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천뇌불진을 되찾다
임호풍을 대신해 주성진이 나섰다.
"주인장, 내가 값을 치르겠소. 한데 천뇌불진의 내력을 잘 아나 보오?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야. 전진파의 시조인 왕중양이 벌레를 잡기 위해 들고 다닌 것 아니겠습니까. 귀찮아서 장문영부를 그걸로 대신했다고 하더이다."
"아, 그렇소. 하면 진품은 아닌데 비싸게 파는 이유가 무엇이오? 내 생각에 은자 3냥도 비싼 것 같은데."
주인장이 주성진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다.
"안목이 있으시군요. 맞습니다. 어쩌면 은자 3냥도 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판 게 진품이 아니라고 해도 가치가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시대에 만든 몇 안 되는 모조품이기 때문이죠."
"하면 진품은 영원히 없어진 것이오?"
"그야 잘 모르죠. 어딘가에 있지 않겠어요."
주성진은 은자 대신 전표를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 가게에서 가장 추천할 만한 게 있으면 말해보시오. 보고 마음에 들면 살 의향이 있으니."
"좀 비싼데, 그래도요?"
"얼마나 비쌉니까?"
주인장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제발 오늘 그 물건을 처분했으면 하고 바라면서.
"은자 100냥입니다. 비싼 거라 따로 보관하고 있습니다만."
"음, 생각보다 비싸군요."
그 순간 육숭이 옷깃을 당긴다. 그의 표정으로 보아서는 그냥 나가자는 뜻이다.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기에 그럴 수는 있었다. 하지만 주성진은 구미가 당긴다.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는 물건입니다. 다만 좀 녹이 슬었는데 사람들이 녹이 슬었다고 싫어하더라고요."
"그게 뭡니까?"
"청동금불상입니다. 녹의 때를 벗겨내면 그야말로 10배 값어치를 할 물건인데."
주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녹의 때를 벗겨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쉽지 않아요. 제 기술로는 어림없더라고요. 그렇다고 청동금불상 하나 때문에 먼 곳까지 다녀올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게다가 요즘 산적이나 수적들이 늘었다고 들었습니다. 자칫 돈 잃는 건 고사하고 목숨까지 잃을 수가 있어요."
"먼 곳이 어디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곳에서는 녹의 때를 벗겨낼 수 있는 건가요?"
그가 고개를 끄떡인다.
"네,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중원제일장입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방법이 더 있긴 있습니다. 내공의 고수가 본연의 기로 벗겨내면 된다고 하더군요."
그가 말한 주성진도 아는 곳이었다. 중원제일장은 중원 제일의 장인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가게였다. 소재지는 북경에 있었고.
"그렇군요. 그럼 실물을 가져와 보십시오."
"사시는 겁니까?"
"주인장을 믿고 사지요. 하하."
잠시 후.
고물상을 나온 그들은 휘주로 향했다.
온종일 경공으로 북으로 향한 그들은 인근 야산의 능선 부근에 잠시 휴식을 취했다.
주성진은 육승에게 고개를 돌렸다.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은데요."
"북경까지 동행합시다. 우리는 좀 더 북으로 가야 하니까."
주성진은 천뇌불진에서 그가 뭔가를 알아냈다고 짐작했다.
"하하, 저야 상관없습니다."
"고맙소. 우리가 짐이 되지는 않을 것이오. 당장 이 근처에 숨어 있는 쥐새끼부터 잡아드리지……."
"조심하십시오. 세게 물릴 수 있습니다."
육숭은 주성진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상일아, 손 좀 봐주어라."
"예, 사형."
천상일은 반대편 숲속으로 향했다.
"나오시지?"
부스럭!
"하하, 안녕하시오. 그대들을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소이다."
수풀에서 나타난 자는 군데군데 흙을 묻힌 자였다. 나이가 좀 들어 보이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게 나이 든 얼굴은 아니었다.
"그럼 왜 기척을 숨기고 있었던 거요?"
"그야, 내 마음 아니겠소?"
"당신 옷차림이나 몰골을 보니 좀 많이 수상한데. 게다가 우리의 기척을 알고 숨은 것을 보니 무공을 익힌 것 같기도 하고……."
그는 눈을 한번 아래로 내리 깔았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당신들을 해치기라도 했소? 그냥 모른 척하고 갈 길 가시오."
"아니 그렇게는 못 하겠소. 제대로 모습을 감출 거면 여기에 숨을 곳이 많소이다. 한데 당신은 어른 다리에도 못 미치는 수풀에 엎드려 있었소. 그랬다는 건 상당히 급했다는 건데. 음, 내가 가까이 갈 터이니 거기 꼼짝 말고 서 있으시오."
순간 그가 다급히 손을 내젓는다.
"가까이 오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니까 더더욱 수상한데… 하하."
천상일은 점점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반대로 상대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천상일의 경계심은 점점 누그러졌다.
그렇게 그와 반 장 정도 되는 거리까지 다가갈 무렵 상대는 그때까지 쥐죽은 듯 조용히 서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맹렬한 바람 소리가 일어났다.
쉭!
상대는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올려 천상일의 가슴을 가격한 것이다.
주먹에서 위맹한 소리가 날 정도이니 그 위력은 미루어 짐작할만했다.
"헉!"
순간 천상일은 일순간 머리가 텅텅 빈 것 같았다.
'이런 제길! 주먹을 피할 수가 없다니!'
보통 싸움을 하게 되면 상대는 공격하기 전에 자신이 공격할 부위를 잠깐 곁눈질한다거나 아니면 팔 근육이나 다리 근육 등을 움직여 공격의 전조를 알려주기 마련이다.
천상일과 같이 경험 많은 고수는 그런 사소한 것을 보고 상대의 의중을 짐작하여 적절한 초식으로 방어나 반격하기 마련이었다.
한데 눈앞의 정체 모를 자는 전혀 그런 조짐이 없이 공격해왔다.
이로 인해 천상일은 자신의 절기를 사용할 기회를 잃었다.
더더구나 뻗어오는 주먹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가장 짧고도 이상적인 권로를 따라 가슴을 가격해왔기 때문에 천상일은 피하기조차 힘들었다.
'이런 망할… 내가 이렇게 무력하다니…….'
천상일은 순간적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얼른 기력을 끌어 모았다. 반격도 방어도 안 된다면 맞아주는 도리밖에 없다.
'버티자, 버티면 기회는 온다.'
천상일은 늘 몸을 단련해왔기에 맷집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한편 이 광경을 지켜보던 주성진은 뭔가를 감지해냈다.
'음, 상대가 구결을 되새기고 있구나.'
주성진의 말처럼 그는 구결을 읊조리고 있었다.
머리 위로 힘차게 기력을 밀어 올린다. 엉덩이를 들어 올려 독맥으로 양기를 상승시킨다. 가슴을 들이밀어 음기를 임맥으로 하강시킨다. 발가락으로 지면을 붙잡듯이 힘차게 내딛는다. 다리와 팔을 완전히 펴지 않고 구부린다. 기를 단전으로 모으고 어깨를 내린다…….
바로 그때 상대는 자신의 주먹을 통해 기가 빠르게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지금껏 실패했는데 이 순간에 성공하다니…….'
기분이 묘하다. 그의 심정은 기쁘면서도 착잡했다.
기쁜 건 자신이 권풍을 내보냈다는 것이고 착잡한 건 권풍을 내보낸 건 전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상대는 자신의 빠른 주먹으로도 요리할 수 있었다. 한데 자신의 주먹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기가 발산되어 버린 거였다.
'큰일이다. 내공이 바닥을 드러내겠는데. 그러면 다른 자들을 상대하기 어려운데…….'
그는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권풍은 천상일에게 날아갔고, 그 순간 천상일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죽는 것인가… 안 돼. 사부님의 소원대로 반드시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절체절명의 위기.
펑!
천상일은 눈을 감았다. 그는 눈을 감은 관계로 그의 앞에 긴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 아픈 데가 없는데… 어떻게 된 것이지? 분명 폭음 비슷한 소리를 들었는데…….'
천상일이 눈을 떴다.
"주 상단주님!"
주성진이 정체 모를 자의 완맥을 쥐고 있었다.
"좀 조심하지 그랬소. 하마터면 송장 치를 뻔했소이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순간 육숭이 끼어들었다.
"이 멍청한 자식아. 주 상단주가 이형환위로 상대의 권풍을 막고 금나수로 상대를 제압했어. 주 상단주나 되니까 그리 할 수 있었던 거야. 넌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바로 이때 여성의 뾰족한 소리가 들린다. 주성진은 알고 있는 듯 별반 놀라지 않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제 남편을 살려주세요. 제발……."
알고 봤더니 수풀 속에선 여인이 숨어 있었다. 주성진조차 애초에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가까이서 직접 눈으로 보기 전까진.
초고수를 속일 정도면 그녀는 놀라운 은신술의 소유자였다. 당연히 귀식대법은 완벽히 익혔을 것이고.
주성진을 필두로 차례로 일행들은 그들이 왜 수풀 속에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눈치가 좀 모자란 임호풍이 용모가 뛰어난 여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부부 관계를 한 것이오?"
그녀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음……."
주성진이 손짓으로 임호풍의 입을 저지했다. 그리곤 여인을 바라본다.
"상황을 설명해줄 수 있겠소? 민감한 부분은 두루뭉술하게 말해도 좋소."
여인은 주성진의 놀라운 무위를 직접 눈으로 봤기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체념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상황은 그래요. 뭐 저희가 부부 관계 중이었어요. 한데 댁들이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수풀 속에 감춘 이것들은 다 무엇이오? 내 생각에 이건 연장들 같은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저희 부부에겐 무척 중요한 일이라서요. 물론 나름의 기대는 하고 있지만……."
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건 주성진이 사파나 마교 출신은 아닌 거로 보인다는 거였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혹 검호나, 검호상인이라는 별칭을 들어봤소? 내가 그 사람이요."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전설의 이기어검 고수?"
"뭐 전설까지는 아니고… 난 상단을 운영하는 주성진이라 하오이다. 내가 정체를 밝혔으니 그대들도 정체를 밝히시오."
그녀가 애처로운 모습으로 주성진을 바라본다.
"대인, 저희 남편을 풀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절대 도망가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습니다."
주성진은 그의 점혈과 아혈을 풀어주었다.
"감사합니다, 대인. 제가 모든 걸 소상히 밝히겠습니다."
그녀가 모든 걸 털어놓으려 하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저희 남편은 전직 도굴꾼이고, 저는 전직 살수였습니다. 청부를 받아 남편을 살해하려다 어찌어찌해서 눈에 맞아 부부의 연을 맺었습니다. 해서 저는 검은구월단을 배신한 대가로 여태껏 조직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배신한 대가는 죽음이고요."
주성진은 그제야 그녀의 은신술이 완벽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직 살수였구나. 아마 특급 살수였겠지. 어떻게 하다가 눈이 맞았을꼬? 참으로 궁금하구나.'
"검은구월단이 살수 단체의 명칭이오? 명칭이 특이한데……."
"네, 그렇습니다. 검은구월단은 여인들로 이루어진 살수문입니다. 계통으로 따진다면 마교가 기원이지요."
"그럼 숲속에 감춘 연장들은 다 무엇이오? 모두가 도굴에 필요한 연장 같은데……."
그러자 이번에는 그녀의 남편이 입을 열었다.
"대인, 그건 제가 말씀드리지요. 아 그전에 저는 임하응이라 합니다. 그리고 제 부인은 강설민이고요. 사실 제가 도굴에 손을 씻고 장사를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관리하지 않는 무덤까지 모른 척하진 않습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일이니까 말이죠……."