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혈교도와 조우하다 (1)
그러면서 육숭은 강상에서 벌어진 일을 임하응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상이오."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한데 화탄은 저도 만들 수 있는데……."
주성진과 육숭이 깜짝 놀라고 꾸벅꾸벅 졸던 임호풍도 눈을 번쩍 떴다.
육숭이 얼른 입을 열었다.
"뭐요? 그 말 진짜요?"
"네. 간혹 화탄을 사용할 때가 있답니다. 비법은 원나라 시절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고요. 그래도 오해는 마십시오. 전문 도굴꾼이 할지라도 모두가 화탄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정말 극소수만 알고 있다고요."
"……."
"그리고 말인데… 음, 제 생각에 폭시 정도는 재료만 있다면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간단한 거라서, 헤헤."
주성진은 엄지손가락을 쳐들었다.
"하하 참, 당신은 탁월한 재주꾼이오, 못하는 게 없으니."
"못하는 게 왜 없습니까, 많죠. 특히 밤일을 제대로 못 해 집사람한테 구박받기 일쑤인데요."
"음… 뭐……."
주성진은 결혼을 해보지 않아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사실 그보다는 주성진의 머릿속에는 화탄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
'화탄이 필요할 때가 있을 거야. 불법이라 하지만…….'
길을 따라 야산을 내려온 그들은 인근 마을로 향했다.
마을 어귀에 도착한 그들은 인적이 별로 없는 상황에 의아해했다.
강설민이 주성진을 바라본다.
"저, 상단주님. 느낌에 싸한데 다시 길을 가는 게 어떨까요? 다음 마을에서 휴식을 취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마을을 우회하자는 말이요?"
"네, 그렇습니다."
임하응과 강설민 부부는 주성진의 휘하에 들어오면서 주성진을 대인이 아닌 상단주로 불렀다. 이는 주성진이 원하는 바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있겠소?"
주성진은 그녀가 전직 살수임을 알기에 그녀에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건 과거 제가 검은구월단에 있을 적에 경험했던 일이 떠올라서 그래요. 저희기 살업을 행할 때 단독으로 움직일 때도 있지만 단체로 움직일 때도 많아요. 그럴 때 가끔 부업으로 마을 전체를 접수하는 일이 있어요. 휴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약탈을 감행하는 거죠."
"……."
"물론 신분은 도둑으로 위장을 하죠. 마을 주민들을 한곳에 몰아놓고 감금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죽이지는 않았어요. 음,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에 걸리는 일이지만, 그 당시는 선악에 대한 개념이 모호했기에 일을 저질러도 아무렇지 않았어요. 집단 광기 같은 거였어요."
주성진은 살수들이 마을을 습격해서 약탈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일은 산적이나 마적들이 으레 저지른 줄만 알았다.
"허 참, 고약한 일이요. 음… 그러면 누군가가 경계를 펼치고 있겠구려. 외부인이나 타지로 나간 마을 주민들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네, 물론입니다. 아……."
순간 그녀는 주성진이 말하는 의도를 깨달았다.
"우리의 흔적이 노출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누군가 감시하고 있다면……."
"그런 것 같소. 일단의 무리가 이리 오고 있소이다."
그녀가 귀를 쫑긋거렸다.
'규칙적인 움직임이구나, 말을 탄 자도 있고.'
"아. 정말이네요."
주성진은 말하는 도중에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다가오는 자들을 피해 도망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주성진의 생각은 별다른 게 없었다.
바빠서 일일이 악인을 쫓아다니지는 못하지만, 눈앞에 그런 자들이 나타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런 생각은 처음부터 정립된 건 아니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무공이 상승함에 따라서.
다각다각!
선두에 말을 몰고 오는 이를 호위하며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대략 봐도 삼십이 넘었다.
선두권에 유독 혼자 말을 타고 있는 여인을 보며 주성진이 중얼거렸다.
'뭐야. 여자구나. 일행 중 대장인가 본데…….'
그녀도 주성진을 보고 있었다.
'찾고 있는 자인데,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호호.'
자신의 품에서 종이를 꺼내 다신 한번 확인한 그녀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호호, 뜻하지 않게 대어를 낚게 생겼어. 난 그저 마을에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고 하기에 심심해서 나와 본 건데, 잘만 하면 아버지에게 칭찬을 듬뿍 받겠어.'
그녀가 주성진을 보며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이봐, 무한에서 고물상에 들렸지?"
주성진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런 그때 괜히 역용했나…….'
그건 그렇고 그녀의 말본새가 괘씸했다.
"우린 생면부지인데 왜 반말이지?"
주성진의 대꾸에 그녀의 아미가 파르르 떨렸다. 늘 귀한 대접만 받은 그녀였다.
"흥!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죽고 싶은 게지?"
"아니, 아주 오래 살고 싶거든. 벽에 똥칠할 때까지, 그런데 너희들은 누구지?"
"나? 호호. 기예지라고 한다. 그런다고 알 턱이 없겠지만."
주성진이 한발 앞으로 다가갔다.
"이봐, 네 이름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아, 너희들의 정체가 뭐냐니까?"
주성진의 되물음에 기예지의 안색이 확연히 붉어졌다.
'저자가 우리를 보고도 주눅 들지 않는데…….'
자연스럽게 그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뭐라고?"
주성진은 기예란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뒤에 서 있는 다섯 명의 중년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제법 강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짙은 흑의를 입은 중년인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혈천오위 중 일위이다."
"혈천오위?"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로 이때 임호풍의 전음이 들려왔다.
―가주님, 혈천이 혈교입니다. 과거 기록을 보면 혈천오위로 지칭되는 자들은 혈교 내에서 핵심 고수들입니다. 무공이 모두 절정 초입에 이르렀고 강한 상대를 만나면 합벽진을 불사하죠.
―제길, 그러면 까다롭겠는데…….
―네, 더구나 저들이 당당히 정체와 소속을 밝히는 것으로 봐서는 음지에서 양지로 완전히 나온 모양입니다. 거리낌 없이 활개를 치겠다는 것이겠지요. 이거 좋지 않은데요.
―음, 전에 혈교 출신인 자를 처리한 적이 있었소. 그때 그자는 적포문으로 신분을 위장했었소이다. 한데 그대 말마따나 이젠 아예 대놓고 설치기로 한 것 같소.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주성진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팔짱을 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조심해야겠는데…….'
혈천 일위가 천천히 씹어 뱉듯 말을 이어 갔다.
"우리는 혈교도들이다. 혼탁한 무림을 깨끗이 정화하려고 한다."
"하하. 꿈이 거창하구려. 내 생각에 혈교 단독으로는 힘들 것 같소만. 아무리 혈교가 대단하다고 한들 정사파가 모두 모인 총무련을 상대하는 건 달걀로 바위 치기가 아닐까 싶은데……."
"이 자식이!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우리에겐 연합세력이 있다고!"
그 순간 여인의 뾰족한 말이 들려왔다.
"안 돼요!"
혈천 일위가 찔끔했다.
'아하, 네가 괜한 말을 했구나? 뭐 살인멸구하면 되지.'
주성진은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짐을 알고도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음, 필시 총무련에 반기를 드는 세력과 손을 잡았을 거야. 그러니 거리낌 없이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겠지…….'
주성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모르는 척 그들에게 물었다.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이냐?"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주성진은 자신도 곧바로 반말을 썼다.
"이 자식이! 몰라서 물어? 네놈이 가져간 청동금불상을 되찾으려 한다. 그건 우리가 오랫동안 찾고 있던 물건이라고!"
"왜 찾는 것이냐?"
"시끄럽고, 원래 네놈을 쫓는 추격대가 따로 있다만 네놈 스스로 우리에게 왔으니 우리가 회수해야겠다."
주성진은 그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전서구를 활용하는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빨리 소식을 접할 수는 없어. 전서구는 훈련으로 각인된 구간만 왕복하는데 이루 미루어보아 전서구가 없는 구간에도 연락체계도 잘되어 있다는 말이겠지.'
주성진의 말은 전서구가 전달하지 못하는 공백 구간에는 또 다른 연락체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만큼 혈교의 세력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의미였다.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한다는 소식은 없었지만, 곧 그들을 자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청동금불상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 거냐?"
"그건 네놈이 알 것 없다."
"오라, 비밀이 있나 보군. 그렇다면 더더욱 넘겨줄 수 없지."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놈이, 감히!"
바로 그때였다.
"죽엇!"
기예지는 외침과 동시에 허리에 차고 있던 채찍을 잡고 휘둘렀다.
채찍의 끝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다섯 방향을 노리고 날아왔다.
주성진은 같잖은 듯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오른손을 내뻗었다.
다섯 방향으로 날아오던 채찍은 손쉽게 주성진의 손에 잡혔다.
기예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가 금세 밝아졌다.
'내 채찍을 붙잡은 건 대단하지만, 감히 손으로 잡은 건 너의 패착이야.'
기예지는 전신의 내력을 이용해 채찍을 자신 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채찍은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주성진은 멀뚱히 기예지를 바라보았다.
"뭐하냐? 나랑 장난 하냐?"
"이익! 묵각혈린망의 껍질로 만들어져 맨손으로는 절대 잡을 수 없는 것인데……."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주성진은 묵강혈린망을 잡아당겨 버렸다.
아아악!
그녀가 말에서 떨어지려 했다. 그 순간 혈천육위 중 하나가 소리쳤다.
"아가씨! 어서 채찍을 놓으세요. 저희가 바로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채찍을 놓았고 간신히 말에서 떨어지려는 신형을 붙잡았다.
주성진은 자신에게 온 묵각혈린망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허리춤에 감았다.
"고맙다. 네가 준 선물로 알고 있겠다."
"뭐야. 자식아!"
그러면서 그녀는 혈천육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린다.
"혈천육위 분들! 저놈을 반 죽여서 무공을 전폐해서 내 앞으로 데리고 와요!"
그러자 일위가 대답한다.
"음, 무공이 강해 보여서 반만 죽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아가씨……."
기예지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죽여서라도 제게 가져와요."
주성진은 말을 돌리는 그녀를 보며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사갈 같은 계집이군!"
"아악! 당장 죽여 버려요!"
흥분해 목소리마저 갈라져 나오고 있는 기예지를 보며 혈천육위가 앞으로 나섰다.
주성진은 그들 다섯이 모두 나서자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이 되었다.
"이봐, 설마 나를 상대로 연수합격이라도 할 건가?"
일위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후후, 우리는 확실한 걸 좋아하지. 그리고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너의 떨거지 일행들도 내 부하들이 황천으로 보내줄 테니까. 사이좋게 가라고."
주성진은 어깨를 휘휘 내저으며 오히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잘 된 것 같다. 너희들을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힘든데 한꺼번에 처리해주겠다."
"뭐라! 이런 건방진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