예를 겨루는 것! 내가 가진 걸 모두 쏟아 붓자고!'
가뿐하게 지붕 위에 오른 두 사람은 가볍게 인사한 후 곧바로 비무에 돌입했다.
악일군이 무기가 없는 관계로 두 사람은 나뭇가지를 꺾어 검을 대신했다.
그래도 모양은 최대한 검처럼 만들었다.
주성진은 악일군이 왜 지붕 위에서 비무를 하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날렵한 경공술은 과히 일절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자신의 장점을 살린다는 건 나쁜 건 아니지…….'
순간 악일군의 목검이 천변만화의 조화를 부리며 주성진에게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가 오로지 검만 익혔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한 거지만 그의 목검은 검 끝에서부터 날카로운 예기와 변화가 가득 차 있었다.
주성진은 그런 그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떡였다.
'좋군, 그래도 나의 검기도 만만치 않을 거야.'
꽈꽈꽝!
하늘에 뿌리는 검화일까. 두 자루의 목검과 목검이 어울리며 밤하늘에 아름다운 검기를 뿌려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일회전이 끈났다. 언뜻 보면 백중세인 것 같다.
"자, 다시 갑니다!"
전열을 정비한 악일군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순간 그의 목검에서 회색빛 검광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장 주성진을 향해 뻗어가기 시작했다.
소리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마치 번개가 연속적으로 내려치는 듯했다.
'음, 화려하면서도 강한 검초군. 역시 절정의 고수다워!'
주성진은 묵묵히 방어에 집중했다.
섬광처럼 쏟아지는 그의 검초에도 허둥대는 일 없이 조용히 그의 검법을 음미하면서.
상대가 창이라면 주성진의 검은 방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